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식[과학기기분야]
365일,12달,28수 (경주 첨성대)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면 꼭 들리는 곳이 첨성대입니다. 첨성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별을 관측하던 천문대, 달력을 만들던 기구,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 상징을 담은 건축물 등등입니다. 그 가운데 별을 관측하던 천문대라고 보는 사람이 제일 많답니다. 첨성대를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돌도 세어보고, 나침반도 가져와서 방위도 확인하고 신라 사람들이 보았던 청룡·백호·주작·현무 같은 우리 별자리를 안다면 첨성대를 통해서 우리 문화의 무한한 상상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주 첨성대
경주 첨성대(국보 제31호)

경주 첨성대
첨성대는 별을 보기 위해 돌로 높게 쌓은 천문대입니다. 첨성대는 왕궁 가까이에 만들었는데 주변에 건물들이 많았으니 높게 대를 쌓아야 별을 관측하기 편하겠지요. 더구나 이곳에 신성하고 상징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면 그 사회적 의미가 달랐을 거예요. 첨성대는 신라 27대 선덕여왕(632∼647년)때 만들었으며 동양에서 현재 남아있는 천문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국보입니다. 첨성대는 높이가 약 9.1m로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보면 밑에서 위로 좁아지는 병모양이지요. 어때요? 그 모습이 부드럽고 우아하지요? 각 부분을 좀 더 자세히 보면 기단, 몸체, 정자석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어요. 맨 아래 사각형 모양으로 2단 쌓은 것이 기단이고, 높이는 78cm이에요. 이 기단 위에 원주 모양으로 돌을 27단 쌓았어요. 몸체의 가장 밑단 지름은 약 4.93m이고, 가장 윗단은 약 2.85m이지요. 첨성대는 옆의 곡선이 매우 우아합니다. 이렇게 쌓기 위해서 27단의 원 둘레의 길이를 각 단마다 정확하게 측정하고 설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때요? 신라인의 수학수준이 놀랍지 않으세요? 몸체 위의 정(井)자 모양 돌이 보이죠? 왜 둥글게 된 몸체 위를 정자 모양으로 마무리했을까요? 거기엔 이유가 있답니다. 정자석은 그 방향이 동서남북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어 방위를 알 수 있게 한 거죠. 이 정자석 안은 2.2m×2.2m×0.64m의 공간을 이루고 바닥에는 목판을 깔았어요. 이 목판 위에 눕거나 서서 관측을 하거나 천문관측기구를 놓고 관측을 했겠지요. 어떻게 정자석까지 올라갔을까요? 첨성대를 아무리 둘러봐도 창문 하나밖에 안보이네요. 이 창문이 문이에요. 이 문을 통해 사다리를 걸어놓고 올라갔어요. 그 안으로 들어가 13단부터는 다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거나 안으로 튀어나온 돌을 밟고 정자석 위까지 올라갔다고 합시다.
첨성대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첨성대의 생김새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요. 몸체를 쌓은 돌을 하나하나 세어 볼까요? 모두 360여 개입니다. 이번엔 둥글게 쌓은 석단을 세어 볼까요? 모두 27단인데 위의 정자석까지 하면 28단이에요. 또 석단 가운데 문 아래까지 세어 보세요. 모두 12단이죠? 그럼 이 숫자들은 우연일까요? 이것은 1년 365일, 12달과 동양의 기본 별자리 28수와 그 숫자가 같아요. 그러니까 첨성대의 구조는 1년 12달과 365일과 별자리 28수 등 우주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죠. 그럼 첨성대는 단순히 모양만 상징적으로 표현한 걸까요? 실제 첨성대가 커다란 규표(해그림자를 재서 절기를 측정하게 하는 기구)로서 달력을 만들고 방위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기능을 했어요. 첨성대의 문의 위치를 눈여겨보세요. 들어가는 문이면 아래에 나있는 것이 당연한데, 왜 불편을 무릅쓰고 가운데에 나 있을까요? 이 문은 정남향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춘분 추분이 되면 남중 때 햇빛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비친다고 해요. 또 하지와 동지에는 아랫부분에서 모두 사라지게 되어 춘·추분점과 동지·하지점을 잴 수 있어요. 이렇게 동지와 하지점, 춘·추분점을 알아내어 1년 24절기를 알아낼 수 있었어요. 꼭대기의 정자석은 동서남북의 방위를 정확히 가리켜요. 지금은 나침반이 있어 언제든지 방위를 정할 수 있지만 그 때는 표준이 되는 곳이 있어야 했어요. 무엇보다 정자석은 그 위에 혼천의를 놓고 쉽게 방위를 맞춰 관측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럼 처음 방위는 어떻게 정했을까요? 1년 365일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했을까요? 이것은 ‘규표’로 잴 수 있습니다. 규표라는 것은 긴 막대기와 그 그림자를 잴 수 있는 자를 말합니다. 이것은 6학년 과학과목의 태양 고도 실험에서도 나오는데 그것이 규표의 원리입니다. 하루 동안의 그림자 길이를 재서 가장 짧을 때가 태양이 남중하는 때입니다. 그 쪽 방향이 바로 정남향이 되죠. 1년 동안 그림자를 재서 1년 중 남중할 때 그림자가 가장 짧을 때를 동지, 가장 길 때를 하지로 하여 1년이 24절기와 365일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어요. 이것은 직접 실험을 해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어요. 어때요? 첨성대가 있는 경주로 빨리 가서 막대기와 나침반을 들고 확인해 보고 싶지 않으세요?
