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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동해건설산업 2025. 10. 12. 13:04

지식[건축분야]

오래된 목조건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우리나라에 지은 지 오래된 목조건물은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 등이 있어요. 세 건물은 고려시대에 지어진 절의 부속 건물로 국보급 문화재입니다.

 

부석사

경상북도 영주시 봉황산 중턱에 있는 절입니다. 676(신라 문무왕1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처음으로 짓고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당나라에서 유학중인 의상을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날아 왔다고 합니다. 용은 이 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 500명을 바위를 날려 물리쳤고 바위는 무량수전 뒤쪽에 내려 앉아 浮石(부석)’이라고 각인되어 지금도 남아 있어요.

 

무량수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절에 들어가면 불전이 많은데 그 중에서 무량수전은 서방극락정토의 책임자인 아미타여래를 모시는 불전을 뜻합니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가졌다고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목조건물 중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건물로 국보입니다.

역사적으로는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면에서 보면 무량수전에 비해 다소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무량수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 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입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화강암의 높은 기단(건축물의 기초가 되는 단) 위에 남쪽을 향해 서 있는데 평면구조는 앞면 5, 옆면 3칸으로 된 팔작지붕(처마의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달은 지붕)이고 기둥은 배흘림 수법(아래 중간 부분이 불룩한 나무 기둥)을 썼습니다. 기둥사이의 칸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습니다. 1916년 해체·수리 때 발견된 기록으로 보아 1376(고려 우왕2)에 수리하였다고 하나 구조수법이나 세부양식이 적어도 13세기 초까지 올려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의 하나는 같은 경내에 있는 조사당(한 종파를 세우고 그 종지를 열어 주장한 사람을 모신 집)1377(고려 우왕3)에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나왔고 이 건물과 비교할 때 100년 내지 150년 정도 앞섰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봉정사

경상북도 안동시 천등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로 672(문무왕12)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습니다. 창건 이후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습니다. 경내에는 대웅전, 극락전, 고금당, 화엄강당, 해화당, 덕휘루 등의 건축물과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인 3층 석탑이 있고 대웅전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절에는 [獨抱道德(독포도덕)]이라는 선조가 쓴 현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국보)

안동 봉정사 극락전

무량수전, 아미타전이라고도 하는데,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어서 아미타전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대웅전, 대적광전과 함께 3대 불전으로 손꼽을 만큼 많이 건립되었습니다. 봉정사 극락전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고려 후기의 목조 건물로 국보입니다.

 

19729월에 실시한 극락전 해체·보수 공사 때에 발견된 1625(인조3)에 작성한 기록에 의하면 1368년에 지붕 부분을 수리하였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개 건물의 지붕을 수리하게 되는 경우는 창건 후 100150년이 경과한 후이므로 극락전의 창건 연대는 1368년보다도 100150년 전인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봉정사 극락전은 정면 3, 측면 4칸의 단층 맞배지붕(지붕의 양 옆면이 잘린 듯이 보이는 지붕)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물의 전면에 다듬질된 석기 단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배열하고 그 주춧돌 위에 배흘림기둥을 세웠습니다.

 

이 탑은 몇층일까요?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경주 불국사 다보탑)

 

우리나라 문화재 중 가장 많은 것이 불교 문화재랍니다. 불교 그 중에서 어느 지역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건 탑이에요. 탑 하나에도 많은 의미가 숨어 있어요. 우리 지역에도 오래된 불상이나 탑이 있는지 찾아보세요. 불상이나 탑이 있다는 건 고려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절이 있었고, 그 절이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고 그 시대 문화의 센터였다는 뜻이랍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불상과 탑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지, 요즘 사람들은 그 불상과 탑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물어보고, 다른 지역에 가서는 우리 지역의 탑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면 좋은 공부가 되겠죠?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경주 불국사 다보탑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

경주 불국사 다보탑

국보인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국보인 경주 불국사 다보탑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이예요.

불국사의 대웅전과 자하문(붉은 안개가 서린 문이라는 뜻)사이에 서쪽에는 석가탑이, 동쪽에는 다보탑이 서로 마주 보고 우뚝 서 있답니다. 통일신라시대(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두 탑은 높이 10.4로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하고, 다보탑은 특수 형을 대표하지요.

그런데 왜 모습이 다른 2개의 석탑이 한 자리에 같이 있을까요? 석가탑과 다보탑은 불교의 사상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바꾼 것이랍니다. 석가모니(부처님)가 설법(불교에서 말하는 법이나 도리를 설명하는 것)을 하고 있을 때 바로 앞에 칠보(일곱 가지의 보배)로 장식된 다보탑이 허공에 우뚝 솟았다고 해요. 석가탑과 다보탑이 나란히 있는 것은 설법을 하는 석가여래(부처님을 성스럽게 이르는 말)와 그것을 증명하는 다보여래(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할 때, 땅속에서 다보탑과 함께 솟아 소리를 질러 석가의 설법이 참이라고 증명하였다는 부처)를 나타내는 것이죠.

다음 글을 그림으로 그려보세요. ‘높이와 너비가 굉장하고, 갖가지 보물로 장식되었으며, 나부끼는 깃발과 길게 늘인 깃발, 줄줄이 늘어뜨린 구슬들, 보배로운 방울이 무수히 걸려 화려하고…….’ 다보탑의 모습과 비슷한 그림이 그려졌나요? 석가모니 앞에 나타난 다보탑의 모습을 표현한 글인데 그대로 옮겨 다보탑을 만들었다고 해요.

 

탑이 무덤이었다던데 정말인가요?

탑 속엔 무엇이 들었을까요? 처음엔 석가모니의 사리(화장을 한 후의 유골)를 모시는, 일종의 무덤이었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덤과는 다르게 생겼다고요? 최초의 탑 모양은 마치 오늘날의 무덤과 같았어요. 지금도 인도에는 산치탑이라는 거대한 반구형의 탑이 남아있죠.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반구형의 탑은 점차 여러 층으로 구성된 목조건축물의 모습으로 변하였지요. 탑은 차츰 무덤으로서의 역할보다는 불교를 상징하는 기념물로 자리 잡게 되었고 탑 속에도 사리와 함께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같은 경전을 넣게 되었어요. 사람들은 그런 탑을 성스러운 대상으로 생각하고 탑돌이를 하며 소원을 빌었답니다.

부처님의 사리를 넣어 모시는 곳을 탑이라고 한다면, 스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은 부도라고 해서 이름을 달리하고 위치도 다르지요. 탑이 절의 중심부에 있는데 반해 스님들의 부도는 절의 앞쪽이나 옆, 뒤쪽에 모셔져 있습니다.

