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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동해건설산업 2025. 10. 12. 14:48

지식[민속자료]

조선시대의 신분증 (호패)

 

호패(조선시대의 신분증)

호패(조선시대의 신분증)

 

여러분들이 만으로 18세가 되면 나라에서는 주민등록증이라는 것을 발급해주게 됩니다. 이때의 기쁨은 이제 당당한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으로 오랜 동안 기억에 남을 만큼 큰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민등록증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아직 발급 받지 못한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내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주민등록증은 처음 우리가 느꼈던 벅찬 기쁨과는 관계없는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문서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얼마안가 군대에 간다는 뜻도 되고, 또 이런 저런 세금을 부과할 나이가 되었다는 표시가 됩니다.

이렇게 신분증은 단순히 내가 누군가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 이상의 복잡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지금의 주민등록증 제도와 거의 유사한 것이 조선시대의 호패제도입니다.

호패는 조선시대 16세 이상의 남자가 차고 다닌 신분증이었습니다. 이 제도는 고려 공민왕때 처음 시행되었으나 조선 3대 태종 때에 들어와 비로소 전국으로 확대 실시되었습니다.

그 목적은 각 집안을 명백히 알아보아 세금을 부과할 백성의 수를 파악하고, 직업·계급을 분명히 하는 한편,

신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 중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사를 모집하는 것과 나라를 위해 일정기간 노동력을 제공하는 부역의 기준을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백성을 나라에서 정확히 헤아려서 누구 한 사람도 세금이나 군대 갈 의무를 피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그렇지만 백성의 입장에서 이 제도는 곧 주민명부와 병역의무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 여러 가지 의무를 부담해야 한다는 의미였으므로 정말로 반갑지 않은 존재였음이 분명합니다. 이 시대는 지배층의 백성에 대한 수탈이 아주 심하였고 백성들은 정말로 가난한 삶을 살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를 피하기 위하여 양반의 노비로 들어가거나 호패를 위조하는 등 법을 어기는 일이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결국 나라에서는 이러한 백성들의 불법을 더욱 잘 감시하려고 ‘5가작통법이라는 제도를 함께 실시하게 됩니다. 이것은 한 마을의 이웃 다섯 집안을 하나로 묶어 서로 법을 어기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세금을 공동으로 내도록 하는 제도였습니다. 혹 어느 한 집안이 세금이 너무 많아 도망을 하게 된다면, 나라에서는 나머지 네 집안에 그 부담을 떠넘기게 되므로 나라의 세금 수입에는 별 차이가 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남아있는 백성들만 어려워지게 되므로, 서로 도망가는 집안이 나오지 않도록 감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호패제도는 개인의 신분을 증명하는 문서이면서, 조선의 양반 지배층이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한 통치 정책으로 실시한 것이었습니다.

 

옛날 살림집의 여러 모습(강릉선교장)과 생활용품 (··주 관련)

 

여러분은 지금 어떤 집에서 살고 있습니까? 집의 모습은 나라나 시대, 위치 혹은 그 집이 쓰이는 용도에 따라 그 종류가 너무나 많아 셀 수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어떤 집에서 살았으며, 그 집의 특징과 모습은 어떠했는지 함께 알아봅시다. 우리 조상들이 살던 집은 지방에 따라, 신분의 높낮이에 따라 그 모습과 특징이 모두 달랐는데 한옥(우리나라의 전통 집을 말함)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강릉에 있는 선교장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민가의 모습

민가는 지방이나 기후에 따라 그 모습이 매우 다른데 그 종류는 다양해서 너와집·초가집·귀틀집 등이 있습니다. 너와집은 나무나 청석 판으로 지붕을 이은 집으로 보통은 나무로 만든 것을 너와라고 부릅니다. 원래 너와집은 나무가 많은 산간 지방의 백성들이 짓고 살았는데 나무로 이은 지붕이 날아가지 않도록 돌을 얹어 놓기도 합니다. 너와집은 나무와 나무 사이에 틈새가 있어 환기도 잘 되고 연기도 잘 빠져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눈이 덮이게 되어 따뜻합니다. 그렇지만 요즘은 산림보호와 새마을 사업 등에 의해 거의 없어져 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백성들이 가장 많이 살았다는 초가집은 우리나라 농촌 어디서든 볼 수 있었던 서민들의 집으로 지붕을 볏 짚단으로 엮어서 얹기 때문에 기와집처럼 세련된 모습은 아니지만 초가지붕의 둥글고 울퉁불퉁한 모습이 보는 사람을 편안하고 포근하게 해 줍니다. 집은 짚을 섞어 바른 진흙 벽으로 단순하고 소박하며 큰방, 작은방, 부엌과 헛간이 대부분 옆으로 나란히 한 일()자 모양으로 붙어 있는 모습입니다.

특히 제주도의 초가집은 심한 바람에 지붕이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새끼줄로 지붕을 매었는데 이는 그 지방의 자연 환경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이용하는 지혜를 느끼게 해 줍니다. 통나무를 우물 정()자의 모양으로 쌓아 올려서 벽을 만드는 귀틀집은 그 역사가 매우 깊은데 나무와 나무 틈새는 진흙을 발라 메워서 바람이 들지 않아 따뜻합니다. 이렇게 우리나라 집들은 서로 다른 재료와 모양을 갖추고 있지만 그 속에는 조상들의 지혜가 살아 숨 쉬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옥의 특징

한옥은 나무로 지은 집으로 중국이나 일본의 집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일본 집에는 마루와 마루로 된 방은 있으나 구들을 놓은 온돌방이 없고, 중국집은 마루도 없고, 구들도 없는 방뿐이지만 한옥은 마루와 구들을 갖춘 세계에서 하나뿐인 집의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계절의 특징이 뚜렷한 나라로 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마루에서 추운 겨울에는 따듯한 온돌방에서 생활하였습니다. 온돌은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바닥 밑의 구들장을 데워 방안을 따듯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 열을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아궁이에 땐 불로 음식을 조리할 수도 있습니다. 한옥의 창은 오늘날 유리창과는 달라서 빛과 바램 잘 드나들 수 있고 방안의 빛과 습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대개 홑 창호지로 발랐습니다.

다락은 안방의 아래쪽 벽 위쪽에 설치된 것으로 꿀단지 같은 귀한 음식에서부터 여러 가지 살림살이에 필요한 물건들을 보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을 응용한 것이 붙박이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한옥의 처마와 기둥, 난간 등은 모두 부드러운 곡선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고, 자연물의 무늬를 이용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강릉 선교장은 어떤 집인가요?

강릉 선교장(국가민속문화재)

강릉 선교장

성읍민속마을은 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 리에 있으며, 국가민속문화재입니다. 제주도 남동쪽 중산간지대에 자리하며 해안에서 9, 해발고도 125m 의 높은 곳에 강원도 강릉시 북평촌에 위치한 선교장(집터가 뱃머리를 연상케 한다고 하여 집의 이름을 선교장(船橋莊)이라 부른다)은 전주 이 씨가 살고 있는 집인데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았던 사람들이 살았던 기와집의 모양을 갖춘 대표적인 집입니다. 반듯하거나 짜임새가 있다기보다는 넓은 땅에 자연스럽게 세워진 집들이 자유스러운 너그러움과 인간생활의 활달함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서울을 중심으로 발달한 안채구조와 이 지방 특유의 담과 담지붕 등 여러 지방의 특색이 함께 사용되어 그 가치가 더욱 큽니다. 주인마님이 계시던 안채와 건넌방, 서재(사당채)로 쓰이던 서별당이 있고, 주인이 주로 계시며 손님은 접대하던 열화당, 맏아들이 있었던 작은 사당, 별당의 임무를 갖고 있는 동별당·활내당이 있습니다. 이 밖에도 동별당의 남쪽과 서쪽의 높은 대문(솟은 대문) 앞에 별채가 있어 필요에 따라 사용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열화당 뒤쪽에 우람하게 서 있는 나무와 활내당 뒷산에 솟은 떡갈나무의 거대한 모습은 선교장 전체의 배경을 이루는 늙은 소나무와 어울려 우아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강릉 선교장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집들의 특징을 고루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가운데서 주변의 환경을 잘 이용하여 집을 짓는 지혜로움과 생활 과학을 발달 시켜 생활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조상들의 슬기로움을 느끼고 배워야겠습니다.