서울 관상감 관천대
서울 관상감 관천대(보물 제1740호)

서울 관상감 관천대
보통 천문대하면 경주에 있는 첨성대만 떠올리는데, 지금 남아 있지는 않지만 고구려에도 천문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백제는 675년에 일본에 점성대라는 천문대를 세워 천체관측을 지도했다는 것으로 보아 백제에도 천문대가 세워졌을 거예요. 고려도 궁성인 만월대 안에 관천대가 있었고, 조선시대 관천대도 2개가 남아있어요. 그 중 하나인 창경궁 관천대는 보물로 1434년(세종16)에 경복궁 내 경회루 북쪽에 설치되었다가 옮겨졌어요. 그 높이가 약 6.3m, 세로 약 9.1m이며 가로 약 6.6m입니다. 지금 2층 건물 높이 정도겠죠. 또 하나는 구름재(운현)란 곳에 설치된 관천대로 높이가 약 3.8m, 세로 약 2.9m이며 가로 약3.8m로 경복궁 관천대의 반 정도 됩니다. 이것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관천대는 첨성대와 모양이 다르죠. 신화적인 상징을 담은 첨성대와는 달리 유교적 질서를 보여주듯 사각기둥이며 천문관측기구인 간의를 놓을 수 있게 위가 편평하게 되어 있습니다.
똑딱 소리 없는 시계 (창경궁 자격루, 앙부일구)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시계를 찾지요? 잠들 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시간을 확인하며 살고 있어요. 이제 시계는 사람들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 되었어요. 옛날 사람들도 시계를 자주 보며 살았을까요? 사실 농촌에서는 시계가 별로 필요 없었어요. 첫 닭이 울면 눈을 떠 일을 나가고, 해가 중천에 뜨고 배꼽시계가 울면 점심을 먹고, 해가 뉘엿뉘엿 지면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일 년 농사는 시간을 계산할 필요가 없었어요. 자연이 변화하는 것을 보고 씨를 뿌리거나 거두었기 때문이지요. 가령 ‘대추 꽃이 피면 모내기를 시작한다.’ 거나, ‘도라지꽃이 필 때쯤이면 장마철이 된다.’ 는 것처럼 자연의 생태 변화를 민감하게 알았기 때문에 절기를 따지는 것보다 그런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가 훨씬 중요했을 거예요. 또 달이 뜨는 위치와 모양 변화를 보고 시간 변화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어요. 그런데 역사를 보면 정확한 시계를 만들려는 노력이 많았는데, 이렇게 정확한 시간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시간을 측정하는 천체 관측 기구들이 왕궁 가까이 있고, 조선시대 앙부일구, 자격루 같은 정교한 시계를 만든 노력들을 보면 왕과 지배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어요. 그럼 왜 그렇게 정확한 시간을 알려고 애를 썼을까요? 오랜 옛날 해시계와 물시계가 만들어지고, 오늘날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바늘시계와 숫자가 톡톡 튀어나오는 전자시계 시대까지, 사람들의 생활은 어떻게 다른지 같이 시간여행을 떠나볼까요?
