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릉 이야기
서울 헌릉과 인릉
헌릉(獻陵, 태종과 원경왕후)
위치 : 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34
조성 연도 : 1420년(세종 2), 1422년(세종 4)
왕릉 형식 : 쌍릉

헌릉과 인릉_헌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헌릉과 인릉_헌릉_문석인과 무석인(궁능유적본부)

헌릉과 인릉_헌릉_병풍석(궁능유적본부)

헌릉과 인릉_헌릉_석마(궁능유적본부)

헌릉과 인릉_헌릉_석양과 석호(궁능유적본부)

헌릉과 인릉_헌릉_신도비(궁능유적본부)

헌릉과 인릉_헌릉_전경(궁능유적본부)
▷ 헌릉(獻陵) 이야기
헌릉은 조선 3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이다. 헌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태종, 오른쪽(동쪽)이 원경왕후의 능이다. 1420년(세종 2) 원경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원경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 태종은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었다. 2년 후 1422년(세종 4)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원경왕후의 능 서쪽에 능을 조성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능침 봉분은 모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과 영저(금강저) 및 영탁(금강령) 등을 새겼다. 봉분 주변으로는 문석인, 무석인, 석마, 정중석,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특히 문석인, 무석인, 석마, 석양, 석호 등은 다른 왕릉에 비해 두 배 더 배치되었는데, 이는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玄·正陵) 제도를 따른 것이다.
능침 아래의 신도비각에는 두 개의 신도비가 있는데, 태종이 세상을 떠난 후 세운 신도비와 1695년(숙종 21)에 원래 신도비가 훼손되어 다시 세운 신도비가 있다.
▷ 태종(太宗) 이야기
태종(재세 : 1367년 음력 5월 16일 ~ 1422년 음력 5월 10일, 재위 : 1400년 음력 11월 13일 ~ 1418년 음력 8월 8일)은 태조와 신의황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1367년(고려 공민왕 16) 함흥 귀주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태종은 1383년(고려 우왕 9)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조선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왕이다.
1392년 아버지 태조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고, 조선 건국 후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신덕황후와 정도전 등과 대립하여 왕세자 책봉에서 제외되었고, 왕세자 자리는 신덕황후의 차남 방석(의안대군)이 오르게 되었다. 더불어 정도전이 재상 중심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왕자의 사병을 혁파하려 하자, 태종은 1398년(태조 7) 친형제들과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제거하고, 왕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제거하였다.(제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 이 사건으로 태조는 둘째 아들 영안군 방과(정종)를 왕세자로 책봉한 후 바로 왕위를 물려주었다. 2년 후 1400년(정종 2) 제1차 왕자의 난의 불공평한 논공행상으로 불만을 품고 있던 박포와 태종의 넷째 형 회안군 방간이 난을 일으켰고(제2차 왕자의 난, 박포의 난), 이 난을 수습한 태종을 왕세자로 책봉된 후 같은 해 11월 개경(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창덕궁을 지었으며, 1405년(태종 5)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다시 옮겼다. 