 

다른나라에도 석탑이 있나요?

인도, 중국, 일본에는 어떤 탑들이 있을까요? 우리나라처럼 돌로 만들었을까요?

인도나 중국은 황토 흙이 풍부하고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어 벽돌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었어요. 중국은 벽돌로 쌓은 탑이 많아 전탑의 나라라 불리기도 하지요. 일본은 지진이 많아 좋은 재질의 석재를 구하기가 어렵죠. 대신 울창한 난대림의 좋은 목재들을 이용해 목탑을 만들어요. 그래서 일본을 목탑의 나라라고 불러요.

그러면 우리나라는 왜 석탑이 많은 걸까요? 먼저, 목탑은 불에 타기 쉽죠? 우리나라는 주변 나라로부터 침입이 잦은 나라여서 많은 목탑들이 불에 타버리고 없어졌어요. 여러분들이 잘 아는 경주 황룡사 9층탑 외에도 시대마다 목탑이 있었어요. 그러나 전란으로 인해 대부분 불타 버렸지요. 대신 우리나라에는 어딜 가나 산이 많아 질이 좋은 화강암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자연조건 때문에 석탑이 많은 거예요.

 

아사달과 아사녀 이야기를 연극으로 꾸며 보세요

석가탑에 전해져 내려오는 아사달과 아사녀 전설 이야기 아시죠? 아사녀가 아사달을 찾아 불국사까지 왔지만 탑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만날 수가 없었어요. 결국엔 기다리다 지친 아사녀가 연못 속으로 뛰어 들었고 뒤따라 아사달도 죽었다는 애틋한 이야기죠. 예전엔 돌 하나 깎을 때마다 불공을 드릴만큼 정성을 다 했어요. 아사녀와 아사달을 못 만나게 한 것도 부정 탈 것을 걱정해서겠죠. 탑 만드는 것이 젊은 부부의 생명을 빼앗을 만큼 중요할까요? 아사달과 아사녀 이야기를 새롭게 꾸며서 연극을 해보면 재미있겠죠?

 

석탑 양식의 닮은 점을 찾아보세요 (목탑과 석탑의 차이)

 

우리나라는 왜 석탑이 많을까요? 석탑만 만들었기 때문일까요? 예전엔 목탑도 만들고 석탑도 만들었어요. 여러분들도 잘 아는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신라), 부여 군수리 사지의 목탑(백제), 평양 청암리 사지의 목탑(고구려) 등 각 시대마다 목탑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네요.

그러면 그 많았던 목탑들이 어디로 갔을까요? 주변 나라의 잦은 침입으로 불에 타버린 거죠. 목탑과 함께 석탑을 만들던 시대에도 지금의 석탑과 같은 양식으로 만들었을까요? 어느 것이든 변화 과정이 있기 마련인데 석탑양식도 그랬대요. 어떻게 변해 왔을까 궁금하지요?

 

닮은 점을 찾아보세요

보은 법주사 팔상전(국보)

보은 법주사 팔상전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익산 미륵사지 석탑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

 

다음 4기의 탑을 자세히 비교해 보고, 법주사 팔상전과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석탑부터 순서를 잡아보세요. 그리고 세워진 지역에 따라 탑이 주는 느낌 차이도 이야기해 보세요. 처음 탑은 국보인 보은 법주사 팔상전이예요. 조선시대 후기인 17세기 초반의 탑입니다. 마치 5층 집 같다고요? 그래요,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목탑 중 하나인데 집과 같아요.

두 번째 탑은 돌을 이용하여 목탑을 짓듯 쌓아 올린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죠.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탑이며 국보로 전라북도 익산에 있어요.

세 번째 탑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백제시대를 대표하는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입니다. 국보로 7세기 초반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마지막 탑은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이죠. 통일신라시대 7세기 후반에 만들어졌는데 문무대왕이 왜병을 물리치고자 세운 감은사 옛터에 동, 서 쌍탑으로 남아 있어요.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은 국보예요..

 

목탑과 석탑의 차이

법주사 팔상전과 감은사 탑의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목탑인 팔상전은 기둥에 창방, 평방, 공포 등 목조건축물의 구조를 갖추고 있지요. 그러나 감은사 탑은 건축이라기보다는 조각품이에요. 이렇게 목탑과 석탑은 한 눈에 보기에도 달라요. 목탑에서 석탑 양식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있었다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밟아왔는지 살펴봅시다.

법주사 팔상전을 먼저 살펴볼까요? 5층집 같다고 했죠? 하지만 실제로는 1층에만 들어갈 수 있고 건물 안에서 보면 5층까지 뚫려 있어요. 천장 높은 집이죠. 이렇게 사람들이 들어갈 수도 있는 건축물이에요. 집을 지을 땐 어떻게 지을까요? 땅을 다진 뒤 축대를 쌓죠. 물론 사람이 올라가 신발을 벗어야 하니까 낮고도 올라가기 쉽게 만들어요.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가로질러 창방(기둥머리와 기둥머리를 연결하는 나무), 평방(창방 위에 얹는 나무)을 얹고, 그 위에 공포(지붕을 들어주는 역할)를 올려 지붕을 날아갈 듯이 마무리해요. 지붕의 처마 길이가 짧으면 멋이 없고 또 처마 선은 축대(기단) 바깥까지 벗어나야겠죠? 비바람이 들이치는 걸 막아줘야 하니까요.

이러한 목조 건축과 비교해서 미륵사지 석탑을 볼까요? 탑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각 면마다 작은 문들이 있어요. 문은 안에서 서로 통한대요. 기둥도 세웠지요? 기둥은 위쪽이 좁고 배 부분부터 부풀어 내려오는 배 흘림 기법으로 멋을 냈고요. 기둥 위에 판판한 돌을 겹쳐 얹어 평방과 창방의 흉내를 냈어요. 기단은 처마선 안에 자리하면서 낮은 단층기단이에요. 모든 부분에서 목조탑을 흉내 내려고 애썼답니다.

