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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동해건설산업 2025. 10. 12. 15:13

지식[선사유적/고분/성지/성곽]

움집에서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암사동선사유적지)

 

우리는 글자가 없어 전해지는 기록도 없고, 찍어노은 사진도 없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건 바로 지금 남아있는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 알 수 있어요. 우리는 여러 유적에서 나온 유물들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살펴볼 수 있으며, 인간 사회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도 알 수 있어요.

 

서울 암사동 유적지

서울 암사동 유적(사적)

서울 암사동 유적

암사동 유적은 한강에서 약 700m 떨어진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발견당시 많은 유물과 함께 마을을 이루던 집터들이 발굴되었습니다.

30여 채의 집터에서 빗살무늬토기, 탄화된 도토리와 호두, 강자갈로 만든 도끼·화살촉·그물추·괭이·돌낫·보습·갈돌·갈판 등의 석기들이 발견되었고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어 사적으로 지정되었어요.

 

신석기시대 집터는 왜 강이나 바다 가까이 있을까요?

사냥, 고기잡이, 식물채집 등의 방법으로 먹을것을 구했던 신석기 시대에 고기잡이를 하려면 당연히 강이나 바다 가까이 살아야겠지요.어떤 학자는 신석기시대에는 농사를 짓기 시작한 최 농경사회여서 곡물과 함께 열량이 높은 도토리도 주식으로 먹고 살았다고 해요. 그런데 도토리는 매우 떫어서 물에 우려내야지만 먹을 수 있었지요. 당시 석기로서는 우물을 팔 수 없었기 때문에 물 가까이 살았던 거예요.

 

움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신석기시대의 움집

신석기시대의 움집

암사동에서 나온 집터는 평면모양이 원형에 가까운 네모꼴이 대부분이에요.

모래흙을 70~100정도 깊이 파고 움을 만든 다음, 움푹 들어간 집터 안에는 돌을 돌려 만든 화덕이 하나씩 있었고 나들이 문은 주로 햇볕이 잘 드는 남쪽에 있었어요. 움집은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먼저 움의 안쪽 둘레에 기둥을 4~7개 세우고 도리를 얹었어요. 그 위에 서까래를 비스듬히 기대어 땅에 닿도록 하고 강가에 많이 자라는 억새풀을 엮어 지붕을 덮어 움집을 만들었어요. 이렇게 만들어진 움집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어요. 지금의 집 모습과 많이 다르죠. 집크기는 5평에서 10평 정도 되고 45명의 한 가족이 살기에 알맞은 크기이지요.

 

백제의 흔적을 찾아서 (풍납토성, 몽촌토성, 공산성,부소산성)

 

여러분은 백제의 수도가 여러 번 바뀌었었다는 사실을 아세요? 요즘에는 수도를 바꾸는 일이 거의 없지만, 옛날에는 국방상의 이유나 정치적인 문제 등으로 수도를 옮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수도였던 자리마다 여러 성곽이나 유물들이 발견되는데, 한성시대(수도 - 지금의 서울)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웅진시대(수도 - 지금의 공주)의 공주 공산성, 사비시대(수도 - 지금의 부여)의 부소산성이 바로 그런 곳이지요. 그러면 지금부터 백제의 흔적을 담은 여러 성들에 대해 살펴봅시다.

 

서울 풍납동 토성

서울 풍납동 토성은 사적으로, 한강 유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토성입니다. 서울 몽촌토성과 함께 한강변에 남아 있는 백제 초기의 유적으로 모촌토성과 불과 70m 떨어져있고, 석촌동 백제고분과도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원래 풍납토성은 둘레가 4km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는데 1925년에 있었던 큰 홍수로 일부가 파괴되어 현재는 약 2.7km가 남아 있습니다. 1997년 이후 동쪽 성벽을 발굴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성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사람들이 살았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출토되어 백제 보다 앞서는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서울 몽촌토성

