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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동해건설산업 2025. 10. 12. 13:44

지식[공예분야]

금강산을 그려볼까요? (정선필 금강전도, 정선필 인왕제색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을 꼽으라면 누구나가 금강산을 꼽을 것입니다. 그리고 5백년 도읍지였던 한양에서 멋스러운 산을 꼽으라면 인왕산을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멋진 산의 300년 전의 모습을 조선 시대의 뛰어난 화가인 겸재 정선(16761759)이 그린 그림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금강전도인왕제색도가 그것입니다. 말 그대로 금강전도는 금강산의 전경을 그린 것이고 인왕제색도는 비온 뒤 구름이 거쳐 가는 인왕산을 그린 거예요. 이 두 그림은 정선이 그린 진경산수화(실제의 경치를 꼭 그대로 그린 그림) 중에서도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정선은 방안에 앉아서 상상으로 경치를 그리지 않고,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강산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계절과 날씨에 따라서 변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나타냈어요. 실제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그린 것이지요. 이것을 진경산수화라고 하는데, 특히 정선이 크게 유행시켰어요. 눈앞에 펼쳐진 자연을 보고 그린다는 것이 지금은 자연스럽겠지만 그때는 그렇지 못했어요. 그럼 정선 이전의 사람들은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요? 머릿속으로 상상한 산수화를 그리거나 중국의 유명한 시 구절 속에 나타난 풍경을 그렸어요. 또는 옛날 중국의 유명한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렸어요. 이런 그림을 관념산수화라고 하지요. ‘관념산수화가 아무리 잘 그린 그림이라도 그 속에 담겨 있는 풍경은 우리나라 것이 아니라 중국 것이었어요. 가보지도 못한 중국산을 그리워하며 그림으로 남겨봤자 무슨 소용이 있었겠어요? 이제부터는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해요.

 

정선필 금강전도

정선필 금강전도(국보)

정선필 금강전도

"금강전도"는 정선이 쉰여덟 살 때인 1734년 겨울에 내금강의 전체 모습을 만폭동을 중심으로 그린 그림이에요. 국보인 이 그림은 세로 130.7cm, 가로 59cm 크기이며, 먹으로 그림을 그리고 연하게 색깔을 칠한 수묵담채화예요.

정선은 얼마 전에 보았던 눈 덮인 금강산을 머리에 떠올리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동그랗게 원형으로 구도를 잡아 봉우리 하나하나를 정성들여 그렸어요. 날카롭게 솟아오른 봉우리는 수직으로 죽죽 내려 그었어요. 이렇게 그리는 방법을 수직준법이라고 하지요. 봉우리 사이사이에는 크기가 다른 여러 점들을 찍어서 소나무와 흙으로 된 산을 나타냈어요. 맨 꼭대기에 있는 비로봉은 피마준법으로 그렸어요. 피마준법이란 라고 하는 천의 올이 흐트러지듯이 부드럽게 그리는 화법을 말하지요. 산 둘레에는 엷은 푸른색으로 문질러 둥근 형태를 강조하면서 하늘 높이 솟는 느낌을 나타냈어요.

 

정선필 인왕제색도

정선필 육상묘도(보물)

정선필 육상묘도

정선필 인왕제색도(국보)

정선필 인왕제색도

[인왕제색도][금강전도]와 함께 조선 중기 정선이 그린 진경산수화 중에서 제일 뛰어난 작품이에요. 국보로 그 크기는 세로 79.2cm, 가로 138.2cm이며 종이에 먹으로 그린 그림이에요. 정선은 한양에 있는 인왕산 근처에서 살았어요. 1751년 정선이 일흔여섯 살 때 어느 여름날, 아침부터 날씨가 우중충하더니 갑자기 장대 같은 소나기가 퍼부었어요. 한참을 퍼부은 뒤 어느덧 빗줄기가 점점 가늘어지고 먹구름도 가시더니 인왕산에도 비가 개기 시작했어요. 비를 흠뻑 먹은 인왕산 화강암 봉우리는 평상시보다 더 짙어 보이고 소나무의 짙푸른 초록색은 더욱 싱그러워 보였어요. 더구나 길게 띠를 이루면서 자욱이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점점 위로 번져나가고 있었어요. 정선은 이 장면을 놓칠세라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어요. 먹물 가득 묻힌 큰 붓을 뉘여서 북북 그어 내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여러 번 덧칠했지요. 이렇게 먹을 자꾸만 여러 번 칠해서 독특한 맛을 내는 것을 적묵법이라고 해요. 무엇을 그린 것일까요? 바로 깎아지른 듯이 높고 커다란 바위였어요. 흰 바위를 거꾸로 검푸르게 나타내고 물안개와 소나무를 희게 그리니까 비개인 인왕산 모습이 더욱 선명해 보였어요. 같은 인왕산을 그렸어도 강희언(17381782)이 그린 [인왕산도]는 정선 그림과 아주 달라요. 정선이 인왕산을 그 특징만을 살려서 과감하면서도 장엄하게 표현했다면, 강희언은 인왕산의 모습을 보이는 그대로 드러내어 골짝, 성곽, 마을까지 자세히 그렸어요. 마치 인왕산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라고 설명하고 있는 듯 하지요.

 

우리나라 그림에서 여백은 어떤 역할을 할까요?

정선의 그림을 얼핏 봐서는 그림을 그리다 만 것처럼 보이죠? 요즘은 화면을 꽉 채워서 색칠하기 때문에 옛날 그림을 보면 이해하기가 힘들 거예요. 옛날 사람들은 꽉 찬 곳이 있으면 빈 곳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 빈 곳을 여백이라고 하는데 꽉 찬 먹색과 흰 공간인 여백에서 우리는 음과 양의 조화를 볼 수 있어요. 옛날 사람들은 선만으로도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빈 공간을 그냥 두어서 여백의 미를 살렸습니다.

 

그림으로 보는 부처님 (탱화)

 

직지사대웅전삼존불탱화

어떤 그림이든 그 속에는 많은 이야기와 생각이 들어 있어 그것을 보며 사람들은 여러 가지 느낌을 갖게 되고 때로는 깊은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불교에서도 불교의 내용을 쉽게 표현하고 널리 전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을 불화라고 합니다. 불화는 종류가 매우 다양한데 그 중에서도 천이나 종이 바탕에 그림을 그린 다음 족자나 액자로 만든 불화를 탱화라고 합니다.

탱화는 만드는 방법이 다른 불화에 비해 훨씬 쉽고, 벽화(벽에 그려진 그림)처럼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옮길 수 있으므로 밖에서 불교 행사를 열 때 걸어 두고 사용할 수 있어서 많이 그려졌답니다. 특히 조선 후기에 들어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쟁으로 파괴된 절들을 새로 고쳐 지으면서 불화가 많이 그려졌는데, 이 때 주로 이용한 방법이 탱화입니다. 그래서 현재 절에 있는 불화의 숫자는 엄청납니다.

 

언제부터 그려졌을까요?

불화는 대부분 인도에서 불교가 생긴 이후 그려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그린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불화는 4세기경(삼국시대 때)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매우 사실적 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삼국사기신라 화가 솔거가 황룡사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렸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황룡사 벽에 그린 늙은 소나무가 진짜 살아있는 소나무인 줄 알고 지나가던 새들이 앉으려다 부딪혀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그림의 색깔이나 모양이 사실적이며 섬세하고 아름다웠음을 말해줍니다. 그 시대의 많은 그림들이 불교와 관련된 것으로 보아 불화는 이미 그 때부터 그림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탱화는 어떻게 그려졌을까?