감은사 탑에서는 미륵사지 탑에서 보았던 문은 보이질 않아요. 대신 기단이 2층 기단으로 바뀌었고 높이도 꽤 높아졌어요. 기단에 비해 처마 선은 짧아지고 기단이 넓고 높아져 상승감에 안정감을 더해줘요. 이젠 탑이 건축물로서보다는 기념물, 상징물로 자리하게 된 거죠. 그런데 아직도 각 부분이 한 개의 돌로 조각된 것이 아니라 수십 개의 부분 돌을 조각해 조립했어요. 몸돌(면석)과 기둥돌(각주, 탱주)들이 떨어져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지붕돌(옥개석)도 받침돌과 서로 다른 돌에 조각해 각 층의 지붕만 해도 무려 8덩이의 돌로 조립되었어요. 감은사 탑에 숨어있는 목탑 양식이라고 할까요? 그러면, 석탑의 아름다움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목탑이 나무가 가진 좋은 점을 살려 서로 어긋나지 않게 짜 맞춘 형태라면, 석탑도 돌의 좋은 점을 잘 살려야겠죠? 돌은 덩어리가 주는 단단함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어요. 석탑은 돌의 좋은 점에 약간의 인공적인 멋을 가할 때 아름답죠. 이쯤하면 목탑과 석탑의 차이를 비교하는 안목이 생겼겠죠? 우리 지역의 탑에도 목탑 양식이 남아있는지 잘 살펴보세요.

 

백제와 신라의 아름다움을 비교해 보세요.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보면 어떤 사람이 생각나나요? 훤칠한 키에 당당한 어깨, 단정한 몸가짐에 지적이고 우아함이 물씬 풍겨 나오는 그런 사람이 생각나지 않나요? 따뜻하고 온화한 미소를 던지며 다가올 것 같아요.

감은사 석탑은 어떤 사람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굳세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것 같은, 듬직한 사람을 보는 듯해요. 지붕돌에서 모서리선의 표현 하나만 비교해도 백제인과 신라인의 미감을 알 수 있죠.

정림사지 탑은 얇은 지붕돌의 모서리선(우동)이 내려오다 끝에서 10분의 1쯤 남겨진 지점(전각)을 가볍게 올렸어요. 하지만 감은사 탑의 표현은 달라요. 처마 선은 일직선인데 지붕돌의 모서리선이 내려오면서 점차 두툼해져 마치 위로 솟은 듯이 보이게 해요.

그러면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요? 지리적, 역사적, 사회적 조건이 문화에 드러나는 거죠. 백제가 지금의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세워졌다면 신라는 지금의 경상도를 중심으로 세워졌던 고대 국가죠. 그래서 두 지역은 말씨에서부터 아리랑, 불상, 장승 등 모든 문화에 차이가 있죠. 우선 전라도는 넓은 평야가 많아 먹을거리가 풍부하죠.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도 여유가 있어요. 평야가 많다 보니 상대적으로 산이 적죠. 산줄기의 끝자락이라 산인지 구릉인지도 모를 낮은 산들 뿐이죠. 전라도 말씨나 진도 아리랑을 들어보면 낮은 산을 넘어간다는 느낌이 들어요.

경상도 지방은 앞은 거대한 백두대간이 가로막고 있고 뒤는 넓고 깊은 바다와 싸워야 해요. 그래서 사람들의 성격도 투박하고 거칠 수밖에 없죠. 그런 지리적 조건이 말씨를 비롯해 아리랑이나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다른 지역도 물론 마찬가지구요. 이렇게 지역의 특성을 알면 그 지역을 이해하듯이 인간관계도 그렇게 풀어나갈 수 있어요.

 

옛날 학교에 대해서 알아봐요. (성균관, 향교, 도산서원)

 

3학년 사회책을 보면 향교에 대한 부분과 5학년의 조선시대 교육기관에 대해 나오는데 지역마다 서원과 향교가 한 두 곳쯤은 다 있으니까, 직접 찾아가 보세요. 성균관, 향교, 서원을 어떻게 관련지어야 할지 몰라 책만 읽고 지나치진 않으셨어요? ‘저 건물은 뭐하는 거지?’ ‘뒤쪽으론 뭐가 있을까?’ ‘학생 수는 얼마나 될까?’ ‘이 학교에서 특색 있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일까?’ ‘학교 역사가 얼마나 될까?’ 이런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옛날 학교와 지금 학교가 어떻게 다른지, 사회 운영 원리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고, 역사를 보는 깊은 안목이 생길 거예요.

 

옛날 학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향교는 관학이라서 관아에서 감독을 해야 하고 행사가 꾸준히 이루어지므로, 읍성 안쪽이나 읍성 가까이 세웠어요. 그러나 서원은 일반적으로 산수가 뛰어나고 조용한 산기슭이나 향촌에 만들어졌는데, 이는 선비들이 공부하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았고 받들어 모실 선현의 연고가 있는 곳을 찾았기 때문이지요. 건물도 절집 같은 화려함이 없고, 주위의 자연과 어울리게 만들었어요. 서원은 검소한 생활환경을 중시한 조선조 선비들의 가치관이 잘 나타나서 전형적인 유교 건물의 모습을 볼 수 있어요. 또 오늘날 학교는 커다란 운동장과 기다란 2,3층 건물이 특징이지요? 옛날엔 어땠을까요? 성균관, 향교, 서원은 그 구조가 비슷해요. 학교 안에 제사지내는 사당(또는 대성전)과 강당, 그리고 기숙사가 있는 것이 특이해요. 옛날 학교는 유교 이념을 가르치는 배움터인 동시에 공자와 중국 성현 그리고 우리나라 선현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기도 했어요. 건물도 각각 기능이 다른데, 중요한 몇 가지 건물은,

 

대성전(서원의 사당) - 공자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 지내는 곳

동무, 서무 - 대성전 앞쪽에 배치. 중국 성현과 우리나라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

명륜당 - 강당이면서 교실.

동재, 서재 - 명륜당 앞쪽 좌우에 있는 건물로 학생들의 기숙사. 그 외에 휴식공간, 책을 찍어내거나 보관하는 곳, 제기를 보관하는 곳 등이 있었어요.

 

서울 문묘와 성균관

서울 문묘와 성균관

 

서울 창덕궁 동쪽으로 가면 명륜동에 성균관대학교가 있어요.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성균관이에요. 성균관은 고려와 조선시대 최고 학교로, 지금으로 본다면 서울에 있는 국립 대학교라고 할 수 있어요. 1398(태조 7)에 새 도읍 한양(지금의 서울)을 건설하면서,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지요. 성균관에서는 음력 2월과 8월에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석전대제(釋奠大祭)’라고 해요. 그리고 석전에 쓰이는 음악을 문묘제례악이라고 하는데, 문묘제례악과 그 의식을 보존하기 위해서 석전대제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요.

성균관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다시 지은 거예요. 지금은 문묘(대성전) 일원이 사적으로 지정돼 있어요.

 

장수향교 대성전

장수향교 대성전(보물)

장수향교 대성전

관학(국가에서 세운 학교)으로 서울에 성균관이 있었다면, 지방엔 향교가 있었어요. 전북 장수읍 선창리 당곡 마을에 가면, 장안 산과 팔공산으로 에워싸인 곳에 장수향교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자리 잡고 있어요. 가장 바깥에 있는 외삼문을 들어서면 명륜당이 오른쪽에 있고, 그 뒤로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어요. 뒤쪽으로 담장이 둘러쳐진 내삼문이 있고, 내삼문을 들어서면 대성전이 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요. 장수향교 대성전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어요. 장수향교는 함흥향교와 더불어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지 않은 건물로 잘 알려져 있어요.