해시계(앙부일구)
앙부일구(보물 제845호)

앙부일구
사진을 보니 커다란 솥이 있네요. 솥 안에는 뾰족한 침도 있어요. 이것은 오목한 솥이 하늘을 우러러본다는 앙부일구, 해시계예요. 나라마다 많은 해시계가 있었지만 우리는 이렇게 독특하게 만들었어요. 그럼 왜 오목한 솥모양으로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둥근 지구 모양을 표현한 것이고, 작은 크기로도 시간선, 계절 선을 나타내는 데 효과가 크기 때문이에요. 세종대왕 때(1437년)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만들었어요. 지금은 세종대왕 때 만들어진 것은 남아 있지 않고, 세종대왕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 전해지는데 국립중앙박물관과 영릉전시관에 전시되어 있어요. 앙부일구는 지름이 30∼40cm이고 청동으로 몸통을 만든 뒤 검은 칠을 하였고, 은상감으로 선을 새겨 예술품으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아주 작게 만들어 지니고 다닐 수 있는 앙부일구도 있었어요. 안을 들여다볼까요? 오목한 곳에 세로선 7줄과 가로선 13줄이 그어져 있지요. 그리고 가운데 바늘이 있지요. 이것이 영침인데 길이는 원지름의 반이고, 그 그림자의 변화에 따라 시간과 절기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세로선은 시간선이고, 가로선은 절후선(계절선)이에요.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면서 생기는 그림자가 시간 선에 비춰 시간을 알 수 있어요. 또, 절기마다 정오에 태양의 고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절후선에 나타나는 그림자 길이가 다른 것을 보고 24절기를 알 수 있어요. 앙부일구는 대궐에 설치했습니다. 또한 크게 만들어 종로 1가 혜정교와 종로 3가 종묘 앞에 두어서 일반 백성들도 볼 수 있게 했답니다. 그리고 시간을 12지신 그림으로 그려서 글씨를 모르는 백성들도 쉽게 볼 있게 배려했습니다.
물시계(창경궁 자격루)
창경궁 자격루(국보 제229호)

창경궁 자격루
자격루는 1434년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만들어 국가 표준 시계로 사용했어요. 자격루는 보통 물시계로 많이 알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물시계가 아니라 자동시보 장치가 있어서 일정 시간마다 종, 북, 징을 쳐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었답니다. 세종대왕 때 만든 이 신기한 시계는 모두 없어지고 지금 국보로 지정된 자격루는 1536년(중종 31)에 만든 것으로 덕수궁 뜰에 보관되어 있어요. 다른 장치들은 다 없어지고 청동으로 만든 물을 내보내는 큰 물통 1개와 작은 물통 2개, 물을 받는 긴 통 2개만 남아 있어요.
자격루는 큰 물통에서 작은 물통으로 물이 계속 흘러들어가 작은 물통의 물이 물받이 통에 들어가면 안에 있는 살대가 떠올라 지렛대와 쇠구슬을 쳐서 구슬이 떨어지게 했대요. 그러면 그 구슬이 떨어지면서 시각을 알리는 장치를 움직여 시간을 알려주었답니다. 매우 복잡하고 정교하게 만들어 그 원리를 알게 되면 입이 쩍 벌어져요. 복원을 못해 시간을 알리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게 매우 안타깝습니다. 자격루 이전에도 물시계는 많았어요. 물시계는 유입식과 흡입식 2가지 방식으로 시간을 알려줍니다. 유입식은 물이 흘러 나가는 양으로 시간을 아는 것이고, 흡입식은 물이 흘러들어온 양으로 시간을 잽니다. 자격루는 이런 흡입식과 유입식이 모두 쓰이면서 자동으로 시보를 알려주는 장치까지 더해진 것이지요. 이런 정교하고 과학적인 시계를 만들었던 전통이 오늘날에도 이어졌다면 우리나라도 스위스 못지않게 시계 산업이 발달하지 않았을까요?
물시계는 왜 만들었을까요?
