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 물
신법지평일구 (숭정9년명)[新法地平日晷 (崇禎9年銘)]


유물번호 : 창덕12939
연대 : 1636년
재질 : 석제
크기(cm) : 가로 120.3㎝, 세로 57.5㎝, 두께 16.5㎝
1636년(인조 14)에 중국 명나라 이천경(李天徑)이 제작한 평면 해시계이다.
대부분의 해시계는 반원모양인데 비해 이 해시계는 시간이 표시되어 있는 면, 즉 시반(時盤)이 수평을 이루고 있어 지평일구(地平日晷)란 이름이 붙었다. 흰 대리석으로 제작하였으며, 무게가 310㎏이나 된다.
시반면은 잘 연마된 평면 위에 시각선과 절기선을 조밀하고 아름답게 새겨넣어 구성하였다. 시각선은 한시간을 4각(角)으로 나누고 1각마다 시각선을 하나씩 그어 오전 5시45분부터 오후 6시15분까지 알 수 있게 하였다. 절기선은 하지에서 동지까지 13개선으로 이루어 졌는데 지금은 없어졌지만 가운데 삼각형의 시표(時表)가 있었다.
이 해시계가 만들어진 표준위도가 중국 북경의 위도와 같은 것으로 보아 북경을 관측지로 삼아 중국에서 제작한 시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1645년에 돌아오면서 그 일행이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신법지평일구[新法地平日晷]


유물번호 : 창덕12940
연대 : 1700년대 초반
재질 : 석재
크기(cm) : 가로 38.3㎝, 세로 59cm, 두께 16㎝
검은색 대리석으로 만든 해시계이다.
해시계 측면에 제작 시기가 18세기 초 임을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전체적인 구조와 평면에 그려진 시각선, 절기를 나타낸 선이 중국의 것과 같다는 점에서 중국의 해시계를 본 떠 관상감(觀象監)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앙부일구(仰釜日晷)는 해의 그림자가 비치는 면이 오목한 가마솥과 같다는 의미인데, 이 해시계의 경우, 원래 반구형인 앙부일구를 전개하여 평면에 옮겨 놓은 것과 같은 모양으로 시간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원리는 그래프 용지에 1㎝ 간격으로 동심원과 10°간격의 방사선을 그어놓고, 그 중심에 막대를 세워 시각에 따른 그림자의 변화를 보는 방식이다.
간평일구·혼개일구[簡平日晷·渾蓋日晷], 과학기기


유물번호 : 창덕12941
연대 : 1785년
재질 : 석제
크기(cm) : 가로 52.3㎝, 세로 128.5㎝, 두께 12.3㎝
두개의 해시계를 하나의 돌에 새긴 독특한 형태의 해시계이다.
1785년에 만들었으며, 수도인 한양의 위도 37도 39분 15초와 황도와 적도의 극거리 23도 29분을 측정기준으로 삼았다.
간평일구는 해의 그림자가 비치는 면이 오목한 가마솥과 같다는 의미의 앙부일구(仰釜日晷)를 그대로 평면 위에 옮겨놓은 형태를 하고 있다. 평면 원의 중심을 천정(天頂)이라 새기고 시각선의 복사점을 북극이라 새겼는데, 이 북극에 맞춰 보아 상공의 태양운행과 시간을 알 수 있게 고안한 것이다. 해시계 면의 지름은 43㎝이다.
혼개일구는 원안에 곡선으로 이루어진 세로선과 가로선을 그렸는데, 세로선은 시간을, 가로선은 계절을 나타낸다. 가운데 바늘의 길이는 원지름의 반이고, 그림자의 변화에 따라 시간을 알 수 있다. 또한 절기마다 정오에 태양의 고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계절선에 나타나는 그림자 길이가 다른 것을 보고 24절기를 알 수 있다. 해시계 면의 지름 46㎝이다.
이 2구의 해시계는 시계면의 선들이 정확하고 정교하며 구조가 독특하다는 측면에서 가치가 크다.
소총통[小銃筒] , 과학기기