고려와 조선의 역대 왕들은 정치이념인 유교를 지방에까지 확대하기 위해, 각 군현에 향교를 세웠어요. 마치 지금의 학교가 면단위까지 퍼져 있고, 교육과정이 국가수준인 것과 같은 원리겠지요? 향교는 지금의 국립 중·고등학교로 지방의 교육·문화를 지배했고, 사상의 중심적 역할을 했 어요. 지금도 남한에 231개가 남아 있어요.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보물)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

 

서원은 지금의 사립 중·고등학교라고 할 수 있는데, 조선 중기 지방에서 사설 학교인 서원이 처음 생겨났어요. 최초의 서원은 소수서원이고, 한때는 650여 개까지 설립되었어요. 조선 말기에 흥선대원군이 왕권 정비를 위해 47개만 남기고 철거하였지만, 그 뒤에 옛 전통을 살려 재건하여 오늘날 수도 없는 서원들이 각 지역에 있게 되었지요. 도산서원을 비롯해 옥산서원, 무성서원, 필암서원, 병산서원, 돈암서원이 사적으로 등록돼 있고, 달성 도동서원 중정당ㆍ사당ㆍ담장이 보물로 지정되었어요.

이러한 서원중에서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을 알아볼까요?

도산서원은 안동시에서 동북쪽으로 28쯤 가면 토계동에 있어요.

도산서원은 한국 유학사에서 큰 별이라 할 수 있는 퇴계 이황 선생을 모신 곳이죠. 도산서원이 있기 전에는 도산서당이라 해서 퇴계 선생이 생활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기도 해요.

퇴계 선생이 돌아가신 후 그를 흠모하던 제자들과 고을 선비들이 사당을 세워 그를 받들어 모심으로써 서원으로 모습을 갖추게 되었어요. 그 뒤 강당인 전교당과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를 증축해서 이듬해 도산서원이란 현판을 받으며 국가에서 인정받았어요.

안동 도산서원은 사적로 지정되어 있고, 도산서원의 중심 영역인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은 보물로 지정돼 있어요.

 

학생들은 수업료를 냈을까요?

성균관과 향교 학생들은 기숙생활을 했어요. 그러면서도 수업료를 내지 않았고 음식과 학용품 등의 교육비를 모두 지급 받았어요. 이런 비용은 국가에서 학교로 내려준 토지와 노비의 몸값으로 충당했어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운영의 책임이 있는 지방수령이 지속적으로 지원해야 했고, 일부는 향교마을을 지정해서 부역으로 도움을 주게 했어요. 또 부역을 면제해주는 대신 공물을 내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서원은 대부분 제자들이나 후손들이 설립한 사학이므로, 원칙적으로 국가 차원의 재정지원이 없었어요. 국가에서 공식 인정된 서원(사액서원)의 경우에는 약간의 토지가 지급되었지만, 매우 적었기 때문에 지방 유림의 힘을 모아 운영비를 마련한 것이 일반적이었지요.

 

임금님과 궁궐 (경복궁)

 

궁궐은 임금이 생활하던 곳이예요. 궁궐은 왕이 살기 때문에 나라의 우수한 과학기술, 문화를 총동원해서 솜씨를 맘껏 발휘하게 되지요. 그래서 궁궐을 알면 당시의 사상과 문화, 사회상, 과학기술의 수준을 알 수 있어요.

 

경복궁

경복궁 (사적)

경복궁

경복궁 (국보)

경복궁

경복궁 내부

경복궁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왕의 군위와 정통성을 보이기 위해서 경복궁을 세웠어요. 초기의 경복궁은 390여 칸으로 근정전과 강녕전, 연생전 등 주요 건물들만 있었으나 경회루도 다시 짓고 점차 건물의 수를 늘렸어요. 그러다 임진왜란 때 불이 나 폐허가 되었어요. 다시 지으려 했지만, 워낙 큰 일이라 하지 못하다가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중건(절이나 왕궁 따위를 보수하거나 고쳐 지음) 하여 궁궐로 사용했어요.

중건했을 때는 원래보다 훨씬 많은 7,000칸이 넘는 규모였어요. 이렇게 큰 규모로 중건한 것은 흥선대원군에게 약화된 왕권을 강화할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현재 경복궁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고, 지정 면적이 343,888나 되며, 많은 국보와 보물이 있는 소중한 문화유적이지요.

 

근정전과 경회루

경복궁 근정전(국보)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 근정전

 

왕이 사는 데 무슨 건물이 필요할까요? 왕의 생활방식을 이해하면 궁궐의 많은 건물들의 용도나 의미를 구조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한 나라의 왕이니까 정치활동을 하지요. 신하들과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이야기하고 결정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일을 했어요. 이렇게 정치활동에 필요한 건물로 사정전과 근정전이 있어요.

사정전이 일상적인 정치행위를 하는 곳이라면, 근정전은 아침인사를 받고 , 와의 즉위식이나 세자 책봉 같은 국가의 공식적인 큰 행사를 하는 곳이었어요. 그 가운데 근정전은 경복궁의 가장 중심영역으로서 국보로 지정되어있으며, 정치적인 활동과 권위, 정통성을 더욱 잘 나타내기 위해 근정전 주변에는 특징적인 건축양식이 많이 나타납니다.

 

왜 이건물은 '-'이고,저 건물은 '-'이예요?

은 임금이나 신이 있는 곳에만 쓰는 것이에요. 가장 격이 높은 건물에 붙었지요. 건물의 크기도 가장 웅장하고 화려해요. 절에서도 대웅전이나 무량수전과 같이 부처를 모신 건물에만 쓰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어요.

은 규모가 비슷하더라도 왕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 쓰거나 일상생활 공간에 붙였어요. ‘은 대청이 있는 집으로, ·현의 현감이 쓰는 건물 정도에 쓸 수 있는 이름이었어요. ‘는 온돌이 아니라 땅에서 사람높이 정도로 높이 올려 지은 건물을 말해요.

근정전은 왜 근정전(勤政殿)일까요? 나라를 돌보는 일에 근면하라는 뜻이지요. 왕에게 편히 쉬면서 나라 일을 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늘 수양하며, 성실하라고 요구한 것이지요.

그럼 경회루(慶會樓)는 무슨 뜻일까요? 임금이 올바른 정치를 하는 데는 함께 일하는 사람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했어요.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써 서로 만나자는 뜻에서 경회라고 한 것이지요.