 

옛날 사람들의 종교생활은 어떠했을까? (신앙생활)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였나?

우리나라의 주거지는 큰 산을 의지하여 앞으로 하천을 두고 추운 북서풍을 막고 적을 방어하는 방패로 이용했습니다. 조상들은 산이나 내를 단순한 자연으로 생각지 않고 생명이 있어 살아 약동하는 힘의 원천으로 생각했습니다. 생명의 근원은 땅의 정기에 있다고 보아 인물은 산천의 큰 정기를 타고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자연의 정기를 받을 수 있는 곳에 집터를 잡고 산천을 숭배하는 사상을 가졌습니다.

마을에는 당산이라 하여 마을을 보살펴 주는 신을 모시는데 마을에 따라 국수당이나 산신당·서낭당·장승·각시당·풍어당 등 지역에 맞는 신을 모셨습니다. 국수당은 산 정상에 있고 산신당은 대개 산 중턱에 마련되어 있으며 산 아랫자락에는 서낭당이 있어 부정을 금하는 성역을 이루었습니다. 이들 신앙은 하늘을 숭배하는 천신 신앙으로 천상의 신이 내려오는 곳에서 하늘 신을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는 장승과 솟대, 수구막이가 있어 마을로 들어오는 잡귀·질병·재앙을 막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삼한의 제천의식,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가야 건국의 수로왕 신화, 신라 건국의 박혁거세 신화, 고려·조선의 기우제에서 보이며 조상들이 해온 공동 신앙이었습니다. 또한 매년 주기로 엮어지는 우주의 대운행에 맞추어 때에 맞는 행사를 함으로써 질병도 막고 건강과 체력도 단련하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가정에서는 서민 부녀자들이 중심이 되어 안택(고사와 비스하나 규모가 큼)과 고사 등 집안의 안정과 평안, 풍년, 자손의 번성, 장수와 복, 소원성취, 가족이 무병하고 나쁜 일이 없길 집을 지키는 신들께 치성을 드립니다. ‘고사는 가을걷이가 끝난 뒤에 해마다 지내 복을 빌고 천지신명의 도우심에 대한 감사의 보답으로 지냈습니다. ‘안택은 나쁜 귀신을 막기 위하여 집을 새로 짓거나 고치고 이사하였을 때, 집안의 불안, 질병, 재화를 퇴치하고자 지냈습니다. 집에서 행해지는 가정신앙은 일단 청결한 곳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 외래자의 출입을 금하고 제주는 23일 전부터 몸을 청결히 하고 술·고기와 같은 것을 먹지 않으며 외출도 금하여 부정을 가까이 하지 않는 등 심신을 깨끗하게 준비합니다. 제물은 제일 좋고 처음 난 것을 신에게 먼저 드린 뒤에 받아쓰는 것이 본래의 뜻이기에 치성을 드려 신의 뜻을 기쁘게 하고자 했습니다. 이 제사는 밤중 또는 새벽녘에 대문을 닫아걸고 아무도 모르게 거행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집을 나갈 때는 항상 조상단지나 조상 위패에 인사드리고 집을 나가서도(여행 중에도) 항상 함께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드리고 떠났으며 고갯마루에 장승이나 서낭에도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산이나 들, 부엌, 안방 어디서나 삶의 모두가 신앙이었습니다. 자손번성을 위해 빌었고, 부적을 만들어 집안에 붙이거나 지니고 다녀 귀신이 두려워 물러가게 하였고, 과일 나무에 과일이 처음 열리면 큰 바구니를 가지고 가서 많이 딴 것처럼 여럿이 같이 들고 내려온다던가 하여 풍년 들기를 기원했습니다. 각 신앙물들이 한 역할은 무엇일까요?

 

국수당

국수당은 대개가 마을의 배후 높은 산꼭대기에 위치하여 그 마을을 수호해 주는 신으로 전국에 걸쳐 신앙된 전통적인 마을 신앙의 한 갈래이던 것이 점차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중서부 해안지역에 아직도 전승되고 있습니다. 국수당은 국사봉·국수봉·국시봉 등의 지명으로 남아 있는데, 당은 산봉우리에 있습니다. 당의 형태는 국수당신을 직접 신체로 봉안하지는 않고 국수봉 꼭대기에 돌멩이를 쌓아 두른 돌담 안에 관목 신수가 있는 형태로 하늘 신을 최초로 지상에 모신 형태입니다. 제의는 음력 정월 초이튿날 제를 지냅니다.

아침부터 선출된 제관이 목욕을 하고 몸을 청결하게 한 다음 밤 12시쯤 국수당에 올라가 밥을 지어 바치고 정화수를 떠올린 다음 재배합니다. 그리고 각 집의 호주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농사와 어업이 잘 되고 병 없이 건강한 한 해가 되게 해달라는 내용의 기원을 하고 나서 소지를 올립니다.

 

산신제

산신이란 산을 맡아서 지키는 신으로 대개 신선상이나 호랑이상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이 산신에 제사하는 일을 산제(山祭), 혹은 산신제라고 일컫는데 마을의 배후 산중턱이나 산기슭에 당을 마련해 놓고 매년 정초에 날을 잡아 제사를 올리며 풍요와 건강, 행운을 기원합니다. 산신당은 당집이 없이 바위 밑에 단을 두거나 나무만 있는 경우, 당집과 나무가 있는 경우 등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산신을 숭배한 것은 퍽 오래된 일로써 백제는 산의 신에게 제사했고 신라에서는 봉래산·방장산·영주산과 동쪽에 토함산, 서쪽에 계룡산, 북쪽에 태백산, 중앙에 부악으로 정하여 조정에서 제사를 드리고 국가의 태평을 빌었다고 합니다.

고려 때에는 덕적·송악·백악·목멱산의 산신에게 매년 봄·가을에 무당과 여악으로 하여금 제사하였고 조선조에 들어 와서도 산신제의 유풍은 여전히 계속되었는데 삼각산·송악산·태백산·지리산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장승

제주도의 돌하르방

제주도의 돌하르방

장승은 마을 어귀부근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잡귀, 질병, 재앙, 콜레라, 작은 마마 같이 사망률이 높고 의술로 치료가 잘 안 되는 전염병 등을 몰고 오는 역신을 겁주어 쫓아내는 기능을 하였습니다. 대개 솟대와 더불어 세웠는데, 몸 기둥에 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이라 명문을 쓰고 돌장승의 명칭은 지방에 따라 영남과 호남에서는 벅수’, 제주도에서는 돌하르방’, ‘우석목(偶石木)’이라 불립니다.

