
국가민속 문화유산
복온공주가 홍장삼과 대대 , 의상



유물번호 : (홍장삼) 고궁3658 (대대) 고궁3659
연대 :조선
재질 : 사직/ 견
크기(cm) : (홍장삼) 뒷길이: 128.5cm, 앞길이: 115.5cm, 화장: 92.8cm, 품: 38.2cm, 진동: 22.8cm (대대) 길이: 330.5cm, 너비: 5.7cm
「복온공주가 홍장삼과 대대」는 조선 제23대 왕 순조(純祖)의 둘째 딸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1832)의 홍장삼에서 유래한 유물로서, 왕실 기록 속 홍장삼의 실체를 보여주는 유일한 예로 조선왕실 복식문화 연구에 있어 사료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정교하고 화사한 자수가 특징인 ‘홍장삼’은 공주·옹주 등 조선 왕실 여성의 혼례복으로 왕실 기록에서 그 명칭과 용도가 확인되며, 현존하는 왕실 복식 수본(繡本)에서 홍장삼의 형태상 특징을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대대’는 홍장삼 착용 시 가슴 부분에 두르는 폭이 좁고 긴 띠로서 봉황문을 부금(付金)하여 장식하였다.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 1819~1853) 집안에 전해 내려온 것으로, 복온공주가 1830년 김병주와 가례(嘉禮)를 올릴 때 혼례복으로 착용했다고 알려져 왔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 후손들이 혼례용으로 착용하는 과정에서 수선에 따른 형태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옷의 형태와 구성법, 직물 규격, 자수 문양 등 현재 모습은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형태로 볼 수 있으나, 유물의 유래와 전승 과정이 명확하고 조선 후기 공주 가례에 사용된 홍장삼의 무늬와 자수 기법, 직물 종류, 색상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 다양한 문양과 장식 기법이 적용되었음에도 조형적으로 균형과 안정감이 있고 궁중 자수의 아름다운 도안과 색상, 고도의 자수 기술을 확인할 수 있어 공예적 가치 또한 크다.
영친왕 일가 복식 및 장신구류 , 의상


유물번호 :
연대 : 19세기 말
재질 : 직물
크기(cm) : -
총 333점으로 일괄지정된 이 유물에는 왕과 왕비가 사용하였던 곤룡포와 적의, 그리고 왕자가 사용하였던 자룡포가 포함되어 있다. 적의는 고려시대 말 부터 전해내려오는 왕비의 궁중의례복식인데 특히 영친왕비의 적의는 광무원년(1897년)에 제정된 적의제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하피·폐슬·후수·패옥 등이 원형대로 갖추어져 보존되어 있다. 이 유물들은 영친왕비가 일본 거주 당시 소장하다가 관리의 어려움으로 1957년부터 동경국립박물관에서 보관하였다가 1991년 한일정상회담의 합의로 환수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110여 년 전의 왕실복식의 전모를 알 수 있고, 한 가족이 사용한 유물이라는 점, 그리고 복식류의 구성요소와 형태 및 착장상태 등을 상세하게 알 수 있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남은들상여[남은들喪輿] , 기탁



유물번호 : 기탁유물
연대 : 1840년 ~ 1852년
재질 :복합
크기(cm) : -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李球, ?~1822)의 시신을 장지까지 운반했던 상여이다. 행상, 영여, 온량거라고도 한다.
긴 멜대를 중심으로 한 기본틀 위에 관을 싣는 몸체를 조성하고 맨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넓은 천을 펼쳤다. 몸체에는 봉황, 용무늬 등이 새겨지고 색색의 띠와 술을 늘어뜨려 화려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주고 있는데 망자의 명복을 빌고, 슬픔을 덜어주려는 의미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왕실에서 사용하던 상여에 비해 소박한 모습이지만 왕실 상여의 제작을 담당하던 ‘귀후서(歸厚署)’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남연군은 1822년(순조 22)에 죽었는데 당시의 가야사 터(현재, 예산군 상가리에 있는 보덕사터)가 왕손을 낳게 하는 명당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흥선대원군이 1840년(헌종 6)에 가야사를 불태우고 아버지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이장을 하고 난 그 다음 해에 둘째 아들 이재황(李載晃, 후에 고종으로 즉위)을 낳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상여의 제작은 1840년과 고종의 탄생년인 1852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상여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상여라는 점, 다른 상여에 비하여 제작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는 점, 각 부의 조각수법 등 당시의 상여조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