탱화는 원래 한 가운데 부처님이 크게 그려져 있고, 주변에 그와 관련된 보살들을 조그마하게 그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시대나 지역에 따라서 그 모습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럼, 탱화가 시대별로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 특징을 비교하며 살펴볼까요?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는 무덤의 벽이나 절의 벽에 불교와 관련된 그림을 그린 데 비해, 불교가 국교(나라의 종교)가 되었을 만큼 불교의 세력이 커졌던 고려시대의 탱화는 주로 비단 바탕에 그림을 그렸고, 그 표현방법도 매우 뛰어나 예술적으로 훌륭한 것이 많습니다. 이것은 일반 백성보다는 나라를 다스리는 귀족 중심으로 불교가 발달하였던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불교는 평범한 일반 백성들이 중심이 되어서 부처님뿐 아니라 여러 보살들을 두루 모시는 신앙으로 발전시켰으므로, 이 시기의 탱화는 화려하고 귀족적이었던 고려시대의 탱화에 비해 매우 소박하고 수수한 느낌이 나도록 그려졌으며 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삼베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서 일반 백성들의 회화(그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또한 부처님과 보살님이 아래위로 엄격하게 구분되어 그려졌던 고려시대의 2단 구도가 깨지면서 보살들이 부처님의 몸체 윗부분까지 올라오도록 그렸고, 색깔도 고려시대에 쓰던 금색의 사용이 줄어들었고, 여러 가지 색깔을 고루 이용하여 부처님의 세계를 화려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어떤 가치가 있을까?

탱화는 부처님의 모습이나 불교의 내용을 상상하여 그림으로 그려서 쉽게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그려진 그림입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을 통해 그 시대에 믿었던 불교의 모습이나 내용을 알 수 있고, 불화 속 부처님의 모습이나 선의 굵기 등은 그 시대 미술의 특징을 알고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특히 불교가 힘을 크게 떨쳤던 고려시대의 불화는 같은 시대의 중국인들까지도 칭찬할 정도로 화려한 색깔과 자세한 무늬 등이 매우 우수하여 고려시대의 여러 가지 미술 작품 중 최고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탱화는 단순히 절을 꾸미기 위해서만 그려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은 탱화를 보거나 그리면서 나라를 구하려는 애국심을 키웠고, 모든 사람들이 평안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랐으며, 현재의 어려움을 참을 줄 아는 인내심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탱화는 단순히 불교에 관한 그림이라기보다는 조상들의 지혜와 슬기, 따뜻한 마음이 듬뿍 담겨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인 것입니다.

 

숨은그림찾기 (고령 바위그림)

 

인간이 그림을 그린 역사는 매우 오래 되었는데 그것은 사람의 생각을 가장 쉽게 나타낼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자기의 생각을 아무 곳에나 그렸지만 점차 시간이 흘러 갈수록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해 도구를 이용해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곳에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인류의 그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구석기시대 동굴 벽화로 그때 살았던 사람들이 먹잇감으로 사냥하던 들소, 순록 등을 동굴의 벽에 쉽게 지워지지 않도록 하여 광물성 물감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히 오래 전에 바위나 암벽 등에 새긴 그림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것은 모두 종이나 천에 그린 것보다 훨씬 오래된 것입니다. 이렇게 바위나 암벽 등에 뾰족한 도구를 사용하여 새기거나 쪼아서 그린 그림을 바위그림(암각화)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바위그림에는 어떤 것이 있으며, 그 특징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정선필 금강전도

고령 장기리 암각화(보물)

고령 장기리 암각화

경상북도 고령에서는 양전동과 안화리에서 각각 바위그림이 발견되었습니다.

양전동 암각화는 전체의 높이 3m, 너비 6m의 높은 바위에 동그라미모양, 십자모양, 방패자루 모양 등 여러 가지 문양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 암각화는 지금으로부터 약 2,3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므로 오랜 시간 동안 비와 바람에 바윗면이 깎이고 닳아서 무엇을 새겼는지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그 모양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안화리 바위그림은 양전동 바위그림이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산기슭의 절벽 여러 곳에 3040정도 크기의 방패모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쪼아서 파는 방법으로 그렸는데 양전동 바위그림에 비하여 매우 거칠고 마무리가 제대로 안된 상태입니다.

 

, 언제, 어떻게 그려졌을까요?

바위그림이란 주로 바위나 암벽 혹은 고인돌을 덮는 돌 위에 새기는 그림으로 안전한 생활과 사냥이 잘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다른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짐승이나 물고기를 잡아먹는 생활을 주로 하던 때는 사냥을 나가서 아무 사고도 당하지 않고 또한 배불리 원하는 만큼 짐승과 물고기를 잡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냥하는 방법이나 모습을 많이 그렸지만, 농사를 짓고 살던 시대에는 풍년이 드는 것도 또한 흉년이 드는 것도 모두 하늘과 땅에 있는 신이 결정한다고 생각하여 이들 신에게 풍년이 들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 하였습니다. 바위그림은 그리는 방법에 따라 새겨서 그리는 방법과 새긴 곳을 물감으로 덧칠하는 방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새겨서 그린 바위그림이 발달하였는데 그 방법도 다양하여 처음에는 돌을 쪼아서 그리다가 돌을 갈아서 그리기도 하였으며, 기술(도구)이 발달하면서 칼이나 송곳 같은 철제품의 끝부분으로 선을 새겨서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어떻게 감상하여야 할까요?

바위그림은 대부분 그림을 그린 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바라고 원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거나 또는 그 특징만을 살려 특별한 무늬로 새겨 놓았는데 너무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서 그 모습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탁본(바위그림 위에 화선지와 같은 얇은 종이를 옷솔이나 구둣솔로 두드려서 붙인 다음 솜방망이에 먹물을 묻혀서 그림을 찍어내는 방법)으로 그 정확한 모양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무늬 중에서도 특히 방패 모양의 무늬가 많은데 이것은 여자의 모습을 특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곡식의 풍요로움과 많은 자손들이 아무 탈 없이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동그라미 모양은 태양을 표현한 것인데, 이것은 단지 우리가 여러 가지 자료를 보고 추측한 것이지 정확히 맞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위그림은 쉽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속에서 옛 선조들의 순수하고도 진실한 생활 모습을 가슴 속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바위그림을 깊은 관심과 애정으로 보살펴서 우리 후손에게 길이길이 전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아직도 우리 주변 어딘가에는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을 견뎌내며 어렵게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발견되지 않은 바위그림이 있을 것이므로 우리가 바위그림에 관심을 갖고 살핀다면 더 많은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상들의 그림에 숨은 뜻 (민화)

 

우리나라에는 어느 민족보다 우수한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민화이지요. 민화란 말 그대로 백성들에 의해 백성들의 요구로 그려진 그림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외형은 의식하지 않고 생각과 정감을 꾸밈없이 표현해 나간 진실한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민화는 소박하고 담백한 표현이 있으며, 그 속에는 익살을 통한 회화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또한 한국인의 정신과 마음을 솔직하고 거짓 없이 진실하게 표현한 그림인 까닭에, 잘난 척하지 않고 일반 백성들과 호흡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민화란 무엇인가요?

민화란 한마디로 생활공간의 장식을 위주로 한 일상생활과 풍습에 따라 그려진 실용적인 그림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 후기에 특히 일반백성들의 그림으로 유행하였습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이를 속화라고 하고, 여염집의 병풍, 족자 또는 벽에 붙여진다고 하였습니다. 대부분이 그림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무명화가나 떠돌이화가들에 의해서 그려졌으며, 그림을 그린 화가의 낙관(이름과 호가 새겨진 도장)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주로 서민들의 일상생활에 얽힌 얘깃거리나 대수롭지 않은 그림만을 그렸죠. 그래서 예술적이기보다는 같은 내용의 그림이 계속적으로 되풀이하여 그려짐으로써 발전 없이 계승되었습니다.

 

민화는 언제부터 그려졌나요?

민화는 이 땅에 우리 조상들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민화의 시초는 고구려시대의 벽화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지만 지금 남아있는 것은 없고 다만 불교의 그림에서 명맥만 이어져 오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야 그 빛을 발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민화가 서양이나 중국에서처럼 감상위주가 아닌 생활공간을 꾸미는 역할만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민화의 특징

호랑이를 그린 민화

호랑이를 그린 민화

민화는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민화는 장식을 하기 위해 그린 그림입니다.

