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자료실】▣/◈유네스코,국가유산청◈

문화유산

동해건설산업 2025. 10. 12. 14:08

지식[기타분야]

500년간 써온 나라 일기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을 세운 태조부터 순종까지 (13921910)의 정치, 외교, 군사, 제도, 법률, 경제, 산업, 교통, 통신, 사회, 풍속, 미술, 공예, 종교 등 각 부분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年月日)순서로 그때그때 기록해 둔 책으로서 총 1893888책이나 되는 엄청난 규모의 역사기록물입니다

 

어떻게 만들고 보관하여 왔을까요?

어느 시대나 그 때의 일들을 후세에 전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 등 여러 나라에서도 실록(역사를 기록한 책)이 쓰이고 전해져 내려오고는 있지만 대부분 왕에 의해 그 내용이 고쳐지고 변하여 사실적이지 못한데, 조선왕조실록은 그때마다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해 두는 일에서부터 책을 만드는 작업까지 그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사관)을 두고 역사적인 사실이 그대로 쓰일 수 있도록 특별한 권리를 주어 보호했습니다. 임금이라 할지라도 기록해 둔 자료를 함부로 읽어볼 수 없도록 비밀을 보장하였으므로 어느 나라 실록보다 그 내용이 진실하고 사실 그대로 잘 써졌다는 점에서 훌륭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실록은 특별히 설치된 장소(사고-史庫) 4곳에 각각 1부씩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치르면서 사고에 있었던 책들이 없어지기도 하였지만 그때마다 다시 만들거나 고쳐서 20세기 초까지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의 사고에 각 1부씩 전하여 내려왔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존하기 위해 선조들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들에 의해 서울, 충주, 성주에 보관되었던 조선왕조실록 3부가 불타버리고, 전주에 보관되어 있던 것만 손흥록, 안의, 한춘에 의해 겨우 구할 수 있었다는 일화입니다. 그 세 사람은 왜군이 전라도에 들어오자,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겼다가 뱃길로 충청도 아산을 거쳐, 황해도 해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왜군이 재차 침입하여, 이들은 또다시 자기 집 하인들과 함께 50바리(짐을 세는 단위)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실록을 싣고 강화도로 옮기고, 그것도 안심이 안 되어 평안도 안주를 거쳐 묘향산으로 옮겨 보관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우리가 볼 수 있는 실록이 남아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

이 책은 역사를 사실적으로 쓴 세계 최대 규모의 역사기록물일 뿐 아니라 금속활자, 또는 목활자로 된 인쇄물이라는 점에서도 문화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도 주변의 나라들처럼 처음에는 2부씩 만들어서 두 곳에 보관하였는데 세종대왕 때부터는 2부씩 더 등사하는 사업을 벌여 새 사고를 짓고, 새로 등사한 실록들을 보관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록이란 임금님이 정치한 내용을 날짜별로 자세히 기록한 글이므로 그 내용이 너무 많아 한두 본을 더 쓰는 일이 쉽지 않아서 세종대왕 때부터 활자 인쇄를 택하게 되었고 이것이 곧 조선시대의 활자 인쇄술을 발전시킨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더 아름다운 글자와 모양으로 실록을 인쇄하려는 마음까지 생겨 새로운 금속활자를 개발하는데 힘썼으므로 활자 문자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실록을 통해 지난 시대의 정치, 경제, 생활 모습 등 모든 분야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인쇄(활자)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책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유네스코에서도 199710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여, 온 세계가 함께 보존하고 전해주어야 할 유산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우리 인쇄술을 찾아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직지심경)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직지심체요절이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요절

 

옛날에는 탑에 사리를 넣었어요.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부처의 말씀을 적은 종이를 넣기도 했지요. 바로 그 경우가 1966년 불국사 석가탑 2층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에요.

국보인 이 다라니경은 발견 당시 중간 부분까지 많이 부식되어 있었고, 전체 모양은 폭 6.56.7, 전체 길이 약 62의 목판으로 찍은 두루마리였어요. 김대성이 751(신라 경덕왕 10)에 불국사 석가탑을 세우고 탑 속에 넣은 것으로 인쇄 시기는 750년경이에요.

직지심체요절은 1972세계 도서의 해를 기념하기 위한 책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죠. 직지심체요절은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라고 밝혀졌어요.

직지심체요절은 상하 22책인데, 상권에는 인도와 중국의 유명한 스님들 이야기가 적혀있고 하권에는 스님들의 게송, 찬송, 법어, 문답, 서신들이 적혀있어요. ‘직지심체직지인심견성성불이라는 도를 깨닫는다.'는 문구를 줄여서 나타낸 것으로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가졌을 때 그 심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활자는 없었는데 어떻게 목판 활자인지 금속 활자인지 알았을까요?