장승은 대부분 나무로 만들고 돌로 만드는 것은 드뭅니다. 마을에 차츰 장승의 역할이 많아져 방위가 허한 곳에 세워 방위를 지키게 하고, 마을의 약한 지맥을 다스리기 위하여 명문을 새겨 세웠고, 사찰입구에 세워 경내의 청정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도 세웠으며 성문으로 나쁜 전염병이나 재앙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웠는데 제주도의 돌하르방은 이와 같은 장승입니다. 또한 장승은 이정표로 10리나 30리마다 세워 동서남북중 어느 방향으로 몇 리가 떨어졌고 이웃지명이 무엇인가를 기록해 두어 길을 안내하는 안내판 구실도 했습니다.

 

서낭당

서낭당은 외부로부터 들어와 그들의 생활을 위협하는 질병··재앙·호환들을 인력으로 막아낼 수 없을 때, 마을 입구, 산기슭 등의 허한 지점에 설치하고 서낭신을 봉안하여 신앙함으로써 그들이 사는 마을을 수호하였습니다.

이외에 농어업의 기풍, 상업의 흥성, 병의 치료, 살의 제거, 길에서의 안전 등의 소망을 성취시키 위한 목적으로 서낭당에서 액매기를 하였습니다.

 

기우제

기우제는 가뭄이 오래 지속되어 농작물이 다 타들어 갈 때에 나라와 민간에서 비오기를 기원하여 지내는 제사입니다. 우리나라는 아득한 옛날 삼국시대부터 조정은 물론, 지방관청·민간을 막론하고 용왕신이나 천신에게 비를 내려 달라고 기우제를 지내왔습니다. 옛날에는 가뭄이 심하면 임금이 정치를 잘못한 천벌이라 하여 왕 스스로가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제사를 드렸으며 식음을 폐하고 거처를 초가에 옮겼으며 모든 죄인을 석방하기도 하였습니다. 민간에서는 명산의 봉우리나 큰 냇가에 제단을 만들고 그 일대를 신역(神域)으로 정하여 부정한 사람의 통행을 금하였고 마을 전체의 공동 행사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주는 마을의 가장 연장자, 혹은 마을의 장, 지방 관원의 장이 되었으며 제물로는 닭, 돼지머리, , 과일, , 포 등을 올렸고 어떤 지방에서는 무녀의 가무까지도 곁들였습니다. 또 어떤 곳에서는 명산에 피를 뿌려 더럽힘으로써 하늘이 이를 씻어 달라는 뜻에서라도 비를 내려달라고 개를 잡아 그 피를 산봉우리에 흘려 놓는 일도 있었습니다. 옛날 책에 보면 서울에서는 기우제례로 종묘사직과 흥인문·숭례문·돈의문·숙정문의 4대문에서 제사했고, 오룡제라 해서 동서남북 사교와 중앙인 종각 앞에서 거행하기도 했으며 모화관·경회루·춘당대·선농단 등지에서도 기우제를 올렸습니다.

 

풍어제

풍어제(어촌지역의 마을신앙)

풍어제(어촌지역의 마을신앙)

풍어제는 바다를 접해 사는 어촌마을에서 이루어지는 마을신앙입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긴 해안선과 많은 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바다를 끼고 산 어촌사람들은 먼 옛날부터 바다에서 배를 이용해 어패류를 비롯한 조기잡이·멸치잡이 등을 해왔습니다. 바다에서의 고기잡이는 생명을 걸고 먹고 살기 위한 하나의 절실한 수단이었습니다. 풍어제는 바로 이와 같은 해안지방이나 도서지방의 어촌에서 풍어와 마을의 평안과 운수, 그리고 해상의 안전을 비는 마을 제사입니다.

 

안택

가정신앙의 제주는 어머니들로 가족이 사는 집안을 집밖의 부정하고 잡스러운 잡귀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죽음의 사자가 들어오지 않도록 방어하는 것으로 울타리 안을 성과 같이 튼튼하게 지키는 의식행사로 각 신이 맡고 있는 역할을 제대로 하여 가족에게 축복이 있길 기원하는 행사입니다.

그래서 새로 집을 짓고 이사를 하면 안택굿을 하고 정월과 10월에 고사를 지내 그들을 위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가장 높은 자리의 성주신은 마루에 모시는데 가정의 길흉화복을 관장합니다.

주거지의 안전을 주관하는 터줏신은 지신이라고도 하는데 터주는 집터를 맡아보며 집안의 액운을 걷어 주고 재복을 갖다 주는 신으로 집의 뒤뜰 장독대 옆에 터주가리로 만들어 모십니다. ‘터주가리는 서너 되 들이의 옹기나 질그릇 단지에 벼를 담고 뚜껑을 덮은 다음 그 위에 짚으로 엮어서 원추형 모양을 만들어 덮은 것입니다.

부엌의 불을 주관하고 음식물을 관장하는 신이 조왕신입니다. 이곳에 정화수 한 주발을 매일 아침 어머니가 갈아 올리며 신앙의례를 했습니다. 광에 재산과 복을 주관하는 업신, 탈을 일으키는 측신, 가축을 주관하는 구신, 조상단지나 신주단지라하여 농사 잘되길 기원하는 조상신, 자식들의 수태·생산·발육을 주관하는 삼신, 장독대에 있으면서 간장과 된장을 보살펴 주는 철융신, 우물이 마르지 않게 하는 우물신, 광에 있으면서 재복을 주는 업신, 우마의 번식을 돌보아 주는 우마신, 대문간에 수문신이 있어서 나쁜 액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수문신 등, 집안의 곳곳에 신들이 있어 고사안택때에 그 신들을 위하고 달래는 굿을 마루에서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가정신앙은 집에 있는 신들을 위하는 신앙으로 울타리와 대문을 경계로 집터를 포함한 건물과 가족을 포함하는데, 가택의 요소마다 신이 있어서 집안을 보살펴 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세시풍속

세시풍속은 살아가면서 계절의 변화에 따라 생활 속에서 관습적으로 되풀이하는 민속으로 매년 그 때가 되면 반복합니다. 세시풍속이 우리 생활 속에 정착된 시기는 일정하지 않습니다. 지역 사람들이 공감을 주는 특정한 사건이 벌어졌다던가, 여건이 조성되어 공감을 주었다던가 하는 것과 그 풍습을 전승하여야 할 필요성이 부여되어 계속 실행해 오면서 형성되었다든지 해서 관습화되었습니다. 세시풍속은 향토문화 현상으로 나타나거나, 민족단위로 나타나는 생활 현상입니다. 그러기에 한 번 토착화되면 생활양식이나 의식에 큰 변화가 없는 한 오래 지속되기 마련입니다. 태음력에 의존한 우리의 세시풍속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이룩된 것으로 세시풍속의 형성에 자연환경이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결국, 세시풍속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자연환경과 풍토의 영향아래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생존하기 위해서 계절의 변화를 잘 활용하고 현명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 생업에 따라 계절을 의식하게 되고, 일의 완급이 있게 되는 것으로 그대로 반영되어 생산양식에 맞는 세시풍속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 마을에도 있을까요? (장승)


나주 운흥사 석장승

나주 운흥사 석장승(국가민속문화재)

나주 운흥사 석장승

예전에는 마을 입구에서 제일 처음으로 반기는 장승을 쉽게 만날 수 있었어요. 바로 그 마을에 들어오는 나쁜 전염병을 막기 위한 수호신이기 때문이죠. 마을 사람들은 장승을 통해 하나로 어우러지는 통일된 마을 질서를 유지하기도 했어요. 그러면 우리는 장승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장승이나 장승제를 통해 옛날 사람들의 신앙과 세계관도 알 수 있고, 민중들의 미의식과 생활 속에서 이어지는 예술전통을 배울 수 있어요.