둘째, 민속신앙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러므로 민화는 실용적이고 종교적이며 예술적인 면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셋째, 민화에는 민간종교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민화 중에는 토착적인 무속과 결합된 기원과 믿음의 의미가 부여된 것들이 있습니다. 이를 세화라 하며 매우 널리 그려졌습니다. 그 대표적 예가 호랑이 그림입니다.

넷째, 민화는 일반 서민들의 마음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다함께 느낄 수 있는 쾌감을 바탕으로 그리고 감상하고 즐겼던 그림입니다. 민화가 서민들의 생활과 함께 숨 쉬면서 그려졌기 때문에 실용성과 대중성이라는 특징을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민화는 본그림입니다. 민화는 그 주제와 표현에 있어서는 그림그리기를 직업으로 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철저히 흉내 내고 있으면서도 담아내는 내용이나 표현기법은 다릅니다. 이는 민화가 본그림이라고 하여 일정한 본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가운데 점차 오늘날 우리가 대하는 특징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또한 민화는 같은 주제를 되풀이 했어도 모두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 있고, 꾸밈없이 솔직하고 소박한 그림입니다. 그리고 다정스럽고 따뜻한 그림이며, 자유로운 형태와 구도로 담대하게 그린, 익살과 웃음이 담긴 재미있는 그림입니다.

 

민화의 기법상의 특징

민화는 전문적인 화가보다는 그림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한 비전문적인 화가가 그렸기 때문에 정해진 화법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민화는 주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단순한 사실 묘사에 머무르지 않고 어떤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독특한 공간구성 방법을 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공간을 다양하고 자유롭게 펼치고 있습니다. 하나의 물체와 대상을 완전하게 표현하기 위해 화면에 전면을 동시에 배치해 놓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는 서양 근대미술에서의 입체파 조형원리와 비슷합니다.

둘째, 민화는 색채를 강렬한 색상대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민화에는 어둡고 칙칙한 색이 거의 없고 모든 사물이 밝고 명쾌합니다. 민화의 색은 강렬하고 원색적이며 알록달록합니다. 민화가 지니고 있는 원근법, 색채, 구도 등의 불합리성이 바로 시간과 공간, 그리고 현실을 초월한 민화의 멋이고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복합성과 반복성이 두드러집니다. 복합성은 그림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가 일치하는 것이면 관련된 것들을 모두 하나의 화면에 묘사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을 묘사하는 시점이나 표현방법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복성은 주술적인 면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 똑같은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심리적 만족감이나 성취의 의지를 보이는 것은 모든 주술적 행위의 일반적인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반복성은 주술적 효과 이외에도 리듬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민화의 유형

민화는 50여 가지의 형태가 있습니다. 50여 가지로 헤아려지는 형태는 오랜 역사를 통하여 생겨나고 없어지기도 하였으며 또 시대의 흐름을 따라서 변천했습니다. 민화의 형태가 생겨나거나 없어지는 것은 생활내용과 생활양식의 변화에 있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민화는 우리 민족의 생활과 밀착되어 있었던 생활미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화의 소재

민화에 그려진 소나무는 장수를 상징하는데 그 배경에 구름이나 해가 많고 소나무 아래에는 학이나 사슴, 불로초, 괴석 등 다른 장수 생물들을 함께 배치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민화에서 볼 수 있는 바위의 모습은 밋밋하거나 단순한 것보다는 생김새마다 모양을 내서 멋진 모습을 하고 있으며, 때로는 어떤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생각해 낼 수 있게끔 그려진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호랑이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무속 신에 대한 숭배를 위해 그린 그림, 윤리와 도덕을 강조한 그림, 책거리 그림 등이 있습니다.

또한 민화에 보이는 풍속화는 주로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서민 생활을 소재로 하여 풍습, 세태, 연중행사 등 여러 가지 생활상과 자연의 정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으로 친근감이 있는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습니다. 풍속도는 서민이 성실하게 살아가는 생활 모습과 일하는 모습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주변의 배경을 크게 생략하고 인물 중심으로 구성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전해내려 오는 신화·전설·민담 등을 줄거리로 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거나 여러 가지 나무와 꽃, 물고기를 그린 그림이 우리 민화에 많이 있습니다.

 

민화의 다양한 재료

민화는 그림의 크기와 화폭의 모양이 자유로우며, 장지·창호지·화선지·모조지·삼베·비단·광목·나무 등 소재의 구분이 없이 그려졌습니다. 물감에 있어서도 광물성 물감에서부터 화공들이 직접 만든 것으로 보이는 식물성 물감, 유화 물감 및 페인트로 그린 그림도 있으며, 붓으로 그린 그림, 손가락으로 그린 그림, 가죽붓, 버드나무 가지, 불에 달군 인두로 그린 그림까지 재료에 제한을 받지 않았습니다.

 

도자기로 읽는 시대의 사상과 미의식 (빗살무늬토기, 청자, 백자, 분청사기)

 

도자기는 현재 남아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 중에서 매우 많은 부분을 차지해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0만여 점 중에 34만여 점이 토기와 도자기라고 하니 그 양을 짐작하시겠죠? 어디 그뿐인가요? 토기는 신석기시대부터, 도자기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남아 있잖아요? 이렇게 오랜 기간에 걸쳐 꾸준히 시대별 문화의 특징을 함축해서 보여주는 유물로 도자기만 한 것도 없어요. 신석기시대하면 빗살무늬토기, 청동기시대엔 민무늬토기, 삼국시대에는 질그릇, 고려시대의 청자, 조선시대의 분청사기와 백자가 있다는 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도자기는 사람들의 생활에 직접 쓰였다는 점에서도 중요해요. 그릇으로 쓰였으니 지체 높은 사람들이나 그렇지 못했던 사람이나 남녀노소 불문하고 썼을 것 아니에요? 그래서 도자기를 잘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그릇을 썼던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보이게 되는 거예요. 도자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들이 많지요? 그럼 각 시대를 대표하는 우리 도자기를 알아볼까요?

 

빗살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에요. 오른쪽 사진은 서울 암사동에서 출토된 것으로 높이가 40cm예요. 겉면에 빗살무늬를 찍거나 그어서 새겨 넣고 점, 선 따위 무늬를 섞어 만들었어요. 그릇 모양이 마치 팽이처럼 생겼죠?

밑이 길쭉하고 둥근 것이 다른 그릇하고 뚜렷하게 구별되고 있어요.

이 토기처럼 밑이 둥글고 길쭉한 토기는 중서부 지방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서울 암사동 빗살무늬토기는 청천강이남 곧 한강·대동강 주변에서 많이 발견되는 형태죠.

빗살무늬토기는 밑이 둥글어서 똑바로 세울 수가 없는데 어떻게 사용했을까요?

이 토기는 땅에 파묻고 쓰던 그릇이에요. 지금의 항아리와 같이 수렵물이나 채집을 통해 얻어진 곡물들을 저장하는데 쓰였어요.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국보)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이 병은 우리가 흔히 상감청자하면 떠올리는 것이에요. 이 매병은 어깨 부분이 커서 볼륨이 대단하죠? 그릇 선이 매우 날씬한 곡선을 그리면서도 밑 부분을 살짝 밖으로 하여 안정감을 주고 있어요. 빗살무늬토기가 시골에 사시는 할머니 같다면 청자는 화사하게 차려입은 도시의 세련된 여인 같다고 할까요? 이 그릇을 사용했던 사람들이 굉장히 귀족스럽고 화려한 생활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도자기 표면의 학과 구름무늬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굉장히 율동감이 넘쳐 보여요. 그 이유는 원안의 학은 위로, 원밖에 학은 아래로 엇갈리게 그려 시선을 아래위로 두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에요. 높이 42.1cm, 입지름 6.2cm, 배지름 24.5cm, 밑지름이 17cm인 이 병은 12세기에 만들어진 고려청자의 대표적인 작품이에요. 현재 국보로 지정돼 있어요.