목판 활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무판 위에 문자를 조각했기 때문에 나뭇결이 나타나지요. 또한 거의 다 가로획과 세로획이 겹치는 곳에 칼이 스쳐간 자국도 나타나구요. 먹물을 묻혀 찍어내니 주위에 먹물이 번져 있기도 하지요. 목활자를 만들 때는 활자 하나하나의 글자본을 써서 뒤집어 붙이고 새겨내기 때문에 같은 글자라도 글자모양이 다르고 글자 획의 굵기에 차이가 심하여 고르지 않아요. 오래 사용하면 글자 획이 닳아 부분적으로 결이 생겨 인쇄가 조잡해지지요. 반면에 금속활자는 주조한 다음 줄로 손질하기 때문에 글자 끝이 둥글둥글해요. 글자가 같을 때에는 모양과 크기가 같은 것을 알 수 있죠. 일정한 글자본으로 주형을 만들었기 때문에 글자모양이 같고 고르답니다.

 

고려에서 금속활자가 발달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인쇄술이 세계 최고라는 중국이 고려보다 금속활자를 늦게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중국 한자로 활자 주형을 만들려면 수천 개를 만들어야 했어요. 게다가 같은 한자라도 글씨체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 그 수는 더 많이 필요했겠죠. 두 번째로는 활자 인쇄본이 목판 인쇄본보다 섬세하고 예술적인 면을 결코 잘 나타내지 못한다는 거예요. 더욱이 중국의 주요 인쇄물인 경전에서 예술성이 다른 점보다도 중요하게 고려되었기에 금속 활자의 발달이 더뎠던 거예요. 반면, 고려는 1126년과 1170년의 두 차례에 걸친 궁궐의 화재로 수만 권의 장서가 불탔어요. 그런데다가 그 무렵 송과 금의 끊임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어, 송에서 책을 들여오는 것도 절망적이었죠.

결국 고려는 가지고 있던 기술로 필요한 책을 인쇄하는 길밖에 없었는데, 적은 부수를 여러 종류 인쇄하는 경우, 목판 인쇄로는 많은 경비와 시간이 필요해 그 해결이 어려웠죠. 더욱이 고려에는 목판이나 목활자를 만드는 데 알맞은 단단한 나무가 적었어요. 그러나 고려는 삼국의 청동 주조기술과 금속 세공기술의 전통을 계승했고, 1101년 송에서 배운 기술로 청동 전을 만들었으며, 청동 종들에 명문을 새긴 경험을 가지고 있었죠. 고려에서 목판이나 목활자 대신에 금속활자를 만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죠. 결국 이런 이유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본이 나오게 되었죠.

 

우리 몸, 우리 자연, 우리 의학 (동의보감)

 

동의보감이란 무엇인가요?

동의보감(국보 제319)

동의보감

허준이 선조의 명을 받아 지은 한방 의약서로 동양의학의 백과전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 약쓰는 법, 침놓는 법 등이 쓰여 있으며, 민간요법과 더불어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저술하였습니다.

질병에 따라 항목을 정하고 각 항목 아래에는 그에 해당되는 병에 관한 내용과 약방들을 출전과 함께 자세히 설명하여 병의 증세에 관한 옛날과 오늘날의 처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동의보감은 왜 편찬하였을까요?

동의보감》 〈서문에는 선조 임금이 백성들이 병으로 앓는 것을 걱정하여 허준을 불러 다음과 같이 지시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즘 조선이나 중국의 의학책들은 모두 변변치 않고 보잘 것이 없으므로 그대는 여러 가지 의학책을 모아서 좋은 의학책을 하나 편찬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사람의 병은 다 몸을 잘 조절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므로 수양하는 방법을 먼저 쓰고 약과 침, 뜸은 그 다음에 쓸 것이며 또 여러 가지 처방이 복잡하므로 되도록 그 중요한 것만을 간추려야 할 것이다. 산간벽지에는 의사와 약이 없어서 일찍 죽는 일이 많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약초가 많이 나기는 하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니 이를 분류하고 지방에서 불리는 이름도 같이 써서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하라.” 즉 동의보감은 첫째, 의원과 의학책은 많았으나 정확한 학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지한 의원들이 처방의 뜻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 약을 잘못 쓰는 경우가 많고, 둘째 전쟁으로 전국이 황폐하여 병자가 치료를 받을 수 없는데다가 의학책마저 부족하였으며, 셋째 의원으로서 인간의 생명을 구하고 나아가 어진 정치를 펴고자 하는 국왕의 뜻을 받들어 편찬된 것입니다.

 

동의보감의 의의는 무엇인가요?