운흥사 터 석장승은 전남 나주시 다도면 운흥사에 있으며 국가민속문화재에요. 몸통에 상원주장군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할아버지 장승은 네모난 돌기둥 모양 그대로의 머리에 둥글고 툭 튀어나온 눈망울과 큼직한 코를 가졌어요. 빙긋이 웃는 합죽이 입가에는 이빨이 새겨 있지만 도드라진 광대뼈와 부드러운 눈썹으로 험악하기보다 보는 사람이 슬며시 미소를 짓게 만들죠. 할머니 장승의 몸통에는 하원당장군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데 튀어나올 듯 동그란 눈과 주름, 허옇게 드러낸 이, 재미있는 광대뼈는 무언가 재미나서 못 참겠다는 듯, 목을 움츠리고 웃는 모습이지요. 할머니 장승 뒤에는 강희 58, 그러니까 숙종 45(1719)에 세웠다는 글귀가 새겨 있어서 비슷한 유형의 석장승들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해요.

또 이 장승의 키는 2.1m랍니다. 남장사 석장승은 경북 상주시 남장사에 있으며 경상북도 지정 민속문화재에요. ‘하원당장군이라는 명문이 새겨 있으며 머릿돌이 뾰족하고 눈이 올라가 강한 인상을 주지요.

충북 음성군 원남면 오미마을에 있는 3기의 석장승이 있는데, 이중 멀리서 얼핏 보아 관음보살의 모습과도 비슷하게 생긴 장승 1호는 미륵모습을 닮은 장승으로 훤칠한 키에 길쭉한 얼굴을 하고 있어요.

 

마을의 화합을 이룬 장승 모시기

석장승(경상북도 시도 민속문화재)

석장승

마을 사람들은 대체로 음력 정월 열 나흗날 장승제를 지내요.

어떻게 지내는지 한번 볼까요? 장승 나무를 메고 산에서 내려와 마을에 들어오면 마을 사람들이 길마중을 나와 풍물을 치며 온 마을 잔치 분위기로 몰아가죠.

아낙네들은 솥을 걸고 음식을 장만하며 할아버지, 할머니, 아이들 할 것 없이 구경들을 나오고 동네 개들도 제멋에 이리저리 뛰어 다녀요.

새 장승을 깎을 때는 이전 장승이 본보기가 되고 눈썰미와 손재주를 가진 사람이 중심이 되어 깎기 시작해요. 그렇기 때문에 한 마을의 장승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지요. 장승이 다 만들어 지면 장승의 밑동이 흔들리지 않게 흙을 다지고 돌을 주변에 둘러쌓는데, 이때 남녀 장승의 눈이 서로 마주치도록 각별히 신경을 쓴답니다.

 

제멋대로 생긴 장승과 단정한 불상

툭 튀어 나온 퉁방울 눈, 크게 벌린 입속에 드러난 이빨, 뭉툭한 코, 눈 밑에 튀어 나온 광대뼈. 이는 바로 당시를 살아온 할아버지, 할머니의 얼굴 그리고 바램이었어요. 나쁜 악귀를 쫓아버리기 위해선 눈을 부릅떠 겁을 주어야 했고 그런 과장된 표현에도 친근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전형적인 우리 민족의 얼굴이기 때문이지요.

귀족층이 믿었던 불상의 얼굴과는 대조적이지요. 입가에 미소를 띠되 얼굴 근육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입만 웃고 있으며 하나도 흐트러짐 없는 꼿꼿한 자세에는 인간의 감정이 철저하게 절제되어 있어요.

반면 장승은 모든 인간의 감정이 숨김없이 솔직하게 나타나 온갖 사회적 모순과 자연적 피해가 많았던 시기에 민중의 아픔을 절절히 느끼는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느낄 수 있답니다. 감정이 절제된 은근한 미소보다는 이빨을 드러내놓고 웃는 호탕한 웃음이 훨씬 친근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요.

잘생긴 연예인의 얼굴에 팔 다리가 달린 장승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어색하지요?

 

영남·호남·충청의 문화 그리고 장승의 생김새

호남지역은 넓은 평야가 펼쳐져 풍부한 쌀을 얻을 수 있었고 그 여유와 넉넉함이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그래서 운흥사 터의 석장승에서도 진도 아리랑의 해학(익살스럽고 풍자적인 말이나 행동)과 유머가 표정에 나타나죠. 백두대간과 바다로 막혀 있는 영남지역은 험악한 산지와 척박한 토양으로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려고 하는 욕구가 강했어요. 따라서 말투에서도 느껴지는 것처럼 억세고 거친 면이 있지요. 이러한 느낌은 장승을 만드는 데도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어요. 상주 남장사 장승의 화가 난듯 치솟은 눈매와 시원하게 둥굴려진 코, 꽉 다문 입에서 느낄 수 있지요. 그리고 얼굴 좌우가 대칭을 이루지 않아서 더욱 강한 인상을 준답니다.

한편, 서울과 가깝고 양반이 많이 살고 있어 감정의 표현이 자유롭지 못한 충청지역에서는 장승의 표현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그대로 볼 수 있어요. 음성군 원남면 오미 마을의 장승은 음각으로 조각하여 표현이 약하며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없지요. 이렇듯 같은 장승이라도 지역마다 또 마을마다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답니다.

 

왜 장승은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을까요?

장승은 나무로 만들거나, 혹은 돌에 조각을 하기도 합니다. 특히 돌로 만든 장승은 전라도지방에 많이 남아 있는데, 이를 벅수라고도 부릅니다. 이러한 장승은 크게 세 가지의 기능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첫째가 마을수호신, 둘째는 경계표식, 셋째는 이정표의 역할을 말합니다. 장승의 밑에 보면 방향표시가 되어 있고 십리라는 거리가 기록되어 있는데, 요즘의 방향표시판 역할을 한 것입니다. 조선 말기에는 십리마다 장승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전염병이 돌면 약도 흔하지 않아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특히 천연두가 많이 퍼져 있었는데, 이를 마마귀신이라고 합니다. 병을 가져다주는 것은 나쁜 귀신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마귀신은 중국에서부터 건너온다고 생각해서 우리나라에는 신의주부터 십리마다 무섭게 생긴 장승을 세워 마마귀신을 쫓아내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가 본 마을 (안동하회마을, 성읍민속마을)

 

타임머신을 타고 옛 조상들의 사는 모습을 보러 가려면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까요?

서울의 남산 한옥마을, 경기도 용인의 민속촌, 전라도 지리산 청학동, 경상도 안동 하회마을, 제주도의 성읍민속마을 등이 좋겠죠. 여기서는 안동하회마을과 성읍민속마을을 가 볼까요?

 

위치 및 불리게 된 이유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방문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안동 하회 마을은 경북 안동시 하회리에 있는데 태백산맥에서부터 흘러 내려온 낙동강이 안동시를 지나 태극형으로 휘돌아 흐르는 곳의 낮은 언덕에 만들어진 조선시대 선비들이 살았던 양반 촌입니다. ‘하회(河回)’라는 지명과 물도리동이라는 별칭도 이러한 지형적 특성에서 지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래는 허 씨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뒤 조선 초기 공조 전서 류종혜가 터를 잡은 뒤로 풍산 류 씨가 번성해왔습니다. 조선 초 유학자 겸암 류운룡과 임진왜란을 슬기롭게 극복한 서애 류성룡이 태어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마을의 문화유산들

안동 하회마을(국가민속문화재)

안동 하회마을

하회마을에는 약 290채의 조선조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어우러져 있는데 이 마을에는 국보 2점과 보물 4, 국가민속문화재 10점등 각종 볼거리가 풍성합니다.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은 보물로 지정된 고택입니다. 나무로 짓고 기와를 얹은 목조 건물로 전체 52칸의 당당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충효당 내부에는 서애 선생의 유물 90여 점을 전시한 영모각이 한켠에 서 있는데 이곳에 국보인 징비록이 있습니다.