서울 몽촌토성

서울 몽촌토성은 한강지류에 해당하고 표고(바다의 면이나 어떤 지점을 정하여 수직으로 잰 일정한 지대의 높이) 44.8m의 야산을 중심으로 자연 구릉을 이용하여 그 위에 진흙을 쌓아 성벽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북벽의 단을 이룬 곳에는 나무 울타리를 세웠고, 성의 바깥쪽으로 해자(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를 만들었습니다. 이 성은 북쪽 방향으로부터 저이 쳐들어오는 거을 방어하는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성 내부에서 집터 · 독무덥 · 저장구덩이 등과 함께 백제토기 · 무기 낚싯바늘 · 돌절구 등 각종 유물이 출토되어 백제시대 연구에 귀한 자료가 되기도 한답니다.

 

공주 공산성

공주 공산성

공주 공산성은 사적으로 금강 주변의 낮은 산에 계곡을 둘러싼 포곡식 산성입니다. 이 산성은 원래 토성이었던 것을 임진왜란 직후에 식성으로 개축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동, 서쪽에 보조 산성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곳은 백제의 웅진시대는 물론이고, 조선시대까지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남아 있었습니다. 백제가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직후에 의자왕이 잠시 머물기도 했으며 나당연합군에 대항하는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합니다. 822년에 일어났던 김헌차의 난이 이곳에서 평정되었고, 1623녀에는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난했던 역사적 일화가 얽혀있기도 합니다. 정말 긴 세월동안에 많은 사연을 간직한 산성이구요.

 

백마강의 슬픈 전설, 부여 부소산성

부여 부소산성

부여 부소산성

어린이 여러분, 백제시대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과 삼천궁녀 이야기를 아시나요? 사비(부여)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서 공격당하고, 멸망할 위기까지 갔을 때의 일입니다. 삼천이나 되던 궁녀들은 높은 바위에서 백마강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삼천궁녀가 떨어진, 슬픈 전설이 깃든 그곳이 바로 낙화암(원래는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라고 해서 타사암이라 불렸으나 삼천궁녀의 전설로 이 같은 이름을 얻었습니다)입니다. 이 낙화암이 있는 바로 그 성이 사비를 보호하던 부소산성입니다.

 

백제의 흔적을 찾아서 (석촌동고분, 방이동백제고분)

 

예로부터 무덤의 형태와 장사를 지내는 의식 등은 부정 탄다고 생각하여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무덤마다 독특한 양식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양식을 연구하면 문헌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는 먼 옛날에 일어났던 민족의 이동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서울 석촌동 고분군(석촌동 백제 초기적석총)

서울 석촌동 고분군

서울 석촌동 고분군

석촌동 고분은 백제가 한성(지금의 서울)에 도읍을 정한 이후 공주로 도읍을 옮기는 475년까지 계속되는 백제 초기의 고분입니다. 무덤의 형태를 살펴보면 바닥에 진흙을 다지고 자갈을 깐 다음, 그 위에 큰 판석이나 자른 돌을 한 겹 깔고, 작은 여러 개의 돌을 사방 계단모양으로 쌓아올린 그 생김새가 마치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비슷해 보입니다. 이 같은 무덤을 돌뮈 무덤이라고 하는데, 이는 고구려의 무덤의 양식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백제는 고구려에서 내려온 사람에 의해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백제를 세운 온조가 고구려에서 내려온 사람이란 것을 알려줍니다.

현재 석촌동에 있는 고분들은 몇 개를 빼놓고는 거의가 원형과 비슷하게 복원되었습니다. 그러나 몇 개의 고분은 너무 많이 훼손되서어서 원래 모습대로 회복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어린이 여러분, 이렇게 한번 파괴된 유적을 회복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회복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는 거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 주변에 있는 작은 문화유산이라도 파괴되지 않도록 조심히 잘 다루고, 아끼며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누가 언제 만들었을까요?