이러한 목적으로 편찬된 동의보감은 몇 가지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그 때까지의 의학서와는 달리 지극히 과학적 입장에서 당시 의학계의 모든 지식을 정리하였습니다. 둘째, 우리나라의 약 재료와 그것으로 만든 제품인 향약(鄕藥 우리나라에서 나는 약초로 만든 약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이용과 보급을 강조하였으며, 이를 위해 향약 중 640개의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여 쉽게 이용토록 함으로써 우리나라 의학을 부흥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셋째, 80여종의 많은 국내외 의학책들을 참고하여 편찬했기 때문에 내용이 풍부하여 시간이 없는 임상의에게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었습니다. 넷째, 우리나라 의학 수준을 세계에 과시하였습니다. , 병의 증상에 따라 병에 대한 해설과 약 처방을 모두 수록하였고, 출전과 민간 처방 및 본인의 경험까지 기록하여 의원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국내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여러 차례 간행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는 이 책이 처음이었습니다. 다섯째, 이 책에서 허준은 우리나라 의학을 하나의 독립된 의학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는 중국 의학을 북의와 남의로 나누고 우리나라 의학을 동의라 하였는데, 그것은 조선이 단지 동쪽에 있다는 지역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의학을 연구하여 왔기 때문이며, 이로써 한국 의학이 중국과 대등한 전통과 수준을 지니고 있음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한글 - 훈민정음 (한글의 과학성)

 

우리나라는 고유한 말과 글자를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1443년 세종대왕은 글에 어두운 백성들을 위해 우리나라 말을 쉽게 기록할 글자를 만들어 냈는데, 이것이 바로 한글입니다.

처음에는 훈민정음이라 불렀으며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도록 글자 구조가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한글은 닿소리 14개와 홀소리 10개로 되어 있는데, 이를 조합하면 어떤 말도 글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한글을 왜 창제했을까요?

훈민정음(국보 제70)

훈민정음

오늘날 이 지구상에서는 여러 종류의 글자가 쓰이고 있지만, 이러한 여러 글자 가운데에서 한글처럼 만든 목적이 뚜렷하고 만든 사람이 분명한 글자는 없다고 합니다. 또 새로 만든 글자에 대한 해설 책도 편찬되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예의편첫머리에서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의 뜻을 우리말의 음운체계가 중국과 달라서 본디 중국어를 기록하도록 마련된 한자로는 통하지 않으므로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글로 표현하려고 하여도 끝내 자기 뜻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딱하게 여겨서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기에 편안하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라고 하여, 한자를 모르더라도 자기 뜻을 글로 옮겨서 나타낼 수 있도록 쉬운 글자를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한글을 만들었나요?

[세종실록] 에 의하면, 그 창제는 1443(세종 25) 12월이었지만, 반포는 그보다 3년 뒤인 14469월입니다. 실록에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및 반포에 관해 아주 간단하게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고심하고 연구하여 한글을 창제하였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한글 창제에 대하여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세종이 한글의 창제에 밤낮으로 애썼기 때문에 안질이 나서 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요양을 하며 모든 일은 다 정부에 맡겨 버리게 되었는데, 훈민정음의 연구 발명의 일만은 요양하면서도 쉬지 않고 골몰하였다,” 고 하듯이 온갖 정성을 기울여 완성되었습니다. 겨울에 훈민정음이 완성됐을 때, 지금 생각으로는 모든 사람이 크게 반기고 기뻐하였을 것 같지만, 사실은 곧 한글 반대의 여론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이를 보면 한글의 반포와 시행에 이르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글의 과학성

글자는 의미를 선명하게 전달하는 것이 주된 목적인데 가능한 한 적은 숫자로 많은 의미를 전달하고, 그 체계가 단순할수록 가치가 높아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글의 홀소리는 시각적으로 닿소리와 확연히 구별됩니다. 홀소리는 수직 또는 수평의 긴 선에 점이 붙어 있는데, 혀의 모양을 상형화하였다고 하기도 합니다.

또한 닿소리는 간결한 기하학적인 기호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그 글자를 발음할 때의 입술··혀의 모양을 상형화한 글자입니다.

 

떡썰기와 글쓰기 (한석봉증유여장서첩)

 

여러분은 어머니가 밤중에 등잔불을 끄고 떡을 썰면서 아들에게 글씨를 쓰라고 시켰던 이야기를 알고 있나요? 바로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 이야기지요. 옛날에는 글씨는 그 사람의 마음을 담고 있다고 해서 글씨를 어떻게 쓰는가를 매우 중요시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모든 글들은 직접 써야 했기 때문에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존경했지요. 다른 나라와 교역할 때에도 직접 쓴 글씨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한석봉(한호)에 대하여

조선시대의 서예가 중 대표적인 사람으로 손꼽히는 한석봉은 일찍이 어머니의 격려로 글씨에 힘을 기울여, 왕희지의 필법을 익혔으며 모든 글씨체에 뛰어났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의 힘으로 결국 스물다섯 살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고 나라의 문서를 바른 글씨로 쓰는 사자관이란 벼슬을 얻은 그는 점차 그 명성이 높아져 갔습니다. 한석봉은 명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거나 외국사신을 맞을 때 그 정묘한 글씨체로 명성을 떨쳤으며, 우리나라 서예계에서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중국의 글씨체를 모방하던 풍조를 벗어나 독창적인 경지를 확립하여 석봉 나름대로 호쾌하고 강건한 서풍을 창시했습니다. 선조도 한석봉의 글씨를 특히 아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필적으로 석봉서법, 석봉천자문등이 있고, 그가 쓴 비문 글씨로는 [허엽신도비], [서경덕신도비], [기자묘비], [행주승전비], [선죽교비] 등이 있습니다.