 

지방에도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건물이 있나요?

강릉 임영관 삼문(국보)

강릉 임영관 삼문

 

지방에는 객사라고 하는 왕위 상징하 (殿)’자를 새긴 위패인 전패궐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과 관속들이 이를 모시고 궁궐을 향해 절하는 망궐례를 하는 곳이기 때문이에요. 전패를 훔치거나 훼손하는 일은 대역죄였기 때문에 훔친 사람은 물론 일가족이 처형되었고, 그 고을은 이웃 고을에 병합되고, 수령이 파면되는 큰 벌이 내려졌기 때문에 수령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은 전패를 훔치거나 훼손하는 일도 있었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까요?

궁궐에는 놀랍게도 궁녀와 내시만해도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낮에는 승지나 일하는 사람들이 드나들었으니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궁녀는 옷과 음식, 제사를 준비하는 등 왕실의 일상생활을 도와주는 일을 했어요. 왕에게만 궁녀와 시녀가 150명이 배치되었고, 왕비와 대비, 세자, 세자빈, 세손들에도 수십 명에서 130여 명까지 배치했어요.

내시는 왕의 명령 전달, 문을 지키기, 관리의 일을 도와주기, 궁궐의 수리와 청소 같은 왕실의 정치·행정 업무 편의를 위해 일했는데, 영조 때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몇 사람을 위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봉사했지요. 이렇게 이천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먹고 자고, 드나들며 활동했어요. 심지어 화장실도 23개 정도가 있었다고 하니, 경복궁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왜 지금은 건물이 조금밖에 없나요?

그것은 일제가 우리 나라의 권위를 짓밟기 위해 왕조국가의 상징인 궁궐을 의도적으로 훼손하면서 시작되었어요. 경복궁은 왕조국가 조선의 상징으로 정치·행정의 중심지이고, 백성들에게도 나라의 위신이고 단결의 구심이었는데, 그 권위를 무너뜨리려고한 것이었지요. 많은 부속 건물을 일본인에게 팔거나 일본의 관공서로 사용했어요. 심지어 부수거나 옮겨서 원래의 경관을 다 파괴했지요. 1915년에는 궐 안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며 전각들을 부수고 서양식 건물을 세웠어요.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전에 없던 잔디밭을 만들었어요. 지금 경복궁 안에 있는 넓은 잔디밭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지요. 여러분이 다 아는 조선총독부는 그 대표적인 예예요. 결국, 주요 건물 몇 개만 남아서 지금 모습이 된 것이지요.

경복궁은 조선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당시의 역사와 사상,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좋은 역사관이에요. 요즘 경복궁 복원을 하고 있는데, 복원을 한다면 옛날 모습을 더 잘 알 수 있을 거예요.

 

옛선인들의 집 (강릉 오죽헌)

 

현장학습으로 가까운 곳에 있는 옛날 기와집에 가 보셨지요? 그 곳에 가면 무엇을 보고 무슨 이야기를 하나요? 아마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 맞배지붕, 우진각이니 하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할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나면 그 집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나요? 집을 잘 이해하려면 누가 언제부터 살았을까?’, ‘살던 사람은 무슨 일을 했을까?’, ‘집에 얽힌 이야기는 없을까?’, ‘집의 구조는 왜 이렇게 하였을까를 따져보면서 이야기하면 훨씬 잘 알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갈 수 있는 집은 많지만, 그 중에서 오죽헌을 통해서 옛날 건물에 담긴 이야기를 찾아봐요.

 

강릉 오죽헌

강릉 오죽헌(보물)

강릉 오죽헌

강릉에 가면 오죽헌이라는 기와집이 있어요. 이 집은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해요. 우리나라 주택 건축 중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이면서 조선 중기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보물로 지정됐어요.

건축 구조를 자세히 보세요. 집의 기둥과 기둥 사이를 한 칸이라고 하는데, 기둥이 4개 있어요. 따라서 정면 3칸이지요. 측면은 기둥이 3개 있어 2칸으로 모두 6칸으로 된 일자형 집이에요. 왼쪽의 4칸은 대청이고, 오른쪽의 1칸 반은 온돌방이에요. 방 뒤에 반 칸은 툇마루고요.

 

그런데, 부엌이 없네요. 밥은 어디서 해 먹었을까요?

오죽헌은 시집간 딸이 친정에서 살 수 있게 만든 별당이었으니까 안채에 가서 먹었겠지요.

서방님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별당을 서옥이라 부른데서 생겨났어요.

율곡은 몽룡실에서 태어났고, 6살까지 살았어요. 어떻게 살았을까요? 여름에는 대청이나 마당, 뒷마당에 있는 대나무밭에서 , 겨울에는 몽룡실에서 놀았을거예요. 이렇게 오죽헌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보면, 당시 사람들의 생활사, 가족 제도, 사회 제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옛 사람들의 이름

오죽헌은 이율곡의 외사촌 권처균의 호에서 유래했어요. 집 주위에 오죽(검은 대나무)이 많아서 오죽헌이라 했던 거예요.

어릴 때 이름은 아명이라고 했고, 이 이름은 아버지, 스승, 임금만이 부를 수 있었어요. 다른 사람이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을 모욕한 것으로 생각했어요. 성인식을 하고 나서는 를 붙였어요. 그런데 이 도 윗사람이나 친구 정도가 부를 수 있었어요.

이와 달리, 누구나가 쉽게 부를 수 있게 붙인 이름이 예요. 호는 그 사람과 관련이 있는 장소에 붙이는 것, 자기 주위에 있는 사물,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뜻으로 정했어요. 호는 한 사람이 여러 개를 가지고 있기도 했어요. 오죽헌은 권처균의 호를 집에다 붙인 것인데 이런 것을 당호라 했어요.

 

오죽헌에 대나무가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대나무는 원래 따뜻한 곳에 사는 식물로, 강릉과 같은 위도의 서부지역은 대나무를 볼 수 없어요. 그런데도 대나무가 있는 것은 따뜻한 난류가 흐르는 동해와 태평양의 영향을 받아 해양성 기후를 띠기 때문이에요. 같은 위도에서 중국 대륙의 영향을 받는 서해보다 따뜻하지요. 오죽헌에서 기후 공부도 해보세요.