석촌동 고분은 백제가 한성(지금의 서울)에 도읍을 정한 이후 공주로 도읍을 옮기는 475년까지 계속되는 백제 초기의 고분입니다. 무덤의 형태를 살펴보면 바닥에 진흙을 다지고 자갈을 깐 다음, 그 위에 큰 판석이나 자른 돌을 한 겹 깔고, 작은 여러 개의 돌을 사방 계단모양으로 쌓아올린 그 생김새가 마치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비슷해 보입니다. 이 같은 무덤을 돌뮈 무덤이라고 하는데, 이는 고구려의 무덤의 양식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백제는 고구려에서 내려온 사람에 의해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백제를 세운 온조가 고구려에서 내려온 사람이란 것을 알려줍니다.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석촌동일대에 있는 고분은 그 생김이 마치 이집트의 피라미드 같습니다. 바닥에 진흙을 다지고 자갈돌을 깐 다음, 그 위에 큰 판석이나 자른 돌을 한 겹 깐 뒤에 작은 돌들을 겹겹이 쌓아서 계단 모양을 만든 것입니다.

바로 이 형식이 고구려 무덤의 형식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현재 석촌동에 있는 고분들은 몇 개를 빼놓고는 거의가 원형과 비슷하게 복원되었습니다. 그러나 몇 개의 고분은 너무 많이 훼손되어서 원래 모습대로 회복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어린이 여러분, 이렇게 한번 파괴된 유적을 회복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회복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지요. 우리 주변에 있는 작은 문화유산이라도 파괴되지 않도록 조심히 잘 다루고, 아끼며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외세침략에 맞선 격전지 (정족산성, 문수산성)

 

외세침략에 맞선 격전지(정족산성, 삼랑성)

여러분은 전국체육대회의 성화에 불을 붙이는 곳이 어딘지 알고 있나요? 바로 강화도의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입니다. 고려사에 보면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 드리던 제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강화도는 우리 민족의 시조이신 단군할아버지와도 인연이 있는 곳입니다. 강화도에는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게 했다는 산성이 하나 있는데, 그곳이 바로 정족산성입니다. 이 정족산성은 이런 유래 때문에 삼랑성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언제 쌓았을까요?

이 성을 언제 쌓았는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이 성에 관련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 성의 쌓은 기법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성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강화도는 고구려에 속하기 전인 400여 년간 백제의 중요한 국경지방이었고, 한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백제 전기에 중요한 요새 역할을 했기 때문에 백제시대의 성일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고려 고종 임금 때 중랑장 벼슬에 있던 백승현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삼랑성 안에다가 임시로 절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 와서는 이곳에 정족산사고를 마련하여 실록을 보관케 했고 선원보각이라는 것을 지어서 그곳에는 왕실의 족보를 보관했답니다. 이들 실록과 족보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아는 데 무척이나 중요한 자료들이며, 오늘날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1866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했던 병인양요가 일어났을 때, 그들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운 양헌수 장군을 기리는 비 또한 성안에 있습니다.

 

성안에는 어떤 문화유적이 있을까요?

강화 전등사 대웅전

강화 전등사 대웅전

정족산 삼랑성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절중에서 삼국시대에 지어진 전등사가 있습니다. 이 절은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째 되던 해에 아도화상이 진종사를 연 데서 비롯했다고 하는군요.

이곳 전등사라는 이름은 고려 충렬왕의 원비인 정화공주 왕 씨가 불전에 옥으로 만들어진 등 잔을 올린 뒤부터 이렇게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등사는 후에 조선 숙종 임금 때부터 사고를 지키는 사찰로 조선 왕실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1866년 병인양요를 겪고 난 이후 사고가 1909년에 서울로 옮겨짐으로써 그 역할은 끝나게 됩니다.

전등사에 전해지는 유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보물로 지정된 전등사 철종 입니다. 이 종은 우리나라 종과는 형ㄴ태가 전혀 다른 중구에서 만들어진 중국 종으로 무척 특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포 문수산성

1866년 병인년에는 서양세력이 쳐들어온 병인양요가 있었습니다. 병인양요 때 적군을 통쾌하게 무찌른 성에 대해 한번 알아봅시다.