 

한석봉의 서첩

한석봉 서첩

한석봉 서첩

조선 중기 명필 한석봉(1543~1605)의 노년 작품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 실제로 있는지 확인되지 않았던 [유금강산기] 친필본(직접 쓴 것)으로 추정되는 서첩이 공개됐습니다. 가로 20, 세로 25.5의 한지에 모두 12쪽으로 구성된 이 서첩은 해서와 행서로 단정하고도 부드럽게 씌어져 있는게 특징입니다.

전반부 여섯 쪽엔 1603(선조 36) 8월에 금강산을 함께 여행한 한석봉과 최립의 금강산 감상이 실려 있습니다. 후반부 여섯 쪽은 이호민이 한석봉과 최립 일행의 금강산 여행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함께 가지 못했음을 애석해하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한석봉의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 등 10여 점이 남아 있으며 이중 한석봉증유여장서첩이 보물로 지정돼 있습니다.

 

백범일지와 난중일기 (백범일지, 난중일기)

 

백범일지

백범일지1929(상권)1943(하권)(보물 제1245)

백범일지1929(상권)1943(하권)

백범일지1929(상권)1943(하권)(보물 제1245)

백범일지1929(상권)1943(하권)

백범일지1929(상권)1943(하권)(보물 제1245)

백범일지1929(상권)1943(하권)

백범일지는 김구 선생이 1929년 중국 상해에서 쓰기 시작하여 20년 가까이 그의 생애와 사상을 기록한 자서전입니다.

백범의 어린 시절, 청년기, 망명생활, 해방, 조국귀환 등 민족지도자로서의 삶이 진솔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범일지는 현재 백범 김구선생의 아들 김신이 소장하고 있으며 1997612일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난중일기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국보 제76)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국보 제76)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임진왜란 중에 진중에서 69개월간에 걸쳐 붓으로 쓴 초서체의 일기본입니다. 그의 나이 48세 때이자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인 1592년부터 노량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실 때까지인 1598년까지의 일기가 들어있습니다.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와 삼국통일

 

진흥왕은 어떤 분인가요?

신라 제24대 임금인 진흥왕은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빼앗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초가 되게 하였고, 이듬해 백제의 군사가 쳐들어오자 이를 물리쳤으며, 562년에는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였습니다. 이어 주변 나라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한강 유역에 강력한 군대를 배치하는 한편, 새로 개척한 땅에는 순수비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고구려의 광개토왕, 백제의 근초고왕과 함께 영토 확장의 3대 인물로 꼽히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576(진흥왕 37) 화랑제도를 만들어 김유신, 사다함 등 우수한 인재들을 길러 삼국통일의 기틀을 확립하였습니다. 또한 진흥왕은 흥륜사, 법주사와 같은 절을 지어 불교를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이사부(거칠부)에게 국사라는 역사책을 만들게 하였으며 우륵으로 하여금 음악을 연구하게 하는 등 여러 면에서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신라진흥왕순수비는 왜 세웠나요?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국보 제3)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진흥왕은 백제와 힘을 합하여 고구려의 땅인 한강 상류지역을 빼앗고, 대가야와 함께 쳐들어 온 백제 성왕을 관산성 싸움에서 크게 물리쳐 한강 중류지대를 차지하였습니다. 그 후 가야에 대한 정복 사업을 펴 완산주를 설치하였고, 가야의 여러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여 신라의 영토를 넓혔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순수(巡狩임금이 나라 안을 살피며 돌아다니는 것)한 곳마다 기념비를 세웠는데 거기에는 넓어진 국경을 표시하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이 비석들은 광개토대왕릉비 다음으로 귀중한 금석문으로 유명하며, 당시 신라의 영토를 연구하는데 매우 가치가 높은 유물입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창녕비,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등 4개입니다.

북한산비는 국보로 진흥왕이 순수한 기념으로 북한산에 있는 비봉(북한산에 있는 봉우리 중 하나)의 꼭대기에 세운 것입니다. 높이 1.54m, 너비 0.7m, 두께 0.16m의 크기인데 다른 진흥왕순수비와는 달리 직사각형으로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습니다.