재위기간 동안 중앙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하고, 사병을 폐지하여 군사권을 장악하였으며 전국의 인구를 파악하여 조세 징수와 군역 부과에 활용하는 호패법을 실시하였다. 정치적으로 육조직계제를 실시하고, 외척 세력을 견제하는 등 강력한 왕권강화를 이룩하여 조선 왕조의 기반을 닦는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1418년(태종 18)에는 장남 양녕대군을 왕세자에서 폐위한 후,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을 왕세자로 삼았으며, 2개월 뒤에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준 후 태상왕이 되었다. 1422년(세종 4) 연화방 신궁(수강궁, 현 창경궁)에서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 원경왕후(元敬王后) 이야기
원경왕후 민씨(재세 : 1365년 음력 7월 11일 ~ 1420년 음력 7월 10일)는 본관이 여흥인 여흥부원군 민제와 삼한국대부인 송씨의 딸로 1365년(고려 공민왕 14) 송경 철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382년(고려 우왕 8) 태종과 혼인하였고, 조선 개국 후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해졌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이 정도전 등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원경왕후의 도움이 컸다. 난이 일어나기 열흘 전, 정도전 일파는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혁파하였다. 이때 사병을 거느린 왕자들은 병사뿐만 아니라 지니고 있던 무기를 모두 내놓았어야 했다. 그러나 원경왕후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얼마간의 사병과 무기를 친정집에 숨겨두었다. 1398년 음력 8월 26일, 당시 태조의 병환이 깊어 왕자들은 근정전 문밖 서쪽 행랑에 모여 숙직하고 있었다. 원경왕후는 집사를 보내 자신이 갑자기 복통이 심하다는 핑계를 들어 태종을 불러내었다. 그 후 태종은 집에 와서 갑옷을 입고 난을 준비하였고, 원경왕후는 친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숨겨둔 사병과 무기를 풀어 태종에게 내주었다. 결과적으로 난은 성공하였고, 태종은 왕위 계승을 위한 권력을 얻게 되었다.
이후 1400년(정종 2)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원경왕후는 왕비(정비)가 되었다. 그러나 태종은 권력의 분산과 왕권 강화를 위하여 외척세력을 견제하여 원경왕후의 남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모두 제거하면서 원경왕후와 불화가 극심해졌다. 1418년(태종 18) 태종이 태상왕으로 물러나고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후덕왕대비가 되었으며, 1420년(세종 2) 수강궁(현 창경궁) 별전에서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서울 太宗 獻陵 神道碑)
신도비는 왕과 왕비 등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비신(碑身, 몸통)과 귀부(龜趺, 거북이 받침), 이수(螭首, 용을 새긴 머릿돌)를 갖추고 있다. 헌릉 신도비는 1422년(세종 4) 태종이 세상을 떠나고 헌릉을 조성한 2년 뒤(1424년)에 세운 것으로 앞면의 비문은 변계량이 짓고, 성개의 글씨로 썼으며, 전액(篆額, 전서체로 쓴 머리글)은 권홍의 글씨이다. 뒷면의 비문은 윤회가 지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글자가 마모되고 비석이 훼손되자 1695년(숙종 21) 신도비를 다시 제작하여 원래 신도비 오른쪽에 세웠다. 헌릉 신도비는 태조 건원릉 신도비와 같이 조선 초기에 제작된 신도비로, 역사 연구 활용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서울 헌릉과 인릉
인릉(仁陵, 순조와 순원황후)
위치 : 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34
조성 연도 : 1835년(헌종 1), 1856년(철종 7), 1857년(철종 8)
왕릉 형식 : 합장릉