겸암 류운룡의 종택인 양진당은 보물로서 하회마을 최고의 고가입니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판각 지붕 양식은 여느 집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은 게 독특하며 건물 주위에 난간을 둘러 누각처럼 만든 것이 인상적입니다.

 

마을에서 행하여진 민속놀이

비정기적인 민속놀이로 양반의 허위를 풍자하는 하회 별신굿놀이가 정월 초에 행해지고 마을을 감싸 흐르는 화천에서는 음력 7월 보름에 강상유화(江上流花)라는 줄불놀이와 시회(詩會)가 벌어 졌으며 음력 정월 대보름에 지내는 하회서낭제 등이 있습니다. 하회탈 9개와 병산탈 2개는 국보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위치

성읍민속마을(국가민속문화재)

성읍민속마을

성읍민속마을은 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 리에 있으며, 국가민속문화재입니다. 제주도 남동쪽 중산간지대에 자리하며 해안에서 9, 해발고도 125m 의 높은 곳에 있습니다. 유형·무형의 여러 문화재가 집단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옛 마을 형태의 민속 경관이 잘 유지되어 있어 민속 마을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습니다. 성읍 리는 원래 제주도가 방위상 3현으로 나뉘어 통치되었을 때(14101914) 정의현의 도읍지였던 마을로서 제주도 동부 중간지대 마을의 특징이 잘 남아 있습니다. 만들어진 시기 1423(세종 5)에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이곳에 정의현 현청(縣廳)이 설치된 뒤 조선말까지 정의현 소재지로서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읍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을의 특징

마을에는 잘 보존되어 있는 성곽과 동헌이었던 일 관헌과 향교에 딸린 명륜당과 대성전이 남아있습니다.

성곽의 크기는 객사 대문을 중심으로 지름이 대략 250보 이며 성곽은 가로 60, 세로 50첩 규모로 세웠습니다. 살림집은 대체로 안거리와 밖거리 두 채로 이루어지며 ㄱ자 또는 S자 모양으로 배치되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조일훈씨의 집은 국가민속문화재, 고평 오 씨의 집은 제69, 이영숙씨의 집은 제70, 한봉일씨의 집은 제71, 고상 은 씨의 집은 제7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마을은 풍수 지리적으로 크게 보아 장군대좌형이고, 작게 보면 행주형이 됩니다. 이곳은 짧은 올래(큰길에서 집 대문에 이르는 막다른 골목)를 가진 집이 많은 도시형 마을입니다. 19C초의 건물과 그 이전의 건물이 남아 있어 육지와는 다른 건축기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건물의 평면은 일()자 겹집이고 안거리와 밖거리 2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마을에는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가옥 5채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령 1000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와 600년이 넘는 아름드리 팽나무(천연기념물), 녹나무 등이 마을 한복판에 있습니다. 지방문화재인 정의향교(제주도 유형문화재), 돌하르방(제주도 민속문화재), 일관헌, 녹나무, 초가 등이 있습니다. 문화재와 고유한 생활 풍습이 잘 보존되어 있어 1984년 마을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또한 민간 신앙이 다양하여 안할망당·산신당·상궁알당 등 무속 신앙처가 남아있고, 동제인 포제를 치를 때 목동 신을 함께 모시는 것이 특이합니다.

걸궁등 특이한 민요와 오메기술이 전승되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도 바지 저고리를 입었나요? (신라 진흥왕 순수비와 삼국통일)

 

사극을 보면 옛날 옷들이 많이 나오지요? 옛날 사람들이 그런 옷을 입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옛날 사람들은 무덤 속에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의 생활 모습, 그리고 입던 옷들을 넣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고구려 고분벽화 같은 무덤 속의 그림이나 옛날의 책들 그리고 무덤 속에서 나오는 옷들을 보고 옛날 사람들이 입던 옷을 알 수 있어요. 옷은 잘 썩기 때문에 무덤 속에서 오랜 세월동안 있지 못해요. 그래서 우리가 주로 볼 수 있는 실물의 옷들은 조선시대의 옷이지요. 이렇게 무덤 속에서 나오는 옷들 중 보존가치가 높은 것은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됩니다. 우리 옷은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입어온 옷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전통성이 담겨있어요.

우리는 옷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지형과 기후의 특징, 각 시대의 생활 모습과 미적 감정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 등을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 옛날 옷들은 국가민속문화재로 매우 중요해요. 그럼 옛날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었는지 살펴볼까요?

 

덕온공주 당의

덕온공주당의(국가민속문화재)

덕온공주당의

조선 순조의 셋째공주인 덕온이 입던 당의에요.

현재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 민속박물관에 있어요. 덕온공주 당의는 자주색 비단의 겉감과 분홍색 명주의 안감으로 되어 있고 자주색 겉고름과 안고름이 달려있어요. 깃을 보세요. 끝이 둥글죠. 이렇게 둥근 깃을 당코깃이라고 해요.

겨드랑이 아래서부터 끝까지 양옆이 트여 있고 도련은 반달모양으로 부드럽게 둥근 선을 이루어 매우 아름다워요. 겉감에는 ()자와 ()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금실을 넣어서 직물을 짜는 것을 말해요.

당의는 텔레비전의 사극을 보면 쉽게 볼 수 있지요? 당의는 궁중에서는 평상복으로, 조선시대 양반여성들은 예복으로 입었어요.

당의에 영향을 준 옷들이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명을 거쳐 전해졌기 때문에 이 옷의 명칭에도 자를 붙여 당의라 부르게 된 것이라 보고 있어요. 당의의 아랫도련선과 기와집의 처마 선을 비교해 보세요. 둘 다 날아갈 듯 한 곡선이 무척 아름답죠. 당의는 그 길이가 무릎 정도인데 겨드랑이 양옆의 트임은 처음에는 직선이었는데 점점 곡선으로 파여지게 되었고 아랫도련도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게 되었답니다.

 

청원 전 박장군 창옷

청원전박장군출토유물(국가민속문화재)

청원전박장군출토유물

이 옷은 현재의 남자 두루마기와 무척 비슷하죠? 이 옷은 청원 전 박장군 묘에서 나온 창옷이에요. 16세기에 입었던 옷인데 무명으로 만들어졌고 옆에는 70cm의 트임이 있어요. 창옷은 바지, 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입었던 겉옷이에요. 창옷은 큰 창옷과 작은 창옷이 있는데 일반 백성이 큰 창옷을 입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대요. 그래서 일반 백성들은 외출할 때나 행사 때 작은 창옷을 입었어요. 큰 창옷은 양옆과 뒷자락이 터져있고 소매가 매우 넓고 흰모시나 옥색모시로 만들어서 홑겹이에요. 작은 창옷은 소매와 통이 좁고 길이가 길어요.

그렇다면 전 박장군 창옷은 큰 창옷일까요? 작은 창옷일까요?