언제, 왜 만들어졌을까요? 그리고 어떤 활약을 했을까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김포 문수산성은 사적으로 경기도 김포시 월곡면 또내리에 있는 조선시대 석성입니다.

이 산성을 갑곶진과 함께 강화도의 입구를 지키는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이 성이 세워진 것은 1694(숙종 20)입니다. 말끔히 다듬은 돌들로 정교하게 성을 쌓았고, 그 위에는 성가퀴(성 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몸을 숨겨서 쳐들어온 적군을 공격하는 곳입니다)가 둘러져 있습니다. 당시에 성문은 취예루, 공해루 등 3개의 문루 특히 이 가운데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었습니다. 바로 강화도에서 육지로 나올 수 있는 길목이었던 것이지요.(궁으로 들어가는 문을 말합니다. 성벽의 문 위에 다락방처럼 지은 것을 가리키지요)와 암문이 있었습니다.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문수산성은 조선시대에 강화도를 지키는 무척 중요한 성이라고 했지요. 특히나 이곳은 문수산성 싸움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답니다. 이것은 1866년에 있었던 병인양요 때에 프랑스군과 조선군 사이에 벌어진 싸움입니다. 당시에 어린 임금이었던 고종을 대신해 정치를 하던 대원군은 외국 세력이 조선에 들어오는 것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1866(고종3) 서양 종교였던 천주교 탄압령을 내렸고, 불과 몇 개월 동안에 9명의 프랑스인 신부와 남종삼, 정의배 등 8,000여명의 천주교도들이 사형을 당합니다. 이 이을 계기로 조선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하게 된 것이지요. 이 전쟁에서 조선이 주로 수비를 하던 곳은 문수산성과 정족산성 일대입니다. 그리고 정족산성에서 양헌수 부대의 활약으로 프랑스군을 격퇴 시켰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프랑스 제국의 위신은 여지없이 떨어졌고, 대원군은 쇄국양이 정책을 더욱 고집하면서 천주교 탄압을 더 심하게 했습니다. 한번 병인양요 때 그들이 탈취해 간 많은 서적과 자료는 후일 유럽학자들이 한국과 동양을 연구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는군요. 그러나 프랑스군과 치열한 격전을 치르면서 문수산성은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현재 그 자리는 마을이 되었고, 문수산의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곽만 남아 있습니다. 조선을 지켜준 문수산성의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깝네요. 이 산성도 언젠가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 복원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고려의 서울이 된 강화성 (강화산성)

 

옛날부터 한강은 여러 모로 굉장히 중요한 강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가운데 쪽에 위치해 있고, 농사가 잘 지어지는 땅이었기 때문에 여러 왕조들이 무척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지요. 이 한강의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섬을 아시나요? 바로 그곳이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인 강화도입니다. 이곳 강화도는 무엇보다도 한강, 예성강, 임진강의 3대 하천의 들어가는 길목에 있으면서 천연의 요새를 이루는 곳으로 선사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의 유물, 유적들이 많은 고이기도 하지요. 강화도는 고려시대에 수도이기도 했습니다. 어째서 섬이 한 나라의 수도가 되었던 것일까요?

 

언제, 왜 만들었을까요?

강화산성

강화산성

13세기가 되면서 동아시아에는 큰 정치적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징기즈칸 장군에 의해 통일된 몽고는 그 힘이 막강해져서 금을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더욱 강해진 몽고는 어느새 고려 땅까지 침입해 왔습니다. 몽고사신 저고여가 고려 국경 부근에서 몽고군대는 고려에 보낸 사신 저고여가 국경 부근에서 여진족에게 죽임을 당하자 이를 구실로 삼아 쳐들어 온 것입니다.