헌릉과 인릉_인릉_능침(궁능유적본부)

헌릉과 인릉_인릉_문석인과 무석인(궁능유적본부)

헌릉과 인릉_인릉_비각(궁능유적본부)

헌릉과 인릉_인릉_석호(궁능유적본부)

헌릉과 인릉_인릉_장명등(궁능유적본부)

헌릉과 인릉_인릉_전경(궁능유적본부)

헌릉과 인릉_인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 인릉(仁陵) 이야기
인릉은 조선 23대 순조와 순원황후 김씨의 능이다. 인릉은 한 봉분 안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으로,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에 따라 앞에서 봤을 때 왼쪽에 순조, 오른쪽에 순원황후를 모셨다.
인릉은 1834년(순조 34) 순조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 파주 교하의 장릉(인조) 근처에 조성되었다. 그러나 풍수상 불길하다고 하여 1856년(철종 6)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옮긴 인릉 자리에는 원래 세종의 옛 영릉이 있던 곳이었는데, 인릉을 공사하면서 주변 땅에 묻혀 있던 세종의 옛 영릉 석물과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옛 희릉 석물을 다시 꺼내 다듬어서 사용하였다. 다시 사용한 석물은 문석인, 무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이며, 일부 석양과 망주석, 석마는 새로 제작하였다. 이는 인릉을 옮긴 후 편찬한 『인릉천봉산릉도감의궤』에 기록되어 있다. 인릉을 옮긴 후 다음 해 순원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인릉에 합장되었다.
능침 아래 비각 안에는 두 기의 표석이 있는데 1비는 조선시대에 세운 표석(순조대왕, 순원왕후)이고, 2비는 대한제국 때 세운 표석(순조숙황제, 순원숙황후)이다.
▷ 순조(純祖) 이야기
순조(재세 : 1790년 음력 6월 18일 ~ 1834년 음력 11월 13일, 재위 : 1800년 음력 7월 4일 ~ 1834년 음력 11월 13일)는 정조와 유비(綏妃) 박씨의 아들로 1790년(정조 14)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나, 1800년(정조 24)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1세의 나이로 창덕궁 인정문에서 왕위에 올라 당시 대왕대비였던 정순왕후(영조의 두 번째 왕비)가 1803년(순조 3)까지 수렴청정을 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대규모 천주교 탄압(신유박해)을 시작으로, 외척 세도정치로 부정부패가 심해지면서 정치적으로 혼란하였고, 수해와 전염병 등으로 민심이 어지러워져 홍경래의 난(1811년) 등 민란으로 인해 사회적으로도 혼란하였다. 순조는 세도정치를 견제하기 위해 아들 문조(익종,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여 수습하려 하였으나 문조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무산되고 말았다. 그 밖에 이 시기에 『만기요람』과 『홍제전서』 등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1834년(순조 34) 경희궁 회상전에서 45세로 세상을 떠나, 묘호(廟號, 종묘에 붙여지는 이름)를 순종(純宗)이라 하였다가 1857년(철종 8) 묘호를 순조로 바꾸었다. 이후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로 추존되었다.
▷ 순원황후(純元皇后) 이야기
순원황후 김씨(재세 : 1789년 음력 5월 15일 ~ 1857년 음력 8월 4일)는 본관이 안동인 영안부원군 김조순과 청양부부인 심씨의 딸로 1789년(정조 13) 한성부 양생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800년(정조 24) 왕세자빈으로 간택되는 것이 확실하였으나, 정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간택이 중단되었다. 이후 1802년(순조 2)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순조와의 사이에서 1남(추존 문조, 효명세자) 3녀(명온·복온·덕온공주)를 낳았다.
1834년 손자 헌종이 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리고 헌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장조(사도세자)의 손자 전계대원군의 아들 원범(철종)을 양자로 입양하여 왕위를 잇게 한 후 다시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는 조선의 왕비 중 유일하게 두 번 수렴청정을 한 사례이다. 이후 1857년(철종 8) 창덕궁 양심합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로 추존되었다.
여주 영릉과 영릉
영릉(英陵, 세종과 소헌왕후)
위치 : 경기 여주시 세종대왕면 영릉로 269-10
조성 연도 : 1446년(세종 28), 1450년(문종 즉위), 1469년(예종 1)
왕릉 형식 : 합장릉

영릉과 영릉_세종 영릉_난간석(궁능유적본부)

영릉과 영릉_세종 영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영릉과 영릉_세종 영릉_능침(궁능유적본부)

영릉과 영릉_세종 영릉_무석인(궁능유적본부)

영릉과 영릉_세종 영릉_문석인(궁능유적본부)

영릉과 영릉_세종 영릉_석호(궁능유적본부)

영릉과 영릉_세종 영릉_재실(궁능유적본부)

영릉과 영릉_세종 영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영릉과 영릉_세종 영릉_표석(궁능유적본부)