 

분청사기 음각어문 편병

분청사기 음각어문 편병(국보)

분청사기 음각어문 편병

이 병은 배 부분이 납작하여 부피가 줄어들었지만 투박한 그릇 모양과 물고기, 모란무늬를 시원스럽게 표현하여 재치 있고 희망에 차 있는 청년을 보는 듯하지 않나요? 이 분청사기는 그릇표면에 흰 흙을 두텁게 칠한 다음 그 위에 물고기와 꽃을 선으로 새겼어요. 이런 그릇을 조화분청사기라고 해요. 분청사기조화어문편병은 조선시대의 분청사기로 높이 22.6cm, 입지름 4.5cm, 밑지름 8.7cm예요. 국보로 지정돼 있지요.

 

백자 철화매죽문 항아리

백자 철화매죽문 항아리(국보)

백자 철화매죽문 항아리

높이 41.3cm, 입지름 19cm, 밑지름 21.5cm인 조선시대 백자 항아리입니다. 국보로 지정돼 있어요. 이 항아리는 경사진 목 부분에서 어깨로 풍만하게 벌어졌다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넉넉한 느낌을 주고 있어요. 마치 마음이 후덕한 선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요? 몸체의 한 면에는 대나무를, 다른 한 면에는 매화등걸을 그렸는데 한 폭의 그림을 그린 듯 한 수법이 아주 뛰어난 작품이에요. 이런 형태는 16세기 조선 백자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도자기의 그림이 흑색과 흑갈색을 띠고 있는데, 그것은 철에서 피어난 녹을 주성분으로 하는 붉은색 흙을 붓으로 찍어 그렸기 때문이에요. 이런 그릇을 철화백자라고 해요.

 

토기, 자기, 분청사기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토기는 질그릇(도기)의 일종이고 청자·백자·분청사기는 자기를 말하죠. 토기는 500℃∼800의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구운 그릇을 말하는데, 그릇의 표면에는 우리들 집에서 사용하는 그릇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질막이 없답니다. 자기는 1,300전후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그릇이지요. 그릇이 단단할 뿐 아니라, 표면에 반짝이는 유리질막이 있어요. 청색의 유약을 입히면 청자, 백색의 유약을 입힌 것을 백자라고 하지요. 청자보다는 백자를 만드는 흙의 순도가 높고 굽는 온도도 높아요. 청자는 1,280에서 구워지고 백자는 보통 1,300에서 구워져요. 분청사기는 청자에다 백토를 발라 구운 것이지요. 우린 흔히 사기는 왠지 자기보다 질이 떨어지고 굽는 온도도 낮은 그릇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 사기라는 말은 자기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에요. 분청사기는 결코 청자나 백자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우리 도자기예요.

 

왜 도자기의 색이 다르게 나타나나요?

도자기의 색은 그릇을 구울 때 산소가 있느냐 없느냐, 그리고 흙과 유약(잿물)에 철분이 얼마나 포함되었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도자기를 구울 때 산소가 많이 공급산화번조酸化燔造되면 흙이나 유약 내 철분이 모두 산화되고 녹슬어 산화제이철이 되지요. 그러면 그릇은 갈색을 띠게 되요. 빗살무늬토기는 땅에 구덩이를 파고 별 특별한 장치 없이 장작불로 구운 그릇이니까 갈색이나 흑갈색을 띠게 되는 거예요. 빗살무늬토기를 굽던 솜씨는 거듭 발전해 원삼국시대에 가면 산소가 들어갈 수 없도록 막아버린 밀폐된 가마를 이용해 높은 온도로 구울 수 있는 기술로 축적되지요. 밀폐된 가마는 도자기를 구울 때 산소를 차단하게 돼요. 이런 방식을 환원번조(還元燔造)라고 하는데 청자와 백자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렇다면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도자기의 색은 무엇 때문일까요? 조선시대 사람들이 청자의 푸른색을 좋아했다면 백자가 아니라 청자가 계속 만들어졌을 텐데, 그렇다면 고려시대 사람들에게 푸른색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왜 조선시대 사람들은 흰 그릇을 선호했을까요?

고려청자의 빛깔은 꿈결 같은 아득함, 끝없이 펼쳐진 세계를 생각나게 하지요. 고려청자가 보여 주는 세계는 고려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불교 세계 그 자체였어요.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살지 말고 다가올 미래를 위하여 진리에 따라 살아가라는 가르침이었어요. 불교의 가르침은 고려시대 사람들을 현실의 세계보다는 다음 세계를 꿈꾸게 했어요. 모든 것이 맑고 깨끗한 기쁨이 있는 미래의 세계가 바로 청자가 보여주는 무한의 세계라고 본 것이지요. 조선시대의 벼슬이 높은 사대부들은 흰 백자를 좋아했어요. 흰색은 순결함과 검소함을 상징하지요. 이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성리학의 세계와 일치하고 있어요. 성리학이란 무엇보다도 검소하고 질박한 것을 생활의 가르침으로 추구하고 동시에 지상의 삶에서 모든 것을 구하는 것이에요. 그러한 가치관을 추구한 사대부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검소·질박·결백함이지요. 조선시대에 백자가 유행한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벼슬 높은 사대부들이 흰색을 좋아한 것과 관련 있어요.

 

각 시대의 사상을 나타내는 도자기의 무늬

빗살무늬토기의 빗살무늬는 강렬한 햇살이나 물고기의 뼈 모양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고 그 외 여러 현상을 추상화하여 표현한 것이에요.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토기에 그런 무늬를 새기면서 곡식이 잘 자라기를 바라고 물고기가 많이 잡히기를 기원했어요. 왜 이런 것들을 그릇에 표현했을까요?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는 단순히 그릇의 개념만이 아니라 주술적인 개념도 갖고 있어요.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에 보이는 학과 구름의 그림을 일컬어 운학무늬라 합니다. 학 자체가 신성한 동물이라는 점에서 자주 이용하였을 뿐 아니라, 푸른 그릇 표면을 하늘로 생각했어요. 청자의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학과 구름은 고려시대 사람들이 바라는 영원한 세계를 그릇 위에 그린 것이에요. 운학무늬가 가지는 성격은 청자의 푸른 빛깔의 성격, 즉 고려시대 사람들 마음 구석구석까지 파고든 불교 사상에서 나온 것이에요. 불교를 나타내는 또 다른 문양은 바로 연꽃잎무늬예요. 청자상감운학문매병뿐만 아니라 고려청자의 많은 경우에서 연꽃잎무늬가 깔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고려인들은 진흙탕 속에서 피어오르는 연꽃이야말로 불교의 가르침이라 생각했어요. 연꽃잎무늬는 초기부터 후기까지 고려청자의 주소재가 되었어요.

분청사기 음각어문 편병의 물고기문양은 아주 특이하지요? 물고기와 모란을 표현한 간략한 선은 너무나 자유롭고 거꾸로 선 물고기 모습은 해학적이어서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예요. 물고기와 모란 문양은 분청사기에서 많이 나와요. 대개 물고기는 처음에는 연잎과 연못 속의 물고기로 나타나는데 그러다가 차차 연꽃과 물고기가 나오고 다음에는 분청사기조화어문편병처럼 물고기만 등장하게 되지요. 모란 잎은 간략하고 대범하게 표현됐어요. 물고기는 보통 다산(아이를 많이 낳는 것)을 상징하고 모란은 부귀와 번창을 의미해요. 고려시대 사람들이 미래 세계를 중시했다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현실 세계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청자의 문양이 푸른색 바탕 위에서 그 뜻이 살아나듯이 백자의 문양은 흰색 바탕에서 살아나요. 흰색은 순수하고 결백함을 상징하는 색으로 조선의 사대부들이 선호하던 색이었어요. 흰색은 유학이라고 하는 성리학적 세계와 잘 어울렸어요.