맞아요. 작은 창옷이에요. 작은 창옷은 조선시대에 일반 백성들은 외출복으로 양반들은 관복의 밑에 받쳐 입었던 옷이에요.

 

구례 손씨 저고리

청원구례손씨묘출토유물(국가민속문화재)

청원구례손씨묘출토유물

다음 저고리는 길이도 길고 품도 넓어 무척 편해 보이지요?

이 저고리는 충북 청원 구례 손씨(15761626)의 묘에서 나온 옷으로 현재 충북대 박물관에 있어요. 깃을 보세요. 앞의 당의와는 다른 모양이지요? 이렇게 끝이 네모난 깃을 목판깃이라고 해요. 이 옷은 남색 명주에 솜을 넣었어요. 소매 끝에는 흰색 명주로 한삼이 대어져 있고 흰색으로 옷고름을 달았어요. 지금의 한복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저고리 길이도 더욱 길고 소매도 직선이네요. 옷고름도 지금과는 달리 무척 짧고 작아요.

어때요? 우리 옛날 옷들을 보니 지금과는 다른 점들이 많이 있지요? 왜 지금과는 다른 모습인지, 우리 옷은 어떤 특징이 있는지 간단히 살펴보도록 해요.

 

우리 옷의 기본은 바지·저고리

고구려 고분 벽화를 보면 바지·저고리를 입은 사람을 쉽게 볼 수 있어요. 여자도 겉옷이나 치마 밑에 바지를 입고 있어요. 고구려·백제·신라의 옷은 거의 같았다고 하니 우리는 상고시대부터 바지·저고리를 기본으로 입었다고 볼 수 있죠. 바지·저고리는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 한복의 원형이 되었고, 여자 바지는 치마 속에 입는 속옷으로 발전하였어요. 임금님과 양반들도 중국식 왕복이나 관복 밑에 평상복인 바지·저고리를 입었어요.

 

그런데 왜 우리는 바지, 저고리를 입게 되었을까요?

따뜻한 아열대나 더운 열대지역에서는 어떤 옷을 입었을까요? 이집트 피라미드벽화에 나오는 옷처럼 허리에만 둘러 입는 옷을 입었어요. 아프리카나 인도, 지중해 연안에서는 하나의 긴 천을 자르거나 바느질하지 않고 허리를 감아 어깨 위에 걸치거나 머리를 감싸서 입는 옷을 입었고요. 아메리카지역에서는 짐승의 가죽이나 옷감의 중앙에 머리가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고 그 구멍으로 머리를 넣어 어깨에 걸쳐 입는 옷을 입었어요.

세계 각 지역의 옷은 왜 이렇게 다르게 발달한 걸까요? 옷은 그 나라의 기후·풍토와 같은 자연조건과 종교·예술·정치·경제·사상·철학 같은 사회조건의 영향을 받아 발달하고 변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나라와 같이 여름에는 매우 덥고·비가 많이 오며, 겨울에는 매우 춥고 비가 적게 오는 지역에서는 여름에 더울 때는 쉽게 앞을 열어 놓을 수 있고, 겨울에는 온 몸을 감싸서 추위로부터 체온을 유지하는 옷으로 발달한 거지요. 우리의 바지·저고리는 이러한 자연조건 속에서 생겨난 옷이에요.

 

우리 옷은 왜 품이 넉넉할까요?

남자의 바지나 여자의 고쟁이(여자의 속옷의 한 가지. 가랑이 통은 넓음)는 별나게 품이 넓어요.

우리 옷은 왜 이렇게 품이 넉넉할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어요. 먼저, 우리 옷의 풍성함은 몸이 옷의 구속을 받지 않아 자유자재로 움직이기에 무척 편리하며 체격의 결점을 어느 정도 감추어 주기 때문에 좋아요. 또한 우리 특유의 집구조인 온돌하고도 관련이 있어요. 우리는 온돌생활로 서양과는 달리 바닥에 앉지요. 따라서 방바닥에 여유 있게 앉으려면 옷폭이 넓어야 해요. 이렇게 폭이 넓으면 옷과 피부사이에 공기층이 형성되어 보온효과도 높아진데요. 또 한 가지 이유는 물자가 풍부하지 못해서 아이가 클 때마다 새 옷을 지어 입힐 수가 없었으므로 한 번 옷을 지어 입을 때 넉넉히 지어 오랫동안 입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옷을 물려 입는 전통이 있어서, 아버지의 옷을 형님이, 그 옷을 다시 둘째·셋째가 물려 입기 위해서는 옷이 넉넉해야겠지요. 그런데 이런 옷물림은 반드시 가난 때문은 아니었답니다. 가족공동체의 동질성을 강조하기 위한 조상들의 슬기라고 보는 것이 옳겠지요. 뿐만 아니라, 옛날에는 옷을 세탁할 때는 옷을 다시 뜯어서 세탁하였습니다. 세탁한 후에는 다시 꿰매서 입었던 것이죠. 그러므로 꿰맬 수 있는 시접의 여유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옷의 품이 넉넉한 것이었요.

 

지금의 한복과 옛날의 한복은 같은 모양이었을까요?

신윤복의 미인도(조선시대의 의복)

신윤복의 미인도

무용총이나 쌍용총의 벽화를 보세요.

저고리의 길이가 엉덩이를 덮을 정도로 길지요? 그래서 허리에 끈을 매었요.

저고리는 누구나 입었던 옷으로 처음에는 남자·여자 모두 길이가 길고 허리에 끈을 매었어요. 그런데 언제부터 저고리가 짧아지고 고름을 매게 되었을까요?

고려 말에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기 시작했어요. 저고리가 허리위로 올라오니 허리띠가 필요 없어지고 대신 앞에 매듭단추나 작고 실용적인 고름을 달기 시작한 거지요.

남자저고리는 길이가 허리선에 닿고 옷고름을 달았고 별다른 장식이 없어요.

그 이후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어요.

그러나 여자 저고리는 조선시대에 와서 무척 많은 변화가 생겼어요.

처음에는 등길이가 남자처럼 허리 밑까지 왔다가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저고리 길이가 점점 짧아졌어요. 심한 경우는 남자 저고리 길이의 3분의 1정도밖에 안되는 것도 있었어요. 그러다 1930년대쯤에는 오늘날의 저고리 길이와 비슷해졌어요.

이러한 저고리 길이의 변화는 오늘날 나타나는 유행의 반복과 비슷하지요?

이러한 변화는 그 시대의 사회조건의 변화와 여성들의 미의식이 변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모습이지요.

 

우리 옛날 사람들은 자기 옷의 색깔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을까요?

사람에게는 상하가 있으며, 지위에는 존비가 있고, 이름도 같지 않으며 의복 또한 다르다. 풍속이 점점 천박해져 백성들은 다투어 사치를 좇고, 다만 이방의 것을 진기하다 하여 숭상하고 도리어 토산품을 속되고 천하다 하여 싫어하니, 분수를 지나쳐 예의를 거스르고 풍속이 쇠락해가고 있다.

감히 구장에 따라 써 밝힐 것을 명하노니, 만약 고의로 이를 범하면 상형이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신라 흥덕왕 9년 복식금제령의 앞부분이에요. 우리는 지금 입고 싶은 옷의 종류와 색깔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그럴 수가 없었어요. 삼국시대부터 복식금제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복식금제라는 것은 신분에 따라 옷감의 종류·색깔, 옷에 쓰는 금··주옥들을 제한했던 제도에요.