 

강릉 오죽헌의 특이한 역사

지금은 여자가 결혼하면 남편 집으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조선시대 중기까지도 남편이 아내 집에서 아이가 클 때까지 사는 것은 흔한 일이었어요. 만약 아들이 없으면 사위나 외손자가 제사를 지내는 외손봉사도 이상한 것이 아니었어요. 재산도 아들과 딸에게 똑같이 분배했고요.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외할아버지 이사온이 살았던 집이었지요. 사임당의 아버지는 사위와 딸이 결혼 후에도 자기 집에서 같이 살 것을 요구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어요. 그리고 원래는 외할아버지 이사온의 장인 최응현의 집이었지요. 그러니까 오죽헌도 장인이 사위에게 물려준 집이예요. 그리고 원래는 외할아버지 이사온의 장인 최응현의 집이었지요. 임진왜란 이후는 주자학의 영향으로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삼아서라도 아들을 가문의 계승자로 삼았어요. 그 결과 아버지가 아들에게 상속하는 지금의 가족제도가 정착된 것이지요.

 

낯선 풍경, 뾰족지붕과 벽돌문 (서울 명동성당, 서울 독립문)

 

개항(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외국문화가 들어왔던 시기) 이후 외국인이 들어와서 언덕 위에 서양 집을 지었을 때 서로 다른 문화를 접하면서 얼마나 충격이었겠어요. 오히려 프랑스나 러시아 공사관처럼 크게 지어서 위세를 드러냈어요. 이렇게 건축물을 보면 그때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어요. 개항 이후 들어온 외국인의 우리 문화에 대한 태도를 명동성당과 독립문을 통해 알아봐요.

 

서울 명동성당과 서울 독립문

명동성당(사적)

명동성당

서울 독립문(사적)

서울 독립문

서울 명동성당은 사적으로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에 있어요. 프랑스 신부들에 의해 18921898년에 지어졌어요. 전체길이 약 68m, 너비 29m, 높이 23m에 종탑 높이는 약 47m이며 건축 면적이 427평이죠. 여기서 보면 종탑 높이가 건물 높이의 2배 정도 되죠? 참 높은데 왜 이렇게 높게 지었을까요? 그건 신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려고 그런 것이에요. 하늘에 있는 신을 향한 마음으로 수직의 뾰족하고 높은 탑·지붕을 짓고 뾰족한 아치형 창의 스테인드글라스로 빛이 들어오게 하죠. 그럼 높은 상승감과 빛과 우아함에 끌려 몸이 가벼워지고 위로 올라가는 신비감이 느껴지는데 이렇게 지은 건축 양식을 고딕양식이라고 해요.

서울 독립문은 사적으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어요. 18961121일 주춧돌을 놓는 정초식을 하고 18971120일에 완공했어요. 그럼 왜 독립문을 세웠을까요? 갑오경장 이후 자주독립을 다짐하기 위해 세운 거예요. 누가 세웠을까요? 독립협회죠. 또 다른 의견으로 정부가 세계 만국에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표시를 보이려고 도시개조사업으로 진행한 거라는 이야기도 있어요. 그럼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벽돌을 쌓아서 만든 조적식 문으로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해서 만든 거예요. 우리의 전통 기와지붕 문하고는 참 다른 모습이죠!

 

영은문은 철폐하고 독립문을 세웠다구요?

영은문(迎恩門)은 이름에서 보이듯이 은혜를 맞이하는 문이란 뜻으로, 조선시대에 중국사신을 맞이하는 문이었어요. 이렇게 중국을 받드는 것을 사대주의라고 하는데 그것을 없애고 새로이 그곳에 독립문을 세웠어요. 독립문은 갑오경장 이후 중국, 일본 등의 나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고 애국심을 높이며 그것을 외국인들에게 당당히 보여주기 위해 건축되었어요. 그럼 영은문과 독립문의 생김새는 어땠을까요? 영은문은 주춧돌을 세우고 그 위에 기와지붕을 얹어 만든 전통문이에요. 이 영은문의 주춧돌은 사적으로 독립문 앞에 남아 있어요. 독립문은 벽돌을 쌓아서 만든 조적식 돌문 모습을 한 서양문이에요. 그런데 왜 독립문이 우리 전통 문들과 다르게 이런 서양문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독립문이 세워질 무렵 한창 서양문물이 많이 들어올 때였어요. 그때 사람들은 서양문물을 적극 수용했고 그래서 독립문도 서양문 모습으로 지었어요. 우리의 독립을 선언하는 문을 서양 건축 양식으로 지었던 거지요.

 

기와지붕 성당

성공회 서울성당(서울특별시 시도유형문화재)

성공회 서울성당

주위에서 보이는 성당이나 교회가 어떤 모습인가요? 대부분의 성당이나 교회가 뾰족지붕이지만 기와지붕을 한 성공회성당도 있어요.

영국에서 탄생한 성공회는 1889년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그리고 교리를 전파하고 성당을 세웠어요. 우리나라 건물의 특징을 의식하여 겉모양은 절이나 한옥건물 양식으로 지었어요. 측문이 있는 것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우리나라 한옥건물을 살리면서 안은 서양의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었어요.

바실리카 양식은 건물 중앙에 앉는 좌석이 있고 양옆으로 기둥이 늘어선 복도가 있고 앞에 설교하는 공간이 있는 교회 건축양식을 말해요. 겉은 한옥으로, 안은 서양 교회 건물양식으로 지은 거죠.

성공회성당은 명동성당처럼 원래 서양의 성당 건축양식 그대로 지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문화를 의식하면서 지은 성당이에요. 우리나라에 자신들의 문화를 전파하려면 우리 전통 문화를 함께 수용해야 더욱 쉽게 동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런 노력이 필요했어요.

 

서울 성곽과 사대문 (서울 숭례문, 서울 흥인지문)

 

성곽이란 무엇인가요?

서울_한양도성

서울_한양도성

()은 적들이 쳐들어오거나 자연 재해로부터 성안의 사람들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보통 성벽을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성을 쌓았을까요? 처음에는 흙을 파서 도랑을 만들거나 흙으로 쌓았으나, 점차 성을 쌓는 기술이 발달하고 마을의 규모가 커지면서 나무, , 벽돌로 쌓은 것도 생겼습니다.

 

서울에 왜 성을 쌓았을까요?

서울은 조선의 수도 한성부였어요. 이 안에 조선 정부의 중요 국가 시설이 있었고, 왕과 한양 백성들이 살았어요. 그리고 이 성벽 근처에 백성들의 집들이 있었고 집 근처에는 넓은 논과 밭이 펼쳐져 있었어요.

 

성을 어떻게 쌓았을까요?

서울 한양도성은 1396년부터 전국의 젊은이들을 동원하여 엄청난 고생 끝에 완성되었어요. 무려 118,070명이 동원되었죠. 그 이후 여러 차례 무너진 곳을 새로 쌓았답니다. 그런데 그 성벽의 바깥쪽에 보면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요. 왜 그럴까요? 여기를 누가 쌓았는지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어요. 아마 나중에 무너지면 책임지라는 의미였겠죠. 여러분도 한번 성벽 바깥쪽에서 사람들 이름을 찾아보세요.