백자 철화매죽문 항아리에서 보이는 대나무와 매화는 난초, 국화와 함께 사군자로 불려요. 조선 초기 사대부들이 선비의 정신을 상징하는 소재로 즐겨 그렸지요. 백자 철화매죽문 항아리의 대나무는 몰골(沒骨)이라는 기법으로 그렸는데 고도로 전문화된 매우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고 있어요. 다른 면에는 아랫부분에 문양이 치우치는데 굵은 매화 등걸이 굽이치는 가운데 옆으로 가는 곁가지가 솟아나 있어요. 이러한 문양들은 당시의 회화작품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소재들이죠. 조선후기로 넘어가면 그릇의 문양으로 십장생, 또는 까치와 호랑이 등의 민화가 그려지는데 이는 일반 사람들의 생각이 높아지고 잘 살게 된 사회 분위기가 반영되었기 때문이에요.

 

상감기법이란 어떤 것일까요?

상감이란 무늬를 넣는 방법을 말해요. 초벌구이한 그릇 표면에 원하는 무늬를 새깁니다. 그리고 흰색의 흙(백토)이나 붉은색의 흙(자토)을 그 홈에 메우지요. 다 메운 후 그릇표면을 매끄럽게 다듬고 유약을 발라 구우면 백토는 흰색으로, 자토는 검은색으로 나타나게 돼요. 생각보다 간단하죠? 상감이라는 기법은 이미 중국에서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금속공예에 사용되던 방법이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어왔던 수법이지요.

그렇다면 상감이라는 기법이 특별한 기술도 아닌데 왜 상감청자가 유명할까요? 그건 도자기에 상감기법을 응용해 만들어 냈다는 데 있어요. 상감청자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없는 우리만의 독특한 기법이에요. 그러나 진짜 상감청자가 위대한 이유는 그런 뛰어난 착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낱 그릇에 불과한 청자가 수백 년을 살았던 사람들의 꿈과 삶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영혼과 마음에 울려퍼지는 소리 (종에 그려진 문양만 봐도 시대가 보여요)

 

노래 속에 땡땡땡 이란 종소리가 우리 종소리가 아니라 서양 종소리라는 건 아세요? 우리 종은 뎅∼∼∼ 하는 소리를 내요. 땡땡땡 소리가 조급하다면 뎅∼∼∼은 여운이 있고 깊은 소리지요. 우리 종소리가 가득한 학교를 한번 상상해 보세요. 여유로움이 학교 전체에 흐르고, 우리 민족이 가진 정서를 이끌어내는 편안함과 아름다움을 매일같이 느낄 수 있겠죠. 그리고 마음 속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듯한 소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유를 찾고 싶어 할걸요. 그러다 보면 우리 음향과 금속 과학기술에 대해 좀 더 쉽고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예요. 학교종이 처음부터 우리 종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무척 아쉽죠. 우리 이제부터라도 바꿔나가요. 그럼 우리 종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해요.

 

성덕대왕신종,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 남양주 봉선사 동종

성덕대왕신종(국보)

성덕대왕신종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국보)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

남양주 봉선사 동종(보물)

남양주 봉선사 동종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불교를 믿어왔기 때문에 종이 아주 많아요. 문화재로 지정된 것만 해도 국보가 4, 보물이 17(2000. 2월 현재)점이나 된다고요. 그중에서 각 시대를 나타내는 종을 중심으로 살펴봐요. 국보인 성덕대왕신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종으로 알려져 있어요. 전체 높이는 3.7m이고 그 무게도 20톤이 넘어요. 이렇게 커다란 크기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균형미로 안정감이 있으며, 또한 종을 장식한 화려한 비천상과 종을 매다는 부분의 용조각, 세련되고 정교한 여러 문양은 우리나라 종이 가진 아름다움을 모두 보여주고 있어요. 그래서 이후에는 이 종을 기본형으로 해서 종을 만들었어요.

통일신라의 경덕왕은 아버지인 성덕대왕을 위해 이 종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해요. 아버지를 기리는 간절한 마음이 담긴 소리, 백성들이 듣고 감동과 힘을 느낄 수 있는 소리는 이 종을 만드는 가장 큰 목적이었지만 어려움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요? 경덕왕은 종이 완성되는 걸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며, 아들인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을 했어요.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고, 상원사동종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종이 가진 양식을 우리에게 잘 말해주지요.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은 고려시대 초기인 1010년에 만들어졌어요. 국보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하고 있어요. 전체 높이 1.3m이며, 종에 그려진 문양과 전체 형태는 신라종과 비슷해요. 다만 용뉴(용의 머리 모양으로 만든 고리) 부분에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점과 비천상이 합장을 하고 있는 것, 만든 때와 장소를 알려주는 글씨를 위패 모양의 틀 속에 써놓은 것은 신라종과 구별되는 고려만의 특별한 양식을 보여주는 거예요.

보물 남양주 봉선사 동종은 전체높이 2.3m, 입지름 1.54m로 조선시대 종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모양을 자세히 살펴볼까요? 이전까지 보이던 음관이 없으며, 용뉴는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어요. 아래에는 보살상이 연꽃을 들고 서 있어요. 몸통 부분은 가운데에 굵은 선 한 줄과 약간 가는 두 줄의 선이 둘러져 있고, 아래에 글씨를 가득히 적어 놓았어요. 이전시대 종과는 아주 다른 점이 많이 있지요. 1469년 정희왕후가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봉선사를 짓고 종도 함께 만들었어요. 그런데 좀 이상하죠. 조선은 유교 국가인데 왕을 위해 절을 지었다니 말이에요. 그건 유교는 정치 이념이고 실제 종교 역할은 불교가 했다는 걸 말해요.

 

종에 그려진 문양만 봐도 시대가 보여요.

성덕대왕신종에서 가장 화려한 문양을 찾아보세요. 하늘을 날아오르는 천인의 모습을 그린 비천상이 가장 눈에 띄지요. 생동감이 넘치는 이 문양은 종을 만든 때가 신라라는 걸 말해요. 그런데 왜 하필 비천상이냐고요? 불교에서 비천상은 천상(하늘 위)을 상징한다고 해요. , 그런데 고려시대 종인 천흥사 종에도 비천상이 새겨져 있네요. 그럼 어떻게 구별 하냐고요? 숫자를 세어 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신라시대는 비천상이 4구이지만 고려시대는 2구 밖에 없어요. 그리고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은 비천상이 새겨져 있지만 고려시대 많은 종에는 삼존불이 합장하고 있거나 앉아 있는 보살상이 있어요.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합장하고 서 있는 보살상이 나타납니다. 보살은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온 분이지요. 조선시대는 구별하기가 아주 쉬워요. 남양주 봉선사 동종을 보면 종 위쪽에 있는 종고리의 용이 두 마리이고 음관이 없어요. 또한 종의 몸통 중간에 문양 띠가 나타나지요. 이는 고려 말부터 중국종이 들어오면서 신라시대부터의 한국종 형식에 중국종의 요소가 더하여진 결과랍니다. 그런데 왜 시대별로 문양이 달라지는 걸까요? 그건 종속에 담긴 불교와 사람들 생각이 달라지고 또한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기 때문이에요. 어때요? 이제 그 문양만 보고도 어느 시대 종인지 알 수 있겠죠.

 

우리종과 외국종은 어떻게 다를까요?

우리 종 구조와 명칭을 나타낸 그림을 보면서 조금은 낯선 부분과 이름을 익혀보도록 해요. 앞으로도 계속 종의 각 부분 이름이 나올 텐데 그림을 보면서 확인해 나가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거예요.

처마나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종을, 줄을 흔들어서 치지요. 그러면 종속에 쇠막대가 움직이면서 소리를 내요. 이건 서양종을 치는 방법이에요. 그럼 우리 종은 어떻게 칠까요? 절에 갔을 때 종 옆에 길게 줄을 늘여 굵은 나무를 걸어 놓은 걸 보셨나요? 우리 종은 나무로 쳐요. 종을 치는 방법이 다른 거지요.

종모양도 다른데요. 우리 종은 전체가 둥글고 아래가 약간 좁아지면서 모여드는 듯한데, 서양종은 위가 좁고 아래는 치마처럼 넓게 펼쳐져 있어요.