심하게 손상되어 비문의 내용은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창녕비가 세워진 561년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568년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북한산비는 19728월에 경복궁 근정전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19868월에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로 옮겨졌습니다. 한편, 비가 서 있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사적으로 지정하였습니다. 마운령비는 568년에 진흥왕이 신라의 확장된 영토를 돌아보고 세운 것인데 함경남도 이원의 마운령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니, 당시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진흥왕의 기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비문에는 비를 세운 까닭과 진흥왕의 업적, 수행한 사람의 직위와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어 역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유물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함흥시에 있는 함흥본궁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삼국 통일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우리나라의 여러 부족 국가 중에서 강력한 국가로 성장한 나라로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었습니다. 이 세 나라가 서로 경쟁하면서 한반도에 자리 잡아 가던 시대를 삼국시대라고 합니다. 삼국시대 때,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세 나라의 싸움은 끊임이 없었습니다. 한동안 고구려가 패권을 잡아 신라와 백제를 눌렀습니다.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수도인 한성과 한강유역을 빼앗긴 백제의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이에 맞섰습니다. 그리하여 백제는 한강유역을 되찾았으나 다시 동맹군이었던 신라의 진흥왕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에 성왕은 신라에 보복하기 위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관산성(충북 옥천)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백제의 기세를 꺾고 한강유역을 차지한 신라의 진흥왕은 함경도의 남부 지방까지 세력을 뻗쳤고, 가야마저 완전히 정복하였습니다. 이러한 진흥왕의 영토 확장은 그가 세운 4개의 순수비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라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고구려와 백제는 여제동맹을 맺고 신라의 위협을 막았습니다.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를 여러 번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김유신과 당나라의 소정방이 이끄는 연합군에게 660(무열왕7)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죽은 뒤 귀족간의 세력 다툼으로 나라가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이 틈을 노려 당나라는 북쪽에서 신라는 남쪽에서 고구려를 공격하였습니다. 마침내 평양성은 완전히 포위되고 고구려의 보장왕은 668(문무왕 8)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하려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의 영토까지 엿보았습니다. 이에 맞서 신라의 문무왕은 당나라와의 전쟁을 시작하여 8년 뒤인 676년에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었습니다. 드디어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의 힘찬 발걸음 (충주 고구려비, 광개토대왕릉비)

 

산소와 절터, 향교 등 여러 곳에서 크고 작은 비석들을 보았을 것입니다.그렇지만 그 비석의 주인이 누구이고 언제 세웠는지, 무슨 내용을 썼고 왜 세웠는지를 생각하며 보지 않고 무심코 지나쳤지요? 하지만 관심을 갖고 보면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답니다. 우선 마을의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어요. 아주 옛날 누가 우리 마을에 살았고 언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가장 큰 세력을 가졌던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 신앙을 가지고 살았는지 알 수 있거든요. ! 그럼 이러한 비석 중에서 가장 오래됐고 고구려 사람들의 힘찬 발걸음을 느낄 수 있는 충주 고구려비와 광개토대왕릉비를 찾아가 볼까요?

 

충주 고구려비가 국보로 정해진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 비가 고구려비인 것이 확인되던 날 아니! 고구려가 충주지역까지!!” 삼국시대의 지도가 바뀌는 큰 발견이었지요. 충주 고구려비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고구려가 한강이북 지역까지만 진출했다고 알고 있었어요. ,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시이므로 고구려가 한강을 넘어 충주지역까지 진출하였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에요. 옛날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한반도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인 충주 고구려비의 발견을 해방 이후 고고학계의 3대 발견 중의 하나라고 이야기해요. 우물가의 빨래판이었던 돌이 국보로 정해진 까닭을 아시겠지요?

 

남한 내의 유일한 고구려비 - 충주 고구려비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

충주 고구려비

충주 고구려비는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있어요.

높이 144cm, 너비 55cm, 두께 37cm인 비석인데 국보로 정해졌어요.

19792월 충주의 지방사연구단체인 예성동호회에서 이 마을 입구에 있는 선돌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조사하게 되었대요. 처음엔 비 전체에 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 탁본을 하여도 글자를 해석하기가 어려웠대요.

오랜 세월이 흘러 돌이 닳기도 했지만 올록볼록한 이 돌이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빨래판으로 인기가 좋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돌이 고구려비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비에 쓰여 있는 글씨를 통해서예요.

비문을 해석해 보면

첫째,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이때 고려고구려를 뜻하고,

둘째,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 ‘제위(諸位)’, ‘사자(使者)’ 등 고구려의 관직 이름이 보이며,

셋째, 만주 집안시에 있는 광개토대왕의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이 보이고,

넷째, ‘신라매금’, ‘모인삼백’, ‘신라토내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이 나오기 때문이에요.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 - 광개토대왕릉비

이 넓은 만주 벌판이 우리 땅이었다니!……고구려 최전성기였던 5세기 지도를 보면 지금보다 몇 배나 땅이 넓은 것을 알 수 있어요.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영토를 많이 넓힌 아버지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어요.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동쪽(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시 통구지역)에 광개토대왕의 능과 함께 세웠지요.