 

서울 숭례문과 서울 흥인지문은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요?

서울 숭례문(국보)

서울 숭례문

서울 숭례문(국보)

서울 숭례문

성문은 성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로서 유사시 적의 공격을 막거나 공격하기도 하는 통로였어요. 그래서 성문은 통행이 편리한 곳에 만들어 놓아 쉽게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답니다.

서울 성곽에도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남쪽의 서울 숭례문(남대문), 동쪽의 흥인지문(동대문), 서쪽의 돈의문(서대문), 북쪽의 숙정문 등 이렇게 사대문이 있었어요. 문을 열고 닫는 것도 시간이 정해져 있었는데 북문인 숙정문은 평상시에 닫아 두었었고, 새벽 4시에 종 33번을 치면 일제히 열고 저녁 10시에 종 28번이 울리면 일제히 닫혔죠. 하지만 전차가 다니면서 성벽이 헐리기 시작하였고, 이후 성문을 열고 닫던 것도 없어지고 말았어요. 나머지 성벽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대부분 헐리어 오늘날의 모습으로 남았지요.

 

정문인 서울 숭례문을 찾아서

서울 성곽 중에서 서울 숭례문은 국보로서 서울 성곽의 남쪽에 위치하여 서울의 대문 구실을 한 문으로서 다른 문보다 더 크고 아름답습니다. 여러 차례 전쟁으로 인해 적의 공격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500여 년 동안 원래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죠.

숭례문이라는 글씨는 다른 문과 달리 세로로 써 있는데, 이는 예를 숭상하는 문이란 뜻에서 공손한 자세를 나타내고 한편 서울의 남쪽에 있는 관악산의 나쁜 기운을 누르기 위한 것이라는 전설도 있어요. 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일본 황태자가 숭례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강제로 허물어 버리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남쪽 성벽을 부수고 새로 길을 내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어요.

오늘날 숭례문이 날개를 잃고 외로이 우뚝 솟은 이유를 여러분은 이제 알겠죠?

 

서울 흥인지문을 바라보며

서울 흥인지문은 서울 성곽의 동쪽에 위치한 문으로서 보물이에요.

처음에 이 문을 만들 때 어려움이 많았어요. 이곳이 다른 지역보다 낮고, 성안의 물이 청계천을 통해서 내려가는 지점과 가까이 있어 더욱 만들기가 어려웠던 곳이죠. 그래서 낮은 지대라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글자 하나를 더 써넣어 다른 문과 다르게 4글자이지요.

흥인지문은 문 바깥쪽에 옹성(큰 성문을 엄호하려고 성문 밖에 반달 모양으로 쌓은 성)을 둘렀는데 이는 적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쌓은 것이고, 다른 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어요.

 

, 이제 성벽을 더듬어 볼까요?

서울_흥인지문(보물)

서울_흥인지문

성벽으로 올라가면 옛 서울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를 연결하여 서울 성곽이 만들어졌다는 것도 알게 되지요. 지금 서울을 바라보니 어떤 생각이 들어요? 숭례문과 흥인지문에 성벽이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데, 도로 때문에 끊겼어요. 현재 숭례문과 흥인지문의 보존 상태를 생각해보고, 어떻게 보존해야 할지 생각해 보세요.

 

의상대사와 낙산사 의상대 (낙산사 의상대)

 

강원도 양양군에 가면 '낙산사'라는 절이 있어요. 신라 시대 유명한 스님인 의상대사가 671년 지은 절이지요. 동해 해변에 위치하여 아침에 떠오르는 해돋이가 장관이랍니다. 그럼 의상대사는 어떤 스님이시며, 그는 왜 이곳에 절을 지었을까요? 의상대란 무엇일까요? ! 이제 여러분들의 궁금증을 풀어 볼까요?

 

의상대사를 아시나요?

신라인들은 부처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신라 시대에는 유명한 스님이 많았는데, 그 중에 의상대사를 빼놓을 수 없어요.

의상대사는 중국 당나라에 건너가 불교 사상을 공부했어요. 그 후 당나라에서 돌아온 의상대사는 동해안 굴속에 관음보살이 산다는 말을 듣고 열심히 기도를 드리니,7일 후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염주를 주고 또 동해의 용이 여의주를 주었지요. 다시 관음보살이 나타나서 이곳에 절을 지으라 하여 세운 것이 낙산사랍니다.

그 후 의상대사는 열심히 불교를 공부하여 불교 사상을 더욱 발전시켰어요. 이와 같이 의상대사는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관음보살을 직접 만났다는 전설을 증명하였으니 위대한 스님이 아닐까요?

 

낙산사

경주 석굴암 석굴 - 본존불 정면(국보)

낙산사 의상대

원래 이곳은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짓기 위하여 기도를 드렸던 작은 절이 있었어요. 하지만 후에 불타 버리고 1925년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 스님이 8각 모양의 지붕으로 다시 지었어요. 오늘날 볼 수 있는 의상대는 1975년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운 건물입니다. 여기서 ''란 주변의 경치를 잘 감상하기 위하여 지은 집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곳은 멀리 동해가 바라다 보이는 전망 좋은 언덕 위에 있어요.

 

여러분, 낙산사 의상대에 앉아 해돋이를 보면서 의상대사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통일의 문 (개성남대문, 평양대동문)

 

여러분들은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요. 그럼 왜 우리는 통일을 해야 하나요?

통일신라시대 이후 우리 민족은 현재의 우리나라와 북한이 위치한 이 땅에 오랫동안 통일된 나라를 이루어왔어요. 그래서 언어와 풍습, 생활양식이 똑같죠. 우리 조상들이 남긴 문화유산은 우리나라에만 또는 북한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과 북 어디에 가도 우리 조상들의 숨결과 흔적을 발견할 수 있어요. 남과 북에 남아있는 문화유산은 우리 조상들의 문화유산으로서 우리 민족이 단일 민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죠. 그래서 우리는 통일을 해야 됩니다. ! 이제 북한에 있는 문화유산을 통하여 먼 옛날 고구려와 고려의 역사를 알아보아요.

 

가보고 싶은 평양 대동문

평양 대동문

평양 대동문

우리나라에 서울이 있다면 북한에는 평양이라는 큰 도시가 있어요.