만드는 재료도 조금 달라요. 우리 종은 푸른빛을 내는 청동으로 만들고, 서양종은 누런빛을 내는 황동으로 만들어요. 이렇게 치는 방법, 종모양, 재료가 다르니까 소리도 당연히 다르겠죠.

그 소리를 노랫소리로 한번 비교해 볼까요? 서양 종소리는 높은 음이 많고 팍 펼쳐지는 듯한 노랫소리 같다면, 우리 종소리는 낮은 음이 많아 주변을 끌어안는 듯한 노랫소리와 비슷한 느낌이에요. 그럼 동양종인 중국종, 일본종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재료, 치는 방법은 크게 다르지 않은데 구조에서 조금 달라요. 우리 종은 음통이 있고 당좌라고 해서 종을 치는 부분이 정해져 있는데 중국과 일본 종에는 없어요. 그리고 종두께가 부분마다 다르면서 종모양이 둥근 곡선을 연상하게 하는 우리 종에 비해 두 나라 종은 종두께가 똑같아서 전체모양이 직선에 가깝지요. 우리종과 중국·일본 종을 비교해 볼 때 음통·당좌·종두께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우리 종소리의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깊은 울림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혹시 성덕대왕신종이 내는 종소리를 들어보셨어요? 그 긴 울림은 마음 속 깊은 곳을 파고들어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지요. 얼마 전 일본 NHK방송국이 세계 여러 나라 종소리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으로 우리 성덕대왕신종을 뽑았다고 하지요. 우리 종소리에는 맥놀이라는 특별한 현상이 있기 때문이에요. 맥놀이 현상이란 두 개의 다른 파장을 가진 진동이 만나게 되면서 일정한 주기로 소리의 크기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걸 말해요. 이 맥놀이가 가장 좋은 소리를 만들어 낼 때는 13초에 1번 정도로 반복된다고 해요. 정확한 계산과 완전한 구조를 갖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하지요.

그럼 우리 종소리는 어떻게 그 정확한 맥놀이를 만들어 내는 걸까요? 종을 치면 종속은 진동이 서로 충돌하거나 반사해서 잡음이 생기지요. 이 잡음을 밖으로 내보내는 역할을 바로 음통이라고 해요. 이렇게 잡음이 없을 때에만 이상적인 진동이 만들어지거든요. 명동은 종을 바닥에 최대한 가깝게 매달아 놓고 바로 밑에 항아리를 묻어놓거나 움푹하게 파놓은 걸 말해요. 그 공간은 진동을 오래 머물도록 해서 긴 여음을 만들 뿐만 아니라, 첫 번째 진동이 이곳에 부딪쳐서 새로운 진동이 하나 더 생겨날 수 있도록 해요. 이 음통과 명동의 작용으로 정확한 맥놀이가 가능하게 된 거지요.

그밖에도 앞에서 살펴본 우리 종만이 가진 특별한 모습들은 가장 좋은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낸 음향과학 장치라고 할 수 있어요. 종소리가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소리를 조절할 수 있는 세밀하고 정확한 과학기술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에밀레종에 얽힌 전설이 사실이었을까요?

에밀레종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죠. 종을 만드는데 30년이나 걸렸으니 이런 전설이 생긴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그런데 정말 전설에서처럼 종을 만들었으나 소리도 안내고 계속 실패만을 거듭해서 종을 완성하는데 오래 걸린 걸까요? 글쎄요. 그전에 그보다 훨씬 큰 황룡사종도 만들었던 신라기술인데 그럴 리가요. 그럼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까요?

종을 만드는 방법은 회전법과 납형법 두 가지 단계로 구성됩니다.

회전법은 종 안과 밖에서 모양 판을 회전시키면서 주조 틀을 만드는 방법이고, 납형법은 종형 태를 미리 정교하게 만든 후 그 형태에 꼭 맞는 틀을 만드는 방법을 말해요. 대체로 큰 종을 만들 때는 이 두 가지 방법을 함께 사용하고, 작은 종은 납형법만으로 제작하기도 하지요.

우리는 이 두 방법 중 성덕대왕신종을 만들면서부터 납형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성덕대왕신종 만한 종을 만들기 위해서는 4,000개도 넘는 벌통이 필요했어요. 종 만드는데 웬 벌통이냐고요? 벌은 몸에서 밀초라는 물질을 분비해서 집을 짓는데요. 이 밀초가 납형법에는 필수 재료거든요. 밀초로 모양을 자세히 만든 다음 진흙으로 두텁게 발라 틀을 만들고 열을 가하면 밀초만 녹아내리게 되고 그 속에 쇳물을 집어넣어서 만드는 거죠. 그런데 이 밀초를 구하는 게 쉽지가 않아요. 1년에 벌통 1개에서 얻을 수 있는 양은 12리터 정도인데 종의 부피가 3.3m니까 벌통을 수년 간 모아야만 가능했겠죠. 납형법으로 종을 만드는 게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려운 과정이기는 하지만 만약 이 방법이 없었다면 우리종의 아름다운 소리와 문양, 정교한 구조는 불가능했을 거예요.

 

우리 지역의 종소리를 들어봐요.

지역의 종소리를 모아놓은 CD가 나와 있대요. 그 중에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종소리를 꼭 들어보세요. 물론 더 좋은 방법은 직접 종이 있는 곳에 가서 소리를 들어보는 거죠. 그리고 다른 지역, 다른 나라 종소리와 어떤 느낌 차이가 있는지 들어보는 거예요. 그냥 막연하게 종소리를 들을 때보다 훨씬 실감나고 세심하게 소리를 듣게 될걸요. 요즘 우리들은 너무 많은 소리에 파묻혀 살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해요. 어떤 소리든 진지하고 세밀하게 들어본 경험도 많이 부족하지요. 우리 종소리를 듣고 느끼면서 우리가 그동안 잃어버리고 있었던 소리에 대한 감각들을 되살려 나가도록 해요.

 

백제의 타임캡슐 (백제 금동대향로)

 

백제는 처음에는 한강 부근에 있었어요. 그러다가 고구려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수도였던 위례성이 함락되고 왕이 전사하자, 도읍지를 공주로 옮겼어요. 이때 공주는 웅진이라 하였지요. 공주에서 힘을 기른 백제는 이후 도읍을 다시 부여로 옮겼어요. 부여의 옛 이름은 사비였어요. 도읍을 부여로 옮긴 후, 백제의 문화는 크게 발달했지요. 부여 곳곳에서 찬란했던 당시의 문화를 느낄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중에서도 찬란한 백제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유물은 국보인 백제 금동대향로입니다. 여러 가지 조각과 무늬가 새겨져 있는 이 유물은 무엇일까요? 어디에서 발견되었을까요? 어떤 무늬로 조각되어 있을까요? 그리고 백제인 들의 공예 기술은 어느 정도 수준이었을까요?

 

백제 금동대향로란 무엇일까요?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 287)

백제 금동대향로

향로란 향을 피우는 그릇으로서 나쁜 귀신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였던 것이에요. 요즘도 명절이나 제삿날에는 음식을 차려놓은 상 앞에 놓지요. 백제 금동대향로는 키가 64나 된답니다. 보통 향로는 20정도인데, 비교해 보면 얼마나 큰지 알겠죠? 청동으로 모양을 만들고 표면을 금으로 칠했어요. 그래서 금동대향로입니다. 이 백제 금동대향로를 통하여 백제인 들의 사상과 공예 기술을 알 수 있지요.

 

어디에서 발견되었나요?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부여는 곳곳에서 백제 문화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어요. 특히 땅 속에 묻혀 있던 유물은 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지요. 백제 금동대향로는 1993년에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 근처에 위치한 절터에서 발견되었어요. 공기가 통하지 않는 바닥 진흙 속에 파묻혀 있었기에 거의 녹슬지 않고 원래 모양 그대로 있답니다. 우리는 이 유물을 통하여 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당시 발견되었던 지역으로 보아 능산리의 여러 무덤에 묻힌 이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에서 사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떤 무늬가 조각되어 있을까요?