영릉과 영릉_세종 영릉_홍살문(궁능유적본부)
▷ 영릉(英陵) 이야기
영릉(英陵)은 조선 4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능이다. 영릉은 조선왕릉 중 최초로 같은 봉분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의 형식으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세종, 오른쪽에 소헌왕후를 모셨다. 능침 배치는 『국조오례의』의 예를 따랐으나,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병풍석이 생략되자 병풍석에 새기는 십이지신상은 난간석에 문자로 새겼다. 내부 방은 석실(돌방) 대신 회격(灰隔, 석회와 가는모래, 황토를 섞은 혼합 물질)으로 만들었고, 석상(혼유석)은 2개를 배치하였다.
원래 영릉은 1446년(세종 28) 소헌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헌릉과 인릉 경내 인릉 자리에 조성되었고, 4년 뒤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 영릉에 합장하였다. 그러나 영릉이 풍수상 불길하다고 하여 세조 대부터 영릉을 옮기려고 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가 1469년(예종 1)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옮기면서 옛 영릉에 있던 능침 석물과 신도비는 땅에 묻었고, 여주로 옮기면서 능침의 석물은 다시 만들었다.
▷ 세종(世宗) 이야기
세종(재세 : 1397년 음력 4월 10일 ~ 1450년 음력 2월 17일, 재위 : 1418년 음력 8월 11일 ~ 1450년 음력 2월 17일)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1397년(태조 6) 준수방 본궁에서 태어났다. 1408년(태종 8) 충녕군에 봉해졌고, 1412년(태종 12)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되었다. 1418년(태종 18) 큰형 양녕대군이 왕세자 자리에서 폐위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두 달 뒤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세종은 즉위 후 이듬해 집현전을 설치하여 많은 학자들을 등용하였다.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각별한 관계에 대한 일화는 지금도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어느 날 세종이 밤늦도록 책을 읽다가 집현전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내시로 하여금 누가 밤늦도록 집현전에서 책을 읽고 있는지 보고오라 명하였다. 이에 내시는 신숙주가 홀로 독서하고 있다 아뢰었다. 세종은 그 말을 듣고 친히 집현전에 나가 그 광경을 살폈으나, 신숙주는 세종이 온 것을 모르고 계속 독서에 열중하였다. 세종은 새벽이 되도록 밖에서 글 읽는 소리를 경청하다 신숙주가 고단하여 책을 읽다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고 추운 날씨에 독서에 열중한 신하에게 자신의 어의를 벗어 덮어주고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깨어난 신숙주가 자신의 등에 씌워진 어의를 보고서야 전날 밤 왕이 행차하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감복하여 왕의 침전을 향해 절을 하였으며 더욱더 학문연구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세종은 재위기간 동안 혼천의(渾天儀) 등 과학기구를 발명하였고,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으며 4군 6진을 개척하여 조선의 국경을 확장하였다. 또 여러 활자를 제조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고, 국가의례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1446년(세종 28)에는 우리나라 고유 문자체계인 훈민정음(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창제하는 등 정치·경제·문화·과학·군사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이후 1450년 영응대군 사저인 동별궁에서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 소헌왕후(昭憲王后) 이야기
소헌왕후 심씨(재세 : 1395년 음력 9월 28일 ~ 1446년 음력 3월 24일)는 본관이 청송인 청천부원군 심온과 삼한국대부인 안씨의 딸로 1395년(태조 4)에 태어났다. 1408년(태종 8) 당시 충녕군이었던 세종과 혼인하여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고, 1417년(태종 17) 삼한국대부인이 되었다가 1년 뒤에 세종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왕세자빈(경빈)에 되었다. 같은 해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공비(恭妃)가 되었고, 1432년(세종 14)에 왕비가 되었다.
소헌왕후는 세종 즉위 초 태종의 외척세력 견제로 인해 친정이 화를 입었고, 이 과정에서 아버지 심온과 작은아버지 심정이 죽었다. 이때 소헌왕후 본인도 폐위될 뻔하였으나 세종의 보호로 무사하였다. 세종과의 사이에서 8남(문종·세조·안평·임영·광평·금성·평원·영응대군) 2녀(정소·정의공주)를 낳았으며, 1446년(세종 28) 둘째 아들 수양대군(세조)의 사저에서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종은 매우 슬퍼하며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에게 부처님과 그 가족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하여 책을 내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수양대군은 김수온 등의 도움을 받아 『석가보』, 『법화경』 등에서 일부를 발췌하고 한글로 옮겨 『석보상절』을 편찬하였다. 이를 받아본 세종은 직접 『석보상절』의 내용을 한글 노랫말로 옮겨 악장체 『월인천강지곡』을 만들었다.
여주 영릉과 영릉
영릉(寧陵, 효종과 인선왕후)
위치 : 경기 여주시 세종대왕면 영릉로 269-10
조성 연도 : 1659년(현종 즉위), 1673년(현종 14), 1674(현종 15)
왕릉 형식 : 동원상하릉

영릉과 영릉_효종 영릉(인선왕후)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영릉과 영릉_효종 영릉(인선왕후)_능침(궁능유적본부)

영릉과 영릉_효종 영릉(효종)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영릉과 영릉_효종 영릉(효종)_능침(궁능유적본부)