옛사람들은 낮에는 해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밤에는 별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았어요. 그런데 해시계와 별시계는 비가 오거나 구름이 끼면 사용할 수 없어요. 봄, 가을에는 그래도 큰 문제가 없었겠지만 장마철이 된다면 무척 곤란했겠죠? 그래서 물이 계속 흐르면서 밤이나 낮이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정확하게 시간을 알려줄 수 있는 물시계가 국가표준시계가 될 수밖에 없었어요. 도성 안에서 물시계를 통해서 시간을 정확하게 알면 궁궐 안팎의 종루나 고루에서 종이나 북을 쳐서 시간을 알려 주었지요. 이렇게 정확한 시간이 필요한 것은 궁궐에서 호위병들이 업무교대를 하거나 성문을 여닫는데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성문을 여닫는 시간이 들쭉날쭉 하다보면 일상생활의 혼란은 물론 임금에 대한 신뢰가 많이 떨어지겠지요. 따라서 시계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도시에서 사람들의 생활을 통제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생겼어요.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전쟁 때문이었어요. 전쟁을 할 때 여러 부대가 연합하여 기습공격을 하려면 제시간에 정확하게 군대를 집중시키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세종대왕 때 시계를 만들어 가장 먼저 보낸 곳이 변방이래요. 이런 국가적 필요로 시계를 만들고 활용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많은 노력과 시간, 비용을 들여서 보다 정확한 시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지요.
막대기 하나에서 과학의 토대가 마련되었어요
앞에서 보았듯이 앙부일구에는 가운데 영침이라는 바늘과 세로선, 가로선이 있어요. 이것을 규표라고 해요. 우리가 해 그림자로 시간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은 막대기를 세워야 할 것이고, 그 아래 시간과 절기가 적힌 자를 눕혀 놓아야 할 거예요. 세운 막대기를 ‘표’, 아래에 눕힌 자를 ‘규’라고 해요. 단순한 막대기 하나로 시간과 절기를 알았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아요? 간단한 막대기 하나로 천문학이 탄생할 수 있었고, 그것은 과학적 인식의 기초가 되었어요. 과학이라는 것이 자연현상을 수치로 표현해서 인간생활에 유용한 법칙을 발견하는 것인데 그 막대기를 통해서 자연현상을 수치와 각도로 나타내게 된 것이지요. 앙부일구는 바로 이런 규표가 발전된 형태라고 생각하면 되겠지요. 그럼 규표를 이용해서 어떻게 시간을 잴 수 있었는지 알아볼까요? 하루는 지구가 스스로 한 바퀴 도는 시간을 말해요. 우리 눈에는 해가 뜨고 졌다가 다음날 다시 뜨는 것으로 보이죠. 하루를 뜻하는 ‘날’, ‘일’은 해를 말합니다.
자연의 리듬을 찾아요.
손목시계, 탁상시계 등 늘 친절하게 시간을 알려주는 요즘 시계 덕분에 우리는 자연의 시간을 많이 잃어버렸어요. 물론 우리들 생활이 자연과 멀어졌기 때문이기도 하죠. 그만큼 자연과 멀어지면서 자연과 동떨어져 살아도 되는 것처럼 살고 있어요. 그래서 자연을 파괴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며 살지요. 분, 초를 다투는 생활은 사람들의 관계도 멀어지게 해요. 이젠 더 이상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이 멀어져서는 안 되겠어요. 긴 호흡으로 사람을 생각하며 자연과 하나 되는 그런 시간들을 만들어가요.
그러기 위해서
(1)우리 마을(학교)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를 꾸준히 관찰해 보세요.
(2)하늘의 해, 달, 별의 움직임에 관심을 갖고 수수께끼나 이야기도 찾아보고 관찰해 보세요.
농자천하지대본, 세계최초의 기상관측기구 (금영 측우기, 수표교)
장마철 많은 비가 올 때면 몇 mm 왔는지 참 궁금해요. 비가 온 양을 확실하게 알면 비로 인한 피해를 미리 생각하고 막을 수 있어요. 그럼 언제부터 비 온 양을 정확하게 숫자로 나타냈을까요? 조선시대 세종대왕 때(1441년, 세종23) 빗물을 그릇에 받아 재는 측우기와 하천의 물높이를 재는 수표를 만들었어요. 이것은 이탈리아 토리첼리가 만든 우량계보다 198년 앞섰어요. 이는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하늘을 보고 기상현상을 예측하던 시대에서, 계기를 사용하여 정확한 값을 측정하는 시대로 바꾸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과학하면 서양이 앞섰고 그것을 따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측우기와 수표는 우리에게 우리 생활과 현실을 구체적으로 해결하는 과학 전통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측우기와 수표를 보면서 그런 전통을 제대로 알고, 남의 것을 무조건 외우는 공부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서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를 배워야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측우기와 수표를 제대로 알아야겠지요?