당시 몽고는 전 세계를 정복할 듯한 기세였기 때문에 고려는 몇 번의 저항 끝에 화해를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화해한 후 잠시 물러갔던 몽고는 고려에게 점점 지나치게 많은 물건을 바치라고 요구하고,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일에까지 간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나라의 권력을 쥐고 있던 최우는 육지에서 주로 생활하는 몽고군이 바다에서는 힘이 약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물 건너에 있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고을 보호하기 위해 강화성을 쌓은 것이지요. 그렇게 화해한 후 잠시 물러갔던 몽고는 고려에게 점점 지나치게 많은 물건을 바치라고 요구하고,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일에까지 간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나라의 권력을 쥐고 있던 최우는 육지에서 주로 생활하는 몽고군이 바다에서는 힘이 약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물 건너에 있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곳을 보호하기 위해 강화성을 쌓은 것이지요.

 

관련된 유적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고려가 몽고에 대항해서 싸우기 위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지만, 강화도에는 아직 수도가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 건물이나 시설들이 없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나라에서 인정하고 권하던 종교였기 때문에 도읍에는 절이 꼭 필요했지요. 강화성을 쌓고, 고려인들은 도읍에 걸맞은 굉장히 큰 절을 짓는데 그곳이 바로 선원사입니다. 지금은 황량한 터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에는 금으로 만든 불상이 500기가 모셔져 있고, 1246년에는 고종 임금이 행차한 기록이 남아있을정도로 대단한 절이었다는군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진 고도 바로 이곳 선원사입니다. 이외에도 조선시대에 이곳에서 강제로 통상을 요구하는 프랑스 함대를 막아내기도 했지요. 그래서 이곳에는 그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세자와 수원화성 (수원화성)

 

언제, 왜 만들었을까요?

수원 화성의 팔달문

수원 화성의 팔달문

조선의 임금 정조는 한양의 남쪽에서 100리나 떨어진 곳인 수원에 성을 쌓아 새 도시를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왜 한양과 100리나 멀리 떨어진 수원에 큰 성을 쌓은 것일까요? 정조의 할아버지(영조)는 신하들의 꾐에 속아서 정조의 아버니(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굶겨 죽입니다. 정조는 이처럼 비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 세자를 위로하기 위해서 화성을 쌓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당시 화성을 쌓는 일을 수원에 한양에 비길 만한 도시를 건설하는 큰 일이었으며, 국왕 주도하에 관료·백성까지 모든 계층사람들이 참여하여, 조선의 국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조선 후기 최대의 건설 사업이었던 화성성역에서는 성곽을 쌓는 일과 함께 국왕이 사는 행궁이 팔달산 아래 웅장하게 세워지고, 도로 · 수문 · 다리 등 여러 가지 도시기반시설이 마련되었습니다. 더욱이 실용성과 자연과의 조화를 고려해서 아름답고도 기능적인 구조가 되도록 하였지요. 그리하여 성 주변의 인공적인 외관은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곳곳에 수원팔경, 수원춘팔경, 추팔경 등 수원의 명승지를 만들었습니다. 경기도 도청 소재지, 농업 연구중심도시, 교통·상업중심지로서의 수원의 위상은 200년 전 신도시를 세우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정조 임금은 당시 대학자들이 공부하던 전통적인 지식에 최신의 외국지식을 보태어 세심하게 성의 모습을 구성했습니다. 그는 적의 침입으로부터 성안을 잘 수비하기 위해 치성과 옹성(큰 성문 밖의 작은 성) 같은 성곽 구조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동안 여러 성을 쌓아본 경험을 이용합니다. 또한 정약용으로 하여금 거중기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성을 쌓알 때에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지 않고, 전부 임금을 주어 일꾼들이 일을 더 열심히 하더록 하였습니다. 벽돌과 석돌은 모두 표준화하여 대량생산하였고 합니다. 수원화성이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에, 놀랍게도 단지 2년여만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당시의 뛰어날 과학기술과 경제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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