높이가 639cm, 너비가 270cm, 두께가 335cm로 충주 고구려비보다 약 5배 정도가 커요. 아파트 3층 높이니까 어마어마하게 크죠. 충주 고구려비처럼 4면에 글자를 새겼고 모두 441,775자예요. 앞머리에는 건국시조인 주몽에서부터 광개토대왕까지 왕들의 계보와 업적이 적혀 있고, 본문은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과 경계지역을 돌아본 일들이 적혀 있으며, 끝머리는 무덤을 지키는 묘지기들의 이름이 쓰여 있어요. 광개토대왕릉비 한 글자 크기가 가로·세로 1415cm라니, 한번 상상해 보세요. 1,775자를 다 조각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까요?

 

돌에다 글씨를 힘들게 새긴 까닭은 뭘까요?

어떤 사건이나 흔적, 역사를 후세에 오래도록 전하기 위해 나무나 돌, 쇠붙이 따위에 글을 새겨 놓은 것을 비()라고 해요. 비는 만드는 재료에 따라 목비, 석비, 철비로 나누는데 우리나라에는 목비가 남아 있는 것은 없고, 거의 대부분이 석비예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목비는 불에 잘 타고 벌레나 비바람에 잘 썩어 보관하기가 힘들지만 석비는 재료인 화강암을 전국 어디서나 구하기 쉽고, 나무에 비해 불이나 다른 자연조건의 영향을 덜 받아 오랜 기간 동안 비석의 내용을 후세들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옛날 사람들은 돌을 늙지 않고 오래오래 살아가는 상징물로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누구나 비석을 세울 수 있었을까요? 주로 왕이나 스님, 지배층들만이 비석을 세울 수 있었답니다.

 

우리 마을에서 비석을 찾아봐요.

영토를 확장하고 왕위를 계승하고 나라를 통일하고. 이런 역사가 반복되는 순간에도 우리 마을에는 우리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고 계셨을 겁니다. 충주 고구려비나 광개토대왕릉비를 보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알 수 있듯이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마을의 묘비, 송덕비. 사당비 등을 통해서 우리 마을의 역사를 알 수 있답니다. 우리 마을에 비석이 있나요? 누구의 비석이지요? 언제 세워졌어요? 비석을 왜 세웠어요? 어떤 사람들이 참여했나요? ! 이제 우리 아이들과 함께 학교 근처의 비석을 찾아가며 실감나는 역사를 배워보는 것이 어떨까요?

 

하늘과 땅, 인간을 연결하는 우주축 (강릉 진또배기, 청주 용주사지 철당간)

 

마을 입구에서 긴 장대 끝에 앉혀진 나무오리를 본 적 있나요? 절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돌로 만든 두 개의 기둥을 본 적 있나요? 앞의 것은 솟대라고 하고, 뒤의 것은 당간지주라고 해요. 당간 지주는 당(깃발)을 매다는 간(기둥)을 세우기 위해 만든 버팀돌인데, 세월이 지나면서 당간은 거의 없어지고 당간 지주만 남은 거지요. 당간 지주는 더러 본 사람이 있겠지만, 솟대는 아마도 본 사람이 드물 거예요. 요즘은 보기 어려워졌으니까요. 솟대와 당간은 선사시대부터 하늘에 대한 우리 민족의 믿음과 생각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자료예요. 지금 우리는 하늘을 향한 솟대를 보고 기록조차 없는 먼 옛날 우리 민족이 어떤 신앙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고, 절집 앞 당간을 보고 이 땅 밖에서 생겨나 들어온 불교가 솟대로 대표되는 토착신앙과 어떻게 융화되었는지 알 수 있지요. 이런 중요성에 비해 대접은 모자라서 당간은 국보와 보물로 각각 지정된 것이 있지만, 당간이 세워지기 훨씬 전부터 만들어졌던 솟대는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없어요. 그래서 여기에는 우리나라 솟대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강릉 진또배기와 국보로 지정된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을 실었어요.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국보 제41)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충청북도 청주에 가면 시내 한가운데 우뚝 서있는 철당간을 볼 수 있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철당간은 많은 상가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런 경관을 안타깝게 여긴 시민들이 상가를 옮기고 넓은 광장을 만들어서, 지금은 청주시의 자랑이 되었어요.

만든 때는 962(고려 광종 13)이고 만든 사람은 당대등 김희일 등 지방 호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 밖에도 글을 짓고, 글씨를 쓰거나 새긴 사람들의 이름과, 당시 관직 명칭 등을 통해 고려 초기 이 지방을 장악한 호족 이름이라든지,

지방 관리를 뭐라고 불렀나 하는 것 등과 같은 당시 사회상을 생생하게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용두사지 철당간은 당간 가운데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것이지요.