측우기는 어떻게 생겼나요
동그란 통은 빗물을 받는 그릇으로 측우기라고 해요. 그 측우기를 세울 수 있게 한 것이 측우대입니다. 여기에 주척이라는 자가 있어 측우기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쟀습니다.
현재 측우기는 공주 금영측우기(보물)가 1기 남아 있고, 측우대는 관상감 측우대(보물), 창덕궁 측우대(보물), 대구 선화당 측우대(보물) 등 5기가 있습니다.
자, 이젠 각 부분들을 자세히 알아볼까요?
처음 만든 측우기는 원통형이며, 깊이 41cm에 지름이 약 16cm이었습니다. 그러나 41cm에 빗물이 차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 이듬해에 높이 31cm, 지름 14cm로 줄였어요. 지금 보물로 지정된 금영측우기는 세종대왕 때 만든 것이 아니라 헌종 임금 3년(1837)에 만든 것이고, 현재 기상청에 보관되어 있어요. 관상감이나 각 지방에 있던 많은 측우기는 일제시대와 6·25때 없어졌다고 합니다. 측우기 밑에 있는 사각기둥 모양의 측우대는 어떤 역할을 할까요? 측우대 위를 보면 깊이 4cm 정도로 동그랗게 패여 있어 측우기를 끼웠다 뺐다 할 수 있어요. 여기서 측우대는 측우기를 안정되게 받쳐주고 빗물을 편하게 측정할 수 있게 해요. 또 땅에서 일정 부분 떨어져 있어 빗물이 튀어 들어가지 않게 해주기도 했겠죠.
강물이나 하천의 유량은 어떻게 재나요?
서울_청계천_수표(보물 제838호)

서울_청계천_수표
수표교(서울특별시 시도유형문화재 제18호)

수표교
수표라고 들어보셨어요? 측우기는 많이 알아도 수표는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수표는 하천·저수지의 물높이를 재는 기구로서 측우기를 만들 무렵 같이 만들어졌어요. 강우량이나 하천의 유량을 막연히 많거나 적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정밀하게 측정하여 몇 자 몇 치를 말하게 된 것은 대단히 앞선 과학적 태도였죠.
그럼 수표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 살펴볼까요?
사진의 수표는 보물로 지정되어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되어 있어요.
높이 3m루 화강석을 깎아 만들었으며 위에는 연꽃무늬의 머릿돌이 놓여 있고, 밑은 땅에 박을 수 있게 방추형으로 했어요. 돌기둥은 양면에 주척 1척에서 10척까지 새겼고 3척, 6척, 9척 되는 곳에 ○표를 파서, 3척이면 물이 적고, 6척이면 보통 수위이며, 9척이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이 수표는 세종임금 때 만든 것이 아니에요.
그럼 처음 수표는 어땠을까요?
처음엔 나무로 만들어 청계천 마전교(현재 수표동 수표교자리)에 세웠어요.
또 한강변에도 있었는데 바위를 깎아 눈금을 새겼습니다. 측정은 지금 남아 있는 수표와 달랐어요. 세종대왕 때의 수표는 척(약 33cm)·촌(약 3.3cm)·푼(약 3.3mm)의 단위까지 눈금이 매겨져 세밀하게 잴 수 있게 했어요.
나무로 만든 이 수표는 쉽게 썩었어요. 그래서 그 뒤 돌로 된 수표를 만들게 된 것이죠.
돌로 만든 수표는 세종대왕 때보다 수치가 자세하지 않지만 비가 오는 정도를 쉽게 알려주니 오히려 더 발전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죠.
세계관과 지도 (곤여만국전도, 대동여지도, 청구도)
조선 전기에 이미 세계지도와 조선지도가 만들어졌습니다. 당시에는 중화사상의 영향으로 대부분 중국이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그 크기도 실제보다 과장되게 그려져 있었지요. 그 중 하나인 [혼일강리역대국지도] 에는 조선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지금껏 내려오는 우리나라의 전도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세계 지도도 크게 변화되었습니다. 마테오리치에 의해 만들어진 서양식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 가 조선 후기인 1603년, 청나라를 통해서 우리나라에 전해졌습니다. [곤여만국전도] 는 경도와 위도를 사용하고 신대륙까지 표현된 지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세계가 매우 넓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따라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은 점차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지도도 정상기와 김정호에 의해 보다 과학적이고 상세한 지도로 발달되었습니다.