위의 글에는 사치를 금하기 위해서 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은 지배층에서 자신들의 신분과 지위를 확보하고, 신분의 높고 낮음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이 더 컸어요.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황색·백색·홍색·자색·회색·옥색·녹색들을 입지 못하게 했어요. 황색은 중국 황제의 색이므로, 백색은 서방의 색이며 또한 상복과 다른 것이 없어 망국의 징조가 있는 색이고, 홍색은 중국 천자의 색인 황색과 가까워서, 자색은 우리나라 임금의 색이어서, 회색·옥색도 길조가 못되고 망국의 징조가 있는 색이라고 금하였어요. 녹색은 궁궐에서 즐겨 입는 옷인데 민간에서도 입어 상하의 구별이 없다고 입지 못하게 했다나요.

지금 우리는 너무 행복하죠? 입고 싶은 색깔의 옷을 마음대로 입을 수 있으니 말이에요. 옛날의 우리 옷은 자연에 무척 가까운 옷이었어요. 옷감도 무명이나 삼베, 모시 등 자연에서 나오는 재료로 만들었고 옷의 염색도 치자나 쪽같은 식물로 했어요.

 

숫자나 동물에는 무슨의미가 있을까? (음양수와 문화유산 속 동물의 상징)

 

음양수

우리 조상들은 음양사상에 따라 음수인 짝수보다는 양수인 홀수를 좋은 수로 많이 썼습니다.

따라서 1, 3, 5, 7, 90, 2, 4, 6, 8보다 즐겨 사용했으며 그 중에서도 설날(11), 삼짇날(33), 단오(55), 칠석(77), 중양절(99)과 같이 양수가 겹치는 날을 더 좋아했는데 이것은 기운이 꽉 찬 날, 생명이 충만한 날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또 죽은 사람 장사날 수가 3일장, 5일장, 7일장인 것은 저 세상에 가기 전 마지막 양의 날이기에 그렇게 하였으며 절을 남자는 2, 여자는 4배하는 것은 죽은 사람은 음의 세계이므로 2번하고 여자는 음이 겹치므로 4번 하는 것입니다. 또 혼례식 때 신부는 절을 두 번하고 신랑은 한 번 하는 것은 신랑은 양, 신부는 음으로 음양의 이치를 맞춘 것이고 음식의 밥상도 3, 5, 7, 9첩으로, 집도 3, 5, 7칸 등으로 백성들이 사는 집은 99칸까지 지었습니다.

 

숫자 3

옛날에 아들 낳기를 바랐던 사람들은 삼불제석도를 많이 그렸습니다. 이 삼불제석은 아기를 점지해주고 병으로부터 지켜주는 신으로 산신, 칠성, 독성 삼신을 그린 그림입니다. 불은 부처를 뜻하며 산신은 아이를 낳는 것을 관장하는 신, 칠성은 아이의 명을 관장하는 신, 독성은 병마를 막아주는 신으로 삼성각에 모십니다.

, 나쁜 일을 막기 위해 사용했던 부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삼재수라고 해서 재수가 없는 때가 있는데 그 나쁜 재수를 막기 위해 세 마리의 매를 그려 문설주에 부쳤습니다. 세 개의 대가리를 가진 매가 먹이를 쪼아 먹는 매서운 눈매를 통해 강력한 힘에 의지하고자 했습니다. 이와 같이 두 번째 특징은 3을 많이 쓰고 좋아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젊은이들에게 물으면 7을 가장 선호합니다. 럭키세븐, 세븐 스타 등 7을 행운수로 생각하나 3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완성, 최고, 최대, 신성, 장기성, 종합성의 의미로 쓰입니다.

 

숫자 4

그 외 4, 5, 9, 10, 12, 100 등을 일상생활에서 많이 썼는데 4는 죽음을 연상하는 사로 불길한 수로 가장 많이 생각했고 다른 의미로 4방위, 4, 4계절, 사해, 사민, 사천왕, 사군자, 문방사우, 사상의학 등으로 '자신'을 중심으로 네 기둥이 있어 중심이 온전해 질 수 있는 수로 생각했습니다.

 

숫자 5

5는 음양오행의 조화로 모든 것이 갖추어진 수로 생각했습니다. 즉 다섯 가지 색으로 청, , , , , 5가지 맛으로 짠맛, 쓴맛, 단맛, 신맛, 매운맛, 5상으로 인의예지신, 5관으로 눈, , , , 피부 등 5음으로 궁, , , , 우 등 5행사상의 원리에 따라 모든 것이 이치에 맞게 갖추어진 완전함을 뜻하는 수입니다.

 

숫자 9

9는 양의 기운이 충만한 수로 사용되었으며, 높다, 깊다, 길다, 많다 등의 의미로 구천, 구중, 구곡간장, 구중궁궐, 구미호, 구사일생, 구룡강, 구룡도, 구룡폭포, 구룡연 등에 쓰였습니다.

 

숫자 10

10은 하나의 굽이를 넘어선 수, 하나의 매듭이 끝난 수로 십년감수,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 십시일반, 십인십색, 십중팔구,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사람 속은 모른다.” 등에 쓰였습니다.

 

숫자 12

12는 굿의 12거리,12신장, 임금 수라상 12, 열 두 하님, 열 두 대문, 열 두 폭 치마 등 12지와 112달을 상징하는 수에서 파생되어 쓰는 수입니다.

 

숫자 100

백은 많음을 뜻합니다. 백 개의 성이라는 뜻의 백성, 여러 학자들을 백가, 모든 벼슬아치들을 백관, 다양하다는 뜻으로 백화점, 백해무익, 백과사전, 백문이불여일견, 백만장자, 백배사죄, 백년손님, 백년가약, 백일해, 백일기도 등이 있습니다.

 

우리 문화재 곳곳에 깃들여져 있는 동물들의 상징에는 어떤게 있을까요?

김홍도의 신생도(목각기러기와 결혼식)

김홍도의 신생도(목각기러기와 결혼식)

새는 날개를 가지고 있어 높고 넓은 창공을 자유롭고 아름답게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옛날의 유물과 고분벽화 등에는 새의 형상을 새긴 문양이나 그림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훌륭한 사람의 탄생과 관련되어 있는 이야기에 새가 직접,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이상한 행동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아주 옛날 사람들은 새가 죽은 영혼을 태우고 공중을 날아다니며 하늘나라의 영혼과 인간의 세계를 내왕하는 동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옛날의 유물과 고분벽화 등에는 새의 형상을 새긴 문양이나 그림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들 벽화에 나타난 그림에서 새와 관련되거나 새의 깃을 꽂은 사람이 상류계급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한 훌륭한 사람의 탄생과 관련되어 있는 이야기에 새가 직접,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이상한 행동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새 중에서 학은 글공부로 벼슬한 문관들의 관복 흉배에 수를 놓았습니다.

높은 벼슬을 한 신하에게는 두 마리의 학을, 낮은 벼슬을 한 신하에게는 한 마리를 붙여 주었는데 국가민속문화재문화재인 심동신이 참판으로 있었을 때 입었던 '운학금환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붉은 색 바탕에 청, , 백 삼색으로 학과 구름을 수놓아 고고한 학자풍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도자기, , , 동경(거울),문갑, , 필통 등 여러 가지 공예품에도 학의 문양을 많이 사용했는데, 대개 학과 구름, 학의 입에 불로초나 나뭇가지, 구름, 꽃 등을 물린 모양을 새겨 장수를 기원하거나 운이 찾아들기를 기원하였습니다. 장생불사한다는 산, , ,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 사슴 등과 함께 십장생으로 기품과 장수를 상징하는 상서로운 동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까치가 서민적이고 친근한 존재라면 학은 품격이 높고 귀한 모습을 나타낸다는 사실 때문에 옛 선비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학을 즐겨 그리고 시로 읊었으며 베개, 주머니, 신하들의 옷, 결혼식이나 제사지낼 때 입는 예복 등에 수를 놓았습니다. 까치는 길조의 상징이었습니다. 아침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고, 까마귀가 울면 사람이 죽거나 불길하다고 하였습니다. 또 사람들과 친근하게 지내는 까치는 좋은 일과 기쁨을 알려주는 것만이 아니라 옳고 그른 것의 분별을 깨우쳐 주는 등 은혜를 알고 이를 갚을 줄 아는 새로 생각하였습니다.