유물번호 : 보물
연대 : 조선시대
재질 : 금속
크기(cm) : 길이 75.5㎝, 지름 1.6㎝
조선 선조 때 만든 휴대용 화기로, 도화선에 손으로 불씨를 붙여 사용한다.
조선시대의 개인 휴대용 화기였던 승자총통보다 길이가 길고 대나무와 같은 마디가 고르게 연결되어 있어서 승자총통보다 발달된 화기이다. 총신은 약간 구부러져 있는데, 발사과정에서 탄환이 힘을 받아 멀리 나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총신이 길어 화기가 새지 않고 탄환이 명중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화약을 넣는 약실을 약간 도톰하게 제작하였다.
제작연대(만력 19년, 1591년)와 화약의 용량, 제작자 등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화기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연구자료이다.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 무구

유물번호 : 창덕12946
연대 :조선시대
재질 : 금속
크기(cm) : 지름 21㎝, 둘레 68㎝
조선 전기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한 인마살상용(人馬殺傷用) 폭탄이다.
임진왜란 때 경주 부윤이었던 박의장이 경주성을 탈환할 때 사용하는 등 주로 조선 중기에 사용되었다.
도화선을 감는 목곡(木谷)과 목곡이 들어가는 죽통(竹筒), 그리고 얇은 철 조각, 뚜껑 등으로 구성되었다. 표면은 무쇠로 둥근 박과 같고 내부는 화약과 얇은 철 조각들로 장전하게 되어 있으며, 화포의 일종인 완구(碗口)를 이용하여 발사하도록 제작되었다.
이 비격진천뢰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물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아 문헌과 비교 연구할 수 있는 유물이며, 화포 연구와 탄환 발전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왕세자탄강진하도 병풍[王世子誕降陳賀圖 屛風] , 회화


유물번호 : 창덕6407
연대 : 1874년
재질 : 비단에 채색
크기(cm) : 병풍 세로: 269cm, 가로: 43.3cm | 화면 세로: 133.5cm, 가로: 37.5cm
왕세자(순종, 1874~1926)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그린 궁중기록화이다. 1874년(고종 11) 2월 14일에 창덕궁 인정전에서 거행한 진하례 의식 광경을 그렸다.
전체 10폭으로 구성되었는데, 가운데 8폭은 진하례 광경을, 좌우 양쪽의 폭에는 관원들의 좌목과 성명을 적었다. 진하례가 열리고 있는 창덕궁 인정전을 중심에 배치하고 양쪽 옆으로 주변의 다른 건물들과 나무, 산봉우리 등을 그렸으며, 각 인물들과 건물 등이 모두 짙은 색채로 섬세하게 묘사되었다. 진하례 광경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부감법(俯瞰法)을 사용하여 그렸는데 인정전 건물의 기둥과 벽면을 훨씬 높게 표현하여 실내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상세히 보여준다.
은입사귀면문 철퇴[銀入絲鬼面文鐵鎚] , 무구


유물번호 : 창덕12947
연대 : 조선시대
재질 : 금속
크기(cm) : 길이 73.3cm
19세기 경 의장용으로 제작된 무기이다.
철퇴는 쇠로 만든 망치라는 뜻으로 짧은 자루 끝에 무거운 쇳덩이를 달아서 그 무게로 적에게 타격을 가하는 무기이다.
이 철퇴의 손잡이와 몽둥이 끝은 은입사기법으로 꽃무늬와 도깨비 문양을 장식한 것으로 볼 때, 실전용이 아닌 의장용 병기였음을 알 수 있다. 도깨비는 각종 재앙과 질병 그리고 사악한 모든 것들을 막아내는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존재로서 이 문양을 새겨넣어 천재지변과 각종 재앙을 물리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철퇴의 형태는 추와 자루가 고정되어 있는 것 또는 추와 자루가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것도 있다. 추는 둥근 것 뿐만 아니라 표면이 울퉁불퉁한 것도 있으며, 파괴력은 도검에 비해 강한 편이나 신속하지 못한 단점을 지니고 있어서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이 철퇴는 감입한 은사의 기법, 입사무늬 등의 측면에서 제작기술이 우수하며, 현재 동일한 유물이 없어 희귀성을 지닌다.
마천목좌명공신 녹권[馬天牧佐命功臣錄券] , 기탁