곤여만국전도
명나라 말기에 중국으로 건너온 선교사 마테오리치가 제작한 세계 지도로 1602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수학과 천문학을 공부한 그는 중국에 선교사로 와서 서양 학술을 소개하고 황실의 요청으로 〈곤여만국전도〉(1602년)를 간행하였습니다. 〈곤여만국전도〉에는 중국이 지도의 중앙에 있으며, 지명은 한자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603년(선조36) 부경사로 베이징에 갔던 이광정과 권희가 이 지도를 가지고 돌아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습니다.
청구도와 대동여지도
청구도(보물 제1594호)

청구도
과거의 지도는 주로 행정적, 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조선 후기에는 산업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지도에 산맥과 하천, 포구, 도로망이 정밀하게 표시된 점이 특색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지도가 〈청구도〉와 〈대동여지도〉입니다.
〈청구도〉는 순조 34년에 제작된 대지도로 김정호의 작품입니다.
〈청구도〉는 건·곤 두 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청구도〉가 그 이전의 지도와 다른 점은 천문 관측에 의한 경선과 위선을 표시한 점이며, 서양의 기하학 원리를 이용하여 확대와 축소를 정확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청구도〉의 특징은
첫째, 전국도로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지도 중 가장 크며
둘째, 이전의 어느 지도보다 과학적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축척이 동일한 전국도로서는 당시 가장 정밀한 지도였으며, 넷째 군과 현의 경계를 확실히 하여 실용적이고, 다섯째 편람하기에 좋도록 책첩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보물 제850호)

대동여지도
김정호는 〈청구도〉를 완성한 뒤 27년 만인 1861년(철종 12)에 〈대동여지도〉를 발간했습니다. 〈청구도〉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는 〈대동여지도〉는 일반인이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지도책의 형식에서 벗어나 지도첩 모양으로 하여 전체를 22첩으로 묶고 접어서 책처럼 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뗐다 붙이기도 자유롭고, 접고 펼 수 있게 되어 있어서 2개 또는 3개씩 합쳐 볼 수도 있고, 또 전부를 펼치면 전도가 됩니다. 이것을 분첩절첩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특정한 일부 지역을 보고자 할 때는 그 부분을 펴 보면 되고, 접경지역은 서로 연결시키면 되며, 이것을 다시 풀어놓고 전부 이어서 맞추면 우리나라가 가득하게 하나로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대동여지도〉는 세로 30㎝, 가로 20㎝의 지도목판화 126개로 이루어져 있어 이를 순서대로 접합하면 세로 6m60㎝, 가로 3m에 달하는 거대한 모습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지도표가 작성되어 있다는 점도 특징입니다. 예를 들면 창고는 ‘■’라는 표시를 정해두고 표시 하였습니다.
누가 만들었나요?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 선생님을 모두 알지요. 조선시대 후기에 살았던 실학자이자 지리학자로 호는 고산자라고 합니다. 이 분은 우리나라 근대 지도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분이 만든 〈대동여지도〉는 지금 우리가 보는 지도와 비교해도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확한 지도이지요. 지금처럼 항공촬영이나 인쇄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는데도, 정확하게 우리나라 지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 분이 남다른 나라사랑 정신으로 노력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김정호 선생님이 살 당시에는 지도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고, 또 대체로 지도가 군사적으로 쓰였으므로 외적이 이를 침략에 이용할 것을 우려하여 개인이 지도를 만드는 것은 엄하게 금지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일찍이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지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지도 만들기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1800년 무렵에 태어난 김정호는 어린 시절부터 정확하고 실용적인 지도를 만들 꿈을 키웠습니다. 집을 떠나 10년 가까이 우리나라 곳곳을 직접 다니며 조사하여 1834년에 [청구도] 를 완성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근대적인 축척 지도책입니다. 그 분은 우리나라 전도인 〈청구도〉를 만든 데 이어 세계지도인 지구도를 만들었고, 계속해서 〈대동여지도〉·〈대동여지전도〉 등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지도들을 만들기 위해 선생님은 30년 동안이나 우리나라를 두루 답사하고, 백두산만 해도 17번이나 올랐다고 합니다. 특히 목판으로 만든 〈대동여지도〉는 오늘날의 지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매우 정확한 지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