단원 김홍도의 신행도를 보면 기럭아비가 신랑 앞에 목각 기러기 한 쌍을 들고 가고 있습니다. 왜 결혼식에서 기러기를 썼을까요? 옛날 사람들은 기러기를 생각할 때 암놈과 수놈이 서양의 잉꼬처럼 사이가 좋은 새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지극한 새로 혼례식에 기러기를 사용했습니다. 의와 사랑 그리고 정절을 지키라는 뜻에서 신랑이 신부 집에 혼례의 첫 의식으로 기러기 한 쌍을 먼저 바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기러기는 신랑 신부에게는 사랑의 언약으로, 결혼식에 온 사람들에게는 해로의 서약의 뜻으로 쓰였던 새로 홀로된 신세를 '짝 잃은 기러기 같다.',짝사랑하는 사람을 일컬어'외기러기 짝사랑'이라는 속담이 사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외에 기러기는 가을에 오고 봄에 돌아가는 철새이기에 그리움, 이별, 고독함을 일으키는 새로 우리나라의 시조나 가곡 등에서 많이 나옵니다.

이처럼 옛날사람들은 새에 상징과 의미를 부여했으므로 그 의미를 생각해보면 쉽게 옛날 사람들의 사상과 정서를 느낄 수 있습니다. 호랑이는 옛날이야기, 그림과 조각 등에 많이 등장하는 동물입니다. 호랑이가 맹수임에도 불구하고 의롭고 우호적이며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호랑이는 무섭고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동물로 우리 조상들은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산신으로 모셔 제사를 지내는 등 호랑이가 노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 방편을 썼습니다. 이처럼 신령한 존재로 생각한 것은 호랑이가 갖고 있는 강력한 힘을 의지하고 싶은 욕구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호랑이의 역할을 의로운 존재로 설정하고 용맹성과 강력한 힘을 이용해 인간을 괴롭히는 각종 잡귀와 나쁜 것들을 물리쳐 주는 동물로 상징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호랑이를 인간의 편으로 설정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호랑이에게 담뱃대를 물리고, 곶감 이야기에 끌어들여 황급히 도망가는 어수룩한 호랑이를 탄생시킴으로써 우리와 친근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생각이 변화해 오면서 호랑이와 관련된 우리 문화는 다양해졌습니다. 호랑이는 수호신으로서, 산신의 사자로, 12방위 중의 한 방위를 지키는 지신으로 쥐, , 토끼, , , , , 원숭이, , , 돼지 등의 동물과 함께 띠로서 설정되어졌던 것입니다.

또 우주를 다스리고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는 동물로 동쪽에는 푸른 용, 서쪽에는 흰 호랑이, 남쪽에는 검은 거북, 북쪽에는 붉은 봉황이 있다고 생각하여 좌청룡, 우백호, 전주작, 후현무라 하여 묘 자리에서 동쪽을 지키는 신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호랑이는 각종 산신도, 까치 호랑이, 담뱃대를 문 호랑이 등의 민화와 호랑이와 곶감과 같은 이야기, 노래, 생활용품에서 친근하면서도 소박한 익살, 건강한 풍자, 친밀한 솔직함이 살아 숨 쉬는 동물입니다.

용은 상상의 동물입니다. 봉황, 기린, 해태, 백호, 주작, 현무 등 인간이 만들어 낸 상상의 동물들 중 용은 그 권위와 조화로운 능력에 있어서 단연 압도적입니다. 용은 물에서 나며 색을 마음대로 변화시키고, 번데기처럼 작아지기도 하고 천지를 덮을 만큼 커질 수도 있으며, 짧거나 길어질 수 있고, 높이 오르고자 하면 구름위로 치솟을 수 있으며, 밑으로 내려가고자 하면 깊은 샘 속까지 잠길 수 있고, 어둡게나 밝게도 할 수 있는 동물입니다. 옛 사람들은 용에게 낙타의 머리, 토끼의 눈, 소의 귀, 사슴의 뿔, 뱀의 목덜미, 조개의 배, 잉어의 비늘 81, 호랑이의 발, 매의 발톱, 긴 수염, 구슬 등 9개의 동물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것으로 만들었고 최고의 권위를 지닌 동물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날짐승, 들짐승, 물에 사는 동물의 좋은 점을 다 가지고 있는 용은 힘과 권위를 상징하여 임금의 얼굴을 용안, 임금의 덕을 용덕, 그 지위를 용위, 임금이 앉은자리를 용상, 용좌, 임금이 입은 의복을 용의, 용포, 임금이 타는 수레를 용가, 용거, 임금이 흘리는 눈물을 용루, 임금이 즉위하는 것을 용비라 하였습니다.

또한 용은 나라를 지키고 왕권을 수호하는 신으로 여겨져 신라시대 문무왕은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경주 동쪽 감포 앞바다에 묻혔습니다. 또한 용을 불교의 법을 지키는 호법신으로 생각하여 대웅전이나 극락전 등에 용의 머리를 새겨 두었으며, 나무로 지은 집의 지붕 위에 불기운을 누르기 위해 용을 장식한 것을 비롯하여 절의 범종, 돌비석, 향로, 도자기 등 수 많은 곳에 용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용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어민들에게 무사함을 기원하는 대상인 동시에 풍어를 비는 대상이며, 물에 관한 모든 일을 주관하는 용신신앙으로 마을식수의 고갈을 예방하는 샘제, 용왕제의 대상이며, 기우제의 대상으로 ''자가 들어간 연못이나 강, 바다, , 바위 등에서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또한 성인이나 군주와 같은 큰 인물이 탄생, 국가의 좋은 일과 나쁜 일 등에 이용되었습니다. 이런 용은 우리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동물로 수많은 전설, 신앙, 문학과 미술, 땅의 이름에 이르기까지 우리 생활 곳곳에 밀접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나라를 지키고 천지조화를 부리는 능력자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기린흉배에는 전설로 내려오는 상서로운 짐승인 기린이 수놓아져 있는데 이 짐승은 산 풀을 밟지 않는다는 어진 짐승으로 성스럽고 위대한 왕의 치세 때에만 나타난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입니다. 기린의 수컷은 기, 암컷은 린이라고 합니다. 이 짐승의 출현은 매우 드물며 흔히 기린이 출현하면 현인이나 뛰어난 성군이 곧 태어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또 청자기린유개향로에 꿇어앉은 기린을 모양으로 향로 바탕을 3발로 떠받치고, 뚜껑 한복판에는 꿇어앉아 뒤를 돌아보는 기린 형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기린의 모습은 뿔이 없는 작은 사슴처럼 사슴의 목에, 소의 꼬리에, 이리의 이마에, 말의 굽을 가지고 머리에는 화살과 같은 살로 된 뿔을 하나 가진 상상의 동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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