백제 금동대향로는 4개 부분으로 되어 있어요. 뚜껑 위 장식부분은 봉황이 여의주를 목에 끼고 날개를 활짝 펴서 날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죠. 그 아래의 뚜껑에는 5명이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 모습, 크고 작은 산, 사람들, 동물, 말을 탄 사람들, 불꽃무늬 등 화려한 무늬가 조각되어 있어요. 몸통에는 연꽃, 물고기, 동물 등 여러 가지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밑에는 용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모습으로 몸통을 입으로 받들고 있고, 또 구름과 풀잎무늬가 소용돌이치는 모습으로 꾸며져 있어요. 그래서 이 향로는 백제 문화의 우수성과 독창성이 한층 돋보이는 작품으로, 동북아시아에서 출토된 향로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지요. ! 이제 향로에 조각되어 있는 아름다운 무늬들을 알아보니 어떤 생각이 들지요? 그들의 금속공예 기술은 어느 정도였는지 알아볼까요?

 

백제의 공예 기술은 얼마나 발달하였을까요?

·청동과 같은 쇠붙이로 그릇이나 장식품을 만들고 또 그 표면에 무늬나 글자를 새겨 넣는 기술을 금속공예 기술이라 하지요. 일찍부터 우리 조상들은 금속공예 기술을 발달시켰는데, 이는 무덤에서 발견되는 여러 가지 유물들을 통하여 확인이 된답니다.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들어온 후 여러 종류의 불교 공예품이 제작되면서 그 종류는 더욱 다양해지고, 불교 행사에 사용되는 여러 가지 도구들이 만들어지면서 더욱 정교하게 조각되었어요.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발달시킨 공예 기술로써 아름다운 생활 용품을 만들어 이웃 나라에 수출하기도 했죠. 이제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공예 기술을 더욱 계승·발전시켜 우리의 문화 수준을 세계에 알려야 되겠습니다.

 

옛사람들의 생활모습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

 

옛 조상들의 생활 모습을 알아보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옛날 그림에는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나 느낌이 표현되어 있기도 하고,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생생하고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는 경우도 있지요. 사진이나 비디오카메라가 없던 옛날의 생활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당시의 생활상을 그린 그림이야말로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요. 우리 조상들 중에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그림으로 표현한 화가가 있습니다. 김홍도는 조선시대 서민들의 생활상을 매우 재미있고 구수하게 표현하였고, 신윤복은 도시 양반들과 기생들의 풍속도를 매우 익살스럽게 표현하였어요.

 

김홍도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보물)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보물)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

김홍도(1745?)의 호는 단원이며 18세기 중반에 태어난 조선 후기의 화가입니다. 그는 풍속화의 대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신선 그림이나 행사 그림을 비롯하여 초상화, 산수화, 불교 그림 등 모든 분야에서 매우 뛰어난 솜씨를 보였습니다. 김홍도의 산수화는 어려서부터 그를 아끼고 지도했던 강세황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홍도가 자신의 솜씨를 가장 잘 발휘한 부분은 역시 풍속화입니다. 김홍도의 풍속화에는 우리 고유의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어서 단원의 그림 중에서도 특히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의 풍속화에는 서민 사회의 생활 모습과 농업, 상업, 공업 등의 당시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 모습이 구수하고 익살스럽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김홍도가 이룩한 풍속화 그리는 방식은 같은 시대의 긍재 김득신, 혜원 신윤복에게도 크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런 점에서 김홍도는 조선시대에 풍속화라는 새로운 그림의 영역을 개척하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정승 벼슬자리하고도 바꾸지 않는다는 [삼공불환도], 개성 만월대에서 벌어진 잔치를 그린 [기노세련계도], 말을 타고 가다가 꾀꼬리 소리에 멈추었다는 [마상청앵도], [풍속도첩] 등이 있습니다.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 에는 조선시대의 어떠한 생활 모습이 그려져 있을까요?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보물)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보물)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 (보물)은 김홍도가 그린 그림책입니다. 이 도첩에는 [글방], [씨름], [밭갈이], [활쏘기], [행상], [무동], [기와이기], [대장간], [나들이], [시주], [나루터], [주막], [고수놀이], [빨래터], [우물가], [잎담배 썰기], [자리 엮기], [타작], [서화 감상], [길쌈], [말징박기], [어장], [신행길], [들밥], [기로행려] 25종이 들어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17451816(영조21순조16)에 그린 풍속화인데 대부분 소탈한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 모습과 먹고 사는 모습을 소재로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홍도의 풍속도첩을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서민들의 생활 모습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럼, 단원 풍속화의 그림으로서의 특징을 조금만 살펴볼까요? 그의 풍속화 대부분은 주변의 배경 설명을 생략하고 인물 중심으로 구성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선이 거칠고 굵으며, 힘찬 붓질로 당시 서민들의 생활 감정과 한국적인 웃음을 매우 짜임새 있게 나타내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서도 감동을 준답니다.

 

신윤복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국보)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

신윤복(1758?)의 호는 혜원이며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3대 풍속화가로 불리고 있습니다. 신윤복은 회화를 담당하는 국가기관인 도화서 화원으로서 첨사 벼슬을 하였는데, 너무 수준이 떨어지는 그림을 그린다고 도화서에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그는 도화서에서 쫓겨난 뒤 직업화가의 길을 걸었고, 그 때 수많은 풍속화를 그렸습니다. 그의 풍속화들은 남녀 간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 많이 있는데, 낭만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세련된 솜씨의 붓질과 아름다운 색깔을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혜원의 풍속화는 매우 세련된 감각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혜원의 풍속화는 그림의 주제가 선명하여 보는 사람들에게 내용이 쉽게 전달됩니다.

그는 산수, 인물, 동물 등 여러 분야에 솜씨가 뛰어난 직업 화가로 시 짓기도 잘하고 서예에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대표작으로는 국보로 지정된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이 전합니다.

 

혜원의 풍속화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30면으로 되어 있는 가로 35.2, 세로 28.2의 그림책입니다. 일본으로 빠져나갔던 것을 1930년에 간송미술관을 세운 전형필 선생이 구입하여 새 로 표구하였답니다. 이 풍속도첩은 [청금상련], [기방무사], [월하정인] 30여 점으로 되어 있고 외국에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김홍도의 풍속화에는 조선 후기에 살던 여러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데 비해, 신윤복의 풍속화에는 한량(조선시대에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양반)과 기생 등 남녀 사이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어, 조선 후기에 살던 사람들의 사랑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풍속화에는 인물뿐만 아니라 뒤의 배경이 사실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어서 당시의 살림과 의복 등 조선시대 후기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배경을 생략하고 인물들의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것에 비해, 신윤복의 풍속화는 인물들을 부드럽고 간결한 가는 붓으로 정확히 그리고, 인물들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주위의 배경을 그리고 색칠하였습니다. 풍속화의 구도를 보면 공간을 살리기보다는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특히 인물을 중심으로 그렸는데, 부드럽고 간결한 가는 붓으로 여인의 모습을 정확히 그렸습니다. 다소 남녀 간의 사랑이 표현된 풍속화가 많기는 하지만 풍속화첩에 실린 작품들은 모두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금관의 장식품은 무엇을 뜻할까요? (금관총의 금관과 장식품)

 

경주에는 신라 1,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수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습니다. 경주에 가보면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이 작은 산 같은 고분(무덤)들입니다. 일반적으로, 고분의 주인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을 때는 이나 라는 이름을 붙이고 고분의 주인공이 누군지 정확히 알 수 없을 때는 이라 하여 대개 그 고분이 발굴될 때 나온 유물을 관련시켜 금관총, 천마총 등으로 이름을 붙입니다.

 

금관총의 금관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국보 제87)

금관총 금관

한국 최초의 금관은 1921년 경주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었고, 그 고분(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어서 금관총이라고 이름 지어졌습니다. 이 왕관의 나뭇가지 모양새한자 출()자의 모양과 2개의 사슴뿔 모양 장식품으로 이루어졌다.