유물번호 : 보물
연대 : 1401년
재질 :종이
크기(cm) :
조선 태종 1년(1401) 공신도감에서 절충장군 웅무시위사상장군(折衝將軍 雄武侍衛司上將軍) 마천목(馬天牧, 1358~1431)에게 발급한 필사본 녹권이다.
이 녹권은 후에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이 되는 정안군(定安君)을 도와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던 좌명공신 47명에게 발급된 것 중의 하나로서 현존하는 유일본이다. 태종은 자신을 도운 47명의 공신을 선정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칭하하고, 4등급으로 나누어 포상하였는데 이 중에서 마천목은 3등 공신으로 녹권을 사급받았다. 조선 초기에 사급된 개국공신녹권 및 개국원종공신녹권과 비교해 볼 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출납(出納)에서 의정부(議政府)의 관(關)으로 바뀐 것 이외에는 서식(書式)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공식녹권의 체제나 양식변화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현재 지정된 조선초기의 녹권들이 대부분 원종공신녹권이며, 이화개국공신녹권만이 정공신 녹권이란 점에서 보면, 마천목 좌명공신 녹권은 역사적, 학술적으로 가치가 크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기탁유물로 관리하고 있다.
연잉군 초상[延?君 肖像] , 회화


유물번호 : 창덕6362
연대 : 1714년
재질 : 견본(비단에 채색)
크기(cm) : 전체 세로: 244cm, 가로:98cm / 화면 세로:183cm, 가로:87cm
영조가 즉위하기 전 연잉군(延礽君)이었던 시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이다.
숙종은 당시 병상에 있었던 자신을 밤낮으로 시중을 들었던 21세의 연잉군과 연령군(延齡君, 1699~1719)을 기특하게 여겼기에 1714년 화원 박동보(朴東普, 1673~1744년 이후)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왼쪽 상단에 “처음에는 연잉군에 봉해졌고 호는 양성헌이다(初封延礽君古號養性軒).”라는 표제가 있다.
이 초상화의 연잉군은 일반 공신상의 형식을 따라 사모를 쓰고, 왕자를 상징하는 백택(白澤) 흉배가 부착된 녹색의 단령포를 착용한 정장관복을 착용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흉배를 금박으로 뒤에서 배채하고 앞에서도 금으로 화려하게 채색하여 신하의 초상과는 격을 달리하였다. 연잉군은 호랑이 가죽이 깔린 교의자에 앉아있으며, 넓은 소매 속으로 감춰진 두 손을 가운데로 모으고, 두 발은 받침대 위에 올리고 있다.
화면의 오른쪽 부분이 소실되어 복식의 일부를 볼 수 없지만 얼굴, 흉배, 관대, 족좌 부분이 온전히 남아있고 생전에 직접 보고 그린 조선 왕자의 정장관복 초상으로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작품이어서 당시 왕실 초상화의 기법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이다.
철종어진[哲宗御眞] , 회화


유물번호 :창덕6364
연대 : 1861년
재질 :비단에 채색
크기(cm) :화면 세로:202cm, 가로:93cm
철종(哲宗, 재위 1849~1863)이 31세 때인 1861년의 모습을 그린 어진이다.
전신 교의좌상 어진이다.
철종은 공작 깃털이 달린 전립을 쓰고 가슴과 어깨에 용보가 달린 전복(戰服)을 착용하고 있으며, 의자에 앉아 한쪽 손을 의자 손잡이에 올려놓고 있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나의 31세 모습이다(予三十一歲眞).”이라는 표제가 적혀있는데, 철종이 직접 쓴 것이다. 그 옆으로 철종의 묘호와 존호인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이라 적혀있다. 화면 왼쪽이 불에 타 소실된 상태지만 전립(戰笠)을 쓰고 군복을 입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입 부분을 제외한 얼굴도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다.
1861년 철종의 어진 제작에는 이한철(李漢喆, 1812~1893년 이후), 조중묵 등이 화사로 참여하였으며, 『어진도사사실(御眞圖寫事實)』(1861년 이후)에 제작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성윤 위성공신교서 및 관련 유물[李誠胤衛聖功臣敎] , 기탁