당대등이라는 직책은 지금으로 치면 청주 시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 김희일이라는 사람은 서울에서 내려온 관리가 아니고 이 지역의 큰 호족이었어요..

고려 초기 서울에서 관리가 오지 않고 지역 사람을 중심으로 행정이 이루어졌다는 말은, 당시 중앙 정부가 지방 세력을 압도할만한 충분한 힘이 없었다는 걸 알려 주지요.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실력자가 당간 건립을 직접 지시했다면 이 지역 사람들이 총동원되어 일에 매달렸겠지요. 그러면서 당대등은 자기 힘을 서울이나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큰 공사를 빌미삼아 지역 주민들을 자기 뜻대로 부리면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을 거예요. 용두사지 철당간에 기록된 글을 통해 곧바로 알게 된 이런 사실들은, 고려 초기 정치 사회적 상황을 현대 사람들이 파악하는 데 아주 중요한 것이에요.

 

용두사지 철당간은 원래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용두사지 철당간을 보면 지금은 위 10단이 없어져서 원래의 정확한 모양은 알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옛날 용두사지 철당간의 끝에는 용머리가 있었고, 거기 줄을 달아 깃발을 매달지 않았을까 생각되고 있어요. 깃발을 달아서 여기는 부처님이 계시는 신성한 곳이라는 걸 나타냈겠지요. 높이 걸린 깃발은 멀리서도 잘 보이고 위엄 있게 보이지요? 아마 그때도 이런 뜻에서 당간을 더 높이, 더 크게 지으려고 애썼을 거예요. 지금 우리는 당간이나 당간을 세웠던 당간지주의 크기·높이를 보고, 그 때 이 건축물을 세운 사람들의 미의식과 사회적 힘을 짐작할 수 있어요. 이 당간을 세울 때 단 수는 30단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20단만이 남아있어요. 전해오는 말로는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짓는다고 가져갔다고 해요. 지금 높이는 12.7m인데, 처음 세웠을 때 높이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한 단이 63cm니까, 몇 층짜리 건물높이쯤 되는지 계산해 볼까요?

 

강릉 강문동 진또배기

경포 호를 아세요? 경포 호는 물이 맑기로 강원도에서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름난 호수지요. 이 경포 호와 동해안 바닷가 사이에 강문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어요. 이 마을에 긴 목을 하고 호수 쪽을 바라보고 있는 멋진 솟대가 있는데, 여기서는 이 솟대를 진또배기라고 불러요. 5m 정도 되는 긴 장대 위에 세 갈래로 갈라진 나뭇가지를 가로로 얹고, 각 갈래마다 썩 잘 만든 나무오리를 앉혔는데, 이 모습이 우리나라 여러 솟대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해요.

 

솟대에서, 새를 받치는 장대에는 무슨 뜻이 있나요?

옛날 사람들은 하늘과 땅, 땅속이 각각 다른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어요. 그리고 이 세 세계는 기둥으로 이어져 있어서 하늘에 있는 신이 이 기둥을 통해서 오르내린다고 생각했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땅에 뿌리를 박고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으며 자라는 나무를 이 세 가지 세계를 모두 이어주는 기둥으로 보고 신성하게 여겼는데, 나중에는 장대 역시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신뿐만 아니라 신과 관계된 것을 모두 신성하게 여기게 되면서 장대 자체를 숭배하게 된 것이죠. 이런 전통은 기독교에서 십자가나, 불교에서 탑과 불상이 가지는 뜻과 다를 바가 없어요. 지금도 강릉 단오제를 비롯한 큰 굿에서는 의식에 쓰는 나무가 흔들리면, 신이 내린 것으로 생각하지요.

 

솟대 위에는 무슨 새가 앉아 있는 걸까요?

솟대 위에 앉아 있는 새는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대부분 오리가 많아요. 왜 솟대 위에 오리를 앉힌 걸까요? 오리가 가진 어떤 특징 때문이었을까요? 옛날 사람들은 오리가 닭보다 크고 무거운 알을 많이 낳기 때문에 풍요를 가져오는 새로 생각했어요. 그리고 하늘과 땅·물을 오가며 잠수까지 하는 생활 모습을 보고, 오리는 지하 세계와 지상 세계를 모두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 먼 곳으로 여행하는 철새라는 성질은 인간 세상과 신이 사는 세계를 이어주는 심부름꾼으로 인식되었어요. 그밖에도 물새이기 때문에 불이 나는 것을 막아준다고 생각되기도 하지요. 이제 왜 솟대 위에 오리를 앉혔는지 아시겠지요?