금관의 겉에는 조금만 움직여도 반짝이도록 얇고 둥근 금판(달개장식)을 매달았고, 그 사이 사이에는 비취로 만든 곡옥(곱은옥)을 달았으며, 좌우 양쪽에는 금으로 호화롭게 꾸민 긴 수식(드리개)을 내렸는데 그 끝에는 역시 비취 곡옥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그 모습이 매우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금관의 장식품은 무엇을 뜻할까요?

신라 금관의 기본 모양은 나무 모양인데, 이것은 신라인들이 타고 다니며 나무를 귀하게 여기고 숭배하는 민족이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지금도 농촌에서는 마을을 지키는 나무(당산목)를 정해두고 보호하고 있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금관에 장식된 는 금관의 주인공이 인간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로 주로 지도자였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곡옥은 비취색의 영롱한 빛을 띠고 있는데 그 모습이 어머니 뱃속에 있는 태아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신라 왕족의 자손이 번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장식품이라고 추측됩니다. 금관은 신라인들의 생각과 생활 모습 등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므로 현재 국보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도기 서수형 명기, 토우, 수막새 (도기, 기마인형)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국보 제91)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금령총에서 출토된 한 쌍의 말을 탄 인물형 토기 가운데 종자의 모습입니다. 인물은 발목에서 여민 바지를 입고 어깨에는 기다랗고 굵은 자루 같은 것을 둘러메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망치를 들고, 머리에는 넓은 띠를 감은 듯 한 모자를 쓰고 있는데 머리 가운데에는 돌기가 있어요. 말은 가슴 앞에 뿔처럼 돌출된 장식이 있고 엉덩이 위에 잔이 놓였으며 속이 비어 있습니다.

 

도기 서수형 명기

도기 서수형 명기(보물 제636, 영남대학교박물관 소장, 경주 황남동 고분 출토, 신라시대, 높이 14cm)

도기 서수형 명기

둥근 그릇 받침 위에 거북의 몸체, 용의 머리와 꼬리 등이 복합된 상상의 동물을 표현하였습니다. 몸 체 군데군데에 영락(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이 달려 있고 등 뒤쪽에 주입구(물이나 술을 넣는 곳)를 두었다. 앞쪽에 기다랗게 주출구(물이나 술이 나오는 곳)를 만들어 놓은 속이 빈 용기입니다.

 

토우

토우는 동양이나 서양에서 모두 만들었고, 만든 목적이나 쓰임새도 대체로 비슷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죽어서도 현실과 같은 사후 세계가 존재하므로 시중들 하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왕이나 주인이 죽으면 주인에게 봉사하고 무덤을 지키기 위해 하인을 함께 묻는 순장이라는 풍습이 있었지요. 그러나 점차 의식이 발전하고 생산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실제 하인을 묻는 대신 흙으로 사람의 모습을 만들어 함께 묻었지요. 이것이 부장품으로 만든 경우예요.

주술적 우상으로 만들어진 경우는 유방이나 엉덩이를 크게 과장한 여성상이거나 임신한 어머니 모습을 표현했어요. 이는 여성의 출산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으로 숭배 되었고, 또한 다산을 바라는 옛 선조들의 기원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했지요.

또한 토기 중에도 사람·동물을 비롯한 여러 가지 모양을 지닌 것들이 만들어졌어요.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새 또는 오리모양 토기가 적지 않게 발견되는데 새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사후세계로 인도하는 안내자라고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수막새는 어떻게 쓰였을까요?

지붕에 연꽃이 피었어요. 살짝 치켜 올라간 처마선의 아름다움도 모자라 그 끝에 꽃을 피웠답니다. 이러한 지붕을 이루는 기와는 각 부분마다 이름이 있는데, 어떻게 쓰였는지 알아볼까요? 비교적 넓고 약간 곡선을 이루는 것을 암키와, 거의 원통에 가까운 것을 수키와라고 해요. 암키와는 지붕을 덮는 역할을 하고 수키와는 암키와와 암키와를 연결시켜 암키와 사이의 틈새를 막아주는 역할을 한답니다. 암키와의 한쪽 곡면을 직각으로 막은 것을 암막새, 수키와의 한쪽 곡면을 직각으로 막은 것을 수막새라고 해요. 이것들은 눈과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고 건물의 외관을 치장하기 위해서 사용되었지요.

 

수막새에서 찾아 본 지역별·시대별 미감

수막새는 전국 어느 곳에서나 출토되므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수막새와 옛 도읍지에서 출토된 수막새의 모양을 비교할 수 있어요.

고구려의 수막새는 험악한 지형과 추운 날씨, 북방의 침략에 항상 신경을 써야 했던 고구려인들의 삶이 문양에도 반영되었어요. 직선으로 나누어 장식했으며 연잎 끝이 날카롭고 선이 강렬한 것이 특징이지요.

백제는 한강 유역과 호남평야를 차지하여 풍부한 식량을 얻었기 때문에 그 여유와 넉넉함이 또한 수막새의 문양에 나타난답니다. 연잎의 끝이 넓으면서도 버선코처럼 살포시 들려있고 연잎 한장한장을 도톰하고 풍만하게 표현해서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맛을 주고 있어요. 신라는 초기에 고구려와 백제의 문양을 거의 모방하다가 이후 차츰 독자적 문양이 나타나요. 특히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꽃잎을 이중으로 배치하고 테두리에 작은 점이나 꽃잎을 배치하는 방법으로 보다 화려하게 장식하였죠.

 

부처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반가사유상)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은 당대 최고의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당시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담아냈습니다. 반가부좌의 자세(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은 자세)를 한 채 깊이 생각하고 있다고 해서 부처님의 이름은 반가사유상이랍니다. 반가사유상들을 보면서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지역에 따라 불상이 주는 느낌은 어떠한지 찾아보기로 하죠.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석굴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불상 중 최고 걸작이라고 하는 국보로 금동삼산관사유상이라고도 하지요. 높이가 93.5정도이니 무척 크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상은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부드러운 선과 온화한 미소에서 백제 작품으로 여겨져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제118)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1940년 평양 평천리에서 출토된 것인데 확실하게 고구려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국보이고 높이는 17.5정도인데, 이것은 작은 인형 같죠?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제84)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은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충남 서산의 가야산 계곡에 새겨져 있다. 삼존불 중 왼쪽에 있는 분이 반가좌(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은 자세)를 한 채 사유(생각)하는 보살이에요.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국보 제199)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마애불상군은 경북 월성군 단석산 신선사에 있는 여러 불상 중의 하나로 서산 마애삼존불의 얼굴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죠? 고신라를 대표하는 양식으로 국보지요.

 

힘이 넘쳐흐르는 고구려, 부드럽고 온화한 백제, 선이 곧고 정교한 신라!

고구려의 평양 평천리 출토 금동미륵반가상, 백제의 서산 마애삼존불상 중 반가사유상, 신라의 단석산 신선사 마애 불상군 중 반가사유상을 보면서 그 느낌의 차이를 찾아봐요.

고구려의 반가사유상을 볼까요? 네모에 가까운 얼굴에 가늘고 긴 몸, 장식이 없는 상체와 두툼하면서도 똑같은 모양이 계속되는 옷주름을 볼 수 있지요. 중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고구려의 기상을 잃지 않았던 고구려인들의 예술성이 느껴지지요? 뛰는 듯 생기 있게 움직이는 기운과 의지를 나타내는 고구려 사람들의 아름다움의 표현이에요.

백제의 미소로도 유명한 서산 마애삼존불은 어떤가요? 둥글고 넓으면서도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얼굴은 볼 가득이 미소를 머금고 있어요. 마치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애교를 부리는 것 같죠? 이 천진난만하고 여유 있는 웃음과 세련되면서도 온화한 느낌이 바로 백제인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이죠.

신라의 반가사유상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한 미소와 약간은 비례가 맞지 않는 어설픈 자세, 경직된 선과 투박한 양감,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아저씨 같은 친근하고 소박한 맛이 있지요. 이 특별한 느낌이 신라인의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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