평양은 오랜 옛날부터 한반도 북부 지방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여서 유적이 많이 남아 있어요. 옛날 고구려의 수도도 평양이었지요. 그래서 평양에 성을 쌓았어요. 동쪽에 있는 대동문은 평양성의 정문으로 고구려 때 처음으로 만들었어요. 그 후 전쟁으로 불탄 것을 조선시대에 다시 세웠으며 오늘에 전해지고 있지요. 다른 성문과 똑같이 반달 모양의 무지개 문이 있고, 오고 가는 길목에 적을 효과적으로 물리치고자 성 위에 낮은 담을 쌓았지요.

정면에 '대동문'이라는 글씨가 있고 2층으로 거대하게 지은 집이라 볼수록 당당하고, 볼수록 아름다운 성문입니

 

가깝고도 먼 개성 남대문

개성 남대문

개성 남대문

개성은 고려의 도읍지였던 곳으로, 옛날에는 개경 또는 송도라 하였어요.

고려는 처음에는 철원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곧 개성으로 옮겨 470여 년 동안 나라를 이어갔어요. 북쪽 오랑캐인 거란의 침입 후 개성 주변에 성을 쌓았고, 조선 왕조 건국 후 태조 이성계는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이곳을 수도로 사용하였어요. 이때 개성 남대문이 만들어졌지요. 개성 남대문은 개성 성곽의 남쪽에 있는 성문으로서, 1394년에 처음 지었고 이후 여러 차례 수리하다가 1954년 다시 지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지요. 반달 모양의 무지개 문이 있고 날아갈 듯 가볍게 쳐든 지붕은 경쾌한 모습으로 우리나라 전통 건축의 뛰어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요.

 

숨을 쉬는 석굴암 (경주 석굴암 석굴)

 

경상북도 경주시는 옛날 신라의 수도였어요. 그래서 신라인들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지요.

경주시 동쪽에 우뚝 솟은 산이 토함산인데, 산 아래에 불국사가 있고 산꼭대기에 암자(큰절에 딸린 작은 절)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절이 바로 국보이자 유네스코가 전 세계인이 널리 아끼고 보호해야 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석굴암'입니다. 돌로 지은 집이 마치 에스키모인 들의 집 같습니다. 집안에 불상을 놓아두고 벽면에는 여러 보살들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석굴암이란 무엇일까요? 누가, 왜 만들었을까요? 언제 만들었을까요?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그리고 오랫동안 어떻게 보존되어 있었을까요?

 

석굴암이란 무엇인가요?

경주 석굴암 석굴 - 본존불 정면(국보)

경주 석굴암 석굴 - 본존불 정면

석굴암 내부의 보살입상

석굴암 내부의 보살입상

석굴암 내부의 보살입상

석굴암 내부의 보살입상

석굴암은 오랜 옛날 '석불사'라 불리었던 절입니다. 석굴암은 돌을 다듬어 쌓은 굴이에요, 동해를 향하고 있는 석굴암을 자세히 보세요. 돌로 쌓은 굴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불상이 눈에 띄죠. 연꽃 모양의 받침대 위에 앉아 있는 불상의 넓은 어깨는 위엄이 있어 보이고, 반쯤 뜬 눈, 아담한 눈썹, 엷게 미소를 띤 듯한 입, 크고 긴 귀에는 자비로움이 감돌고 있습니다.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모습에서, 우리 조상들의 돌을 다루는 기술과 조각 솜씨가 뛰어났음을 새삼 느낄 수 있어요.

 

언제, 왜 만들었을까요?

751년 신라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이 51세에 이르러 만들기 시작하였고, 20여 년 후 그가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완성시켰어요. 김대성은 전생이 있음을 믿었고, 전생의 부모님을 위하여 석굴암을 세웠다고 합니다. 신라 사람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주 강했습니다. 그래서 신라인들은 많은 절을 세워 부처를 공경했어요. 석굴암도 신라인들의 신앙심과 노력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석굴암은 여느 절처럼 나무로 집을 짓지 않고, 돌을 다듬어 쌓아 굴을 만들고 큰 돌을 얹어 놓았어요.

, 석굴암은 자연 굴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굴입니다. 그럼 어떻게 돌로 굴을 만들었을까요?

먼저 산 아래에서 큰 바위를 정확한 크기로 자른 다음 이것을 석굴이 있는 곳에 끌고 올라와 낱장의 돌들이 서로 받쳐주어 무너지지 않도록 둥글게 쌓아 올리고 뚜껑돌을 얹어 놓았어요. 그리고 쌓은 돌 바깥벽에 흙을 쌓았으며 천장으로 올라가면서 진흙을 덮고 끝으로 둥글게 기와를 얹어 빗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았습니다.

신라 때에는 사람들 모두 한마음으로 불교를 믿었어요. 그래서 부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신라인들은 왕실에서 토지와 재산을 내놓아 커다란 절을 짓게 되면, 참여해서 도와주는 것이 공덕을 닦는 일이라 하여 기꺼이 일을 했고 이렇게 해서 석굴암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오랫동안 어떻게 보존되어 있었을까요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은 동해의 바닷물을 들이마셔서 구름과 안개를 토해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동해로부터 밀려오는 물기로 습기가 많은 지역입니다. 이러한 습기와 안개 속에서 어떻게 석굴암은 천년을 원래의 모습대로 오래도록 서있을 수 있었을까요? 거기에는 신라인들의 뛰어난 과학적 지혜가 담겨 있어요.

석굴암 주변을 잘 살펴보면 그냥 땅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맑고 차가운 샘물 위에 지은 것을 알 수 있어요. 왜 샘물 위에 세웠을까요? 그래요, 서늘한 샘물이 석굴암 밑으로 흘러 바닥에만 이슬이 맺히게 한 것입니다. 또한 벽과 천장의 돌도 얇게 해서 끼워 맞춤으로써 통풍이 잘 되도록 하였어요.

하지만 일제 침략기 이후에 석굴암을 고치면서 물길을 석굴 밖으로 빼내고, 석굴암 둘레를 시멘트로 막아 버렸어요. 이후 바람도 잘 통하지 않고 빗물도 새어 굴 안에 습기가 차고 이끼도 끼게 되었어요. 현재는 물길 대신 유리벽과 온도 조절기를 설치하여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고 있어요.

이렇게 우리 조상들은 훌륭한 건축 기술과 조각 솜씨로 석굴암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원리를 이용한 과학적인 방법으로 완벽하게 보존하는 방법까지도 생각해 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네스코에서는 석굴암을 인류 공동의 보물로 길이 보존하기 위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어요.

석굴암을 만드는 과정과 기술의 우수성을 알고 나니 어떠세요? 이제부터라도 석굴암을 잘 보존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의 노력으로 석굴암이 잘 보존되어 후손들이 천년의 모습 그대로 볼 수 있다면 아주 보람 있는 일이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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