유물번호 :
연대 : 1613년
재질 : 종이
크기(cm) : 교서 : 38.7cm × 311.5cm (34.7cm×233.7cm) / 교지 : 58.6cm x 87.5cm
이성윤(李誠胤, 1570~1620)이 1613년(광해군 5)에 위성공신(衛聖功臣) 2등(等)에 녹훈(錄勳)될 때 하사받은 위성공신교서(衛聖功臣敎書)와 관련 유물이다.
광해군(光海君, 재위1608~1623)은 1613년 임진왜란을 극복하고 자신의 즉위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위성공신과 익사공신(翼社功臣), 정운공신(定運功臣), 형난공신(亨難功臣) 등을 내렸다. 그러나 1623년의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이 폐출되자 모두 삭훈(削勳)되었다. 그 결과 실록을 비롯한 모든 기록에서 삭제되었으므로 인적사항 등 자세한 사항이 전하지 않고 대강만 알려져 있을 뿐이었는데 이 교서를 통하여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광해군 때 공신에게 내려진 교서의 형태를 완벽하게 간직하고 있으며 뒷면에는 제진자(製進者) 및 서사자(書寫者)가 밝혀져 있어 교서의 양식과 문체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함께 보관된 <교지>는 1669년(현종 10) 8월 24일에 금산군 이성윤(錦山君 李誠胤)에게 승헌대부(承憲大夫)(정2품)에서 흥록대부(興祿大夫)(정1품)로 올려주고 충정(忠貞)의 시호(諡號)를 내리는 증시교지(贈諡敎旨)이다. 교서와 교지 외에 이 가문에는 호패(號牌)와 아홀(牙笏)이 전한다. 한 가문(家門)의 호패(號牌)가 150년(1677-1822)간에 걸쳐 16개가 남아 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므로, 호패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아홀(牙笏)은 1품에서 4품에 이르는 고위관직(高位官員)이 지니는 것으로, 이징구(李徵龜)나 이태구(李泰龜)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기탁유물로 관리하고 있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어새[皇帝御璽] , 어보


유물번호 :고궁838
연대 : 1897-1910년
재질 : 금속
크기(cm) : 가로 5.2㎝, 세로 6.6㎝, 높이 4.9cm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의 어새이다.
어보는 조선시대 의례용 도장으로 황제의 인장에는 '새(璽)'를 사용하여 어새라고 한다.
고종 황제어새는 귀뉴형(龜鈕形) 금보(金寶)로서 금과 은의 합금으로 만들어졌다. 글자가 새겨진 인면(印面)에는 ‘황제어새(皇帝御璽)’ 4자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어 제국의 황제가 사용한 어새로서의 기품을 지니고 있다. 인면을 깎아 글자를 새겨 넣은 기법인 착인법(鑿印法) 역시 조선시대 어보 제작에 사용하던 전통방식을 따라 제작되었다. 또한, 어새와 함께 보물로 지정된 내함(內函)은 황동으로 만들어졌으며 특이하게 내부에 인주함(印朱函)이 들어 있다.
이 어새가 찍혀있는 서신으로는 '1909년1월1일에 고종황제가 호머 헐버트에게 미국에 유학 간 조카(조남복)를 잘 돌봐달라고 요청하는 서신'이 있는데 이를 통해 황제어새가 당시에 사용한 실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03년 11월 23일 이태리 군주에게 보낸 친서' 등을 통해 고종황제가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지키기 위해 이 어새를 비밀리에 제작하고 휴대하며 사용하였으며, 황제위(皇帝位)에서 물러난 후에도 개인적인 사신(私信)에 계속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어새가 다른 어새에 비하여 작은 크기로 제작되었고,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에 수록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 준다. 고종황제는 일본의 국권침탈을 막기 위해 비밀 외교활동을 펼치면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어새를 새로 만들 필요성을 가지게 되고, 기밀 유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당시 국새, 어새를 관장한 내대신(內大臣)의 직제를 통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관장하여 사용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고종황제는 퇴위 후에도 이 어새를 간직하며 개인적인 용도로 계속 사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