 

문화창조와 보존의 산실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해인사)

 

해인사에 가보셨나요? 대부분의 절은 가장 높은 곳이나 중심이 되는 곳에 대웅전이나 대적광전이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 절은 대적광전 위, 제일 높은 곳에 장경판전이 있어요. 장경각이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곳도 아니면서 사찰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이유가 뭘까요? 그리고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까닭은 뭘까요?

그것은 바로 유네스코가 장경판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국보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해인사는 이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을 중심으로 공간배치가 이루어져 있다고 해서 법보 사찰이라고 부릅니다.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국보)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국보)

지금 우리가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재평가할 만한 중요한 문화유산이기도 해요.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은 그 경판의 갯수가 81258개나 된답니다. 그래서 팔만대장경으로 흔히 불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럼 이란 뭘까요? 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적어 놓은 글을 말하며 법문이라고도 합니다. 예를 들면 살생하지 말라, 욕심내지 말라 등의 교훈적인 것을 이야기로 엮어 놓은 거죠. 그리고 대장경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은 경장, 계율을 모은 율장, 불제자의 논설을 모은 논장 등의 불교 경전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경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제일 좋은 방법은 책을 많이 찍어서 사람들이 보게 하면 되겠죠. 그래서 나무판에 경을 새겨 넣었습니다. 이것을 경판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84천 법문이라고 하는데 그러고 보면 '팔만대장경'이란 이름 자체에서 당시 고려인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집대성했다는 자부심도 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언제 만들었을까요?

고려 사람들은 몽고와의 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무슨 이유로 팔만대장경을 만들게 되었을까요? 고려는 왕, 신하, 백성 할 것 없이 모두가 불교를 믿는 나라였으며, 온 나라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절을 짓거나, 탑을 세우거나, 불상을 세우는 등의 일이었어요. 이런 일이 생길 때 조금이라도 도와주면 극락왕생한다고 믿었던 것이죠. 돈이 있는 사람은 시주를 내고, 못 내는 사람은 부역을 해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 했어요. 이런 당시의 분위기에서 몽고군의 침입과 초조대장경과 속장경의 소실(1232, 고종19)로 인해 나라에서는 전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을 필요가 생겼던 것이죠. 그래서 4년 후인 1236(고종23)에 시작해 1251(고종38)까지 16년에 걸쳐 교정도감이라는 전담기구를 통해 완성된 것이 팔만대장경입니다. 전 국토가 몽고와의 전쟁으로 인해 피비린 내나는 상황에서 온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시작했던 일이 바로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제작이었던 것이죠.

 

왜 썩지 않았을까요?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국보)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국보)

대장경은 무려 750년이나 지난 지금도 썩지 않고 남아 있는데 그 이유는 경판에 쓰인 나무의 제작 과정과 이를 보관하기 위한 시설로 나누어 볼 수 있죠. 먼저 경판에 쓰인 나무의 제작 과정을 보면 산벚나무나 돌배나무를 바닷물에 3년 정도 담갔다가, 그늘에 말리는 과정을 되풀이해 뒤틀리거나 좀이 슬지 않도록 했으며, 경판의 장식과 보존을 위하여 옻칠을 하였어요. 옻칠을 하면 외부 습기를 흡수하거나 방출하여 항상 일정한 수분을 머금어 유지하며 표면에 견고한 막이 생겨 광택이 나고 오랫동안 사용해도 변하지 않아요. 옻칠 외에도 양끝에 구리로 만든 마구리를 대서 뒤틀림을 방지하였어요.

나무를 썩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통풍·습도·온도 등을 조절해줘야 합니다.

통풍을 살펴본다면 창 구조가 특이한데 각 벽면에는 위·아래로 두 개의 창이 이중으로 있어 아래창과 위창의 크기가 서로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건물의 앞면 창은 위가 작고 아래가 크며, 뒷면 창은 아래가 작고 위가 커요. 이것은 큰 창을 통해 건조한 공기가 건물 안으로 흘러 들어옴과 동시에, 가능한 한 그 공기가 골고루 퍼진 후에 밖으로 빠지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경판을 꽂아놓는 판가는 내부의 환기에 도움을 주는데, 두 장씩 포개 세워서 꽂혀 있는 경판의 독특한 배열방법이 굴뚝 효과로 대류를 촉진시키고 경판의 온도와 습도를 완충·조절하는 데 큰 기여를 합니다.

장경판전의 습도와 청결 유지를 위해 경판전 내부의 흙바닥에 숯과 횟가루, 소금을 모래와 함께 사용했습니다. 습기가 찰 때는 습기를 내보내며 자연적으로 습도를 조절해 경판의 변형을 줄일 뿐만 아니라 해충의 침입도 막을 수 있습니다.

'▣【동해자료실】▣ > ◈유네스코,국가유산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화유산  (0) 2025.10.12
문화유산  (0) 2025.10.12
문화유산  (0) 2025.10.12
문화유산  (0) 2025.10.12
문화유산  (0) 2025.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