영릉과 영릉_효종 영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영릉과 영릉_효종 영릉_재실(궁능유적본부)

영릉과 영릉_효종 영릉_전경(궁능유적본부)

영릉과 영릉_효종 영릉_표석(궁능유적본부)

영릉과 영릉_효종 영릉_향로와 어로(궁능유적본부)

영릉과 영릉_효종 영릉_회양목(궁능유적본부)
▷ 영릉(寧陵) 이야기
영릉(寧陵)은 조선 17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이다. 영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위아래로 조성한 최초의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위에 위치한 봉분이 효종의 능이고, 아래 봉분이 인선왕후의 능이다. 이렇게 능을 위아래로 조성한 이유는 쌍릉의 형태처럼 봉분을 나란히 조성할 경우, 풍수지리상 생기가 왕성한 정혈(正穴)이 벗어나기 때문에 위아래로 배치한 것이다.
원래 영릉은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현 구리 동구릉 내 원릉 자리에 조성되었으나, 조성 직후부터 능침 석물에 문제가 생겨 보수가 계속되자 능 안에 빗물의 피해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1673년(현종 14)에 옮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능을 옮길 때 방을 열어보니 물이 들어온 흔적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두 능의 봉분은 모두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렀고, 난간석에 십이지신을 문자로 새겼다. 효종의 능침과 인선왕후 능침 석물은 각각 조성되었으나 곡장은 효종의 능침에만 둘렀다. 능침 아래의 비각에는 표석이 있는데, 조선왕릉 중 최초로 세운 표석이다. 조선 전기 세종의 옛 영릉까지는 신도비를 세웠으나 문종의 현릉을 조성할 때 신도비를 없애었다. 이후 효종의 영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표석을 세울 필요성이 논의되어 1682년(숙종 8)에 세웠다. 영릉 입구에 있는 재실은 제향을 준비하는 건물로 현재 조선왕릉의 재실 중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다.
▷ 효종(孝宗) 이야기
효종(재세 : 1619년 음력 5월 22일 ~ 1659년 음력 5월 4일, 재위 : 1649년 음력 5월 13일 ~ 1659년 음력 5월 4일)는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둘째 아들로 1619년(광해군 11) 경행방 어의궁에서 태어났다. 1623년 아버지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1626년(인조 4)에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듬해 형 소현세자와 부인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었는데, 형 소현세자와 다르게 효종은 볼모생활을 하면서 청나라에 원한을 품게 되었다. 효종은 1645년(인조 23) 형 소현세자가 먼저 귀국 후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나자 바로 귀국하여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649년 아버지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창덕궁 인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효종은 두 차례의 호란(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사회의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해 대동법을 실시하였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였으며,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서양식 무기를 제조하게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군제를 개편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하여 청나라를 향한 북벌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의 세력이 강해져 실현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1654년 청나라의 요청으로 청나라와 러시아의 전쟁(나선정벌)에 출정하였다. 이후 1659년(효종 10) 창덕궁 대조전에서 41세로 세상을 떠났다.
▷ 인선왕후(仁宣王后) 이야기
인선왕후 장씨(재세 : 1618년 음력 12월 25일 ~ 1674년 음력 2월 24일)는 본관이 덕수인 신풍부원군 장유와 영가부부인 김씨의 딸로 1618년(광해군 10)에 경기도 안산군(현 시흥시)에서 태어났다. 1631년(인조 9) 당시 봉림대군이었던 효종과 혼인하여 풍안부부인(豐安府夫人)이 되었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의 결과로 남편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가게 되었다. 1645년(인조 23) 남편 효종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왕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효종과의 사이에서 1남(현종) 6녀(숙신·숙안·숙명·숙휘·숙정·숙경공주)를 낳았으며, 1659년 아들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 효숙왕대비(孝肅王大妃)가 되었다. 이후 1674년(현종 15) 경덕궁(현 경희궁) 회상전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 여주 효종 영릉재실(驪州 孝宗 寧陵齋室)
재실은 왕릉을 관리하는 관리자(종9품 참봉이나 종5품 영)들이 지내며 업무를 보는 곳이자 제향을 준비하는 곳이다. 영릉 재실은 효종 영릉이 현 동구릉 경내 영조의 원릉 자리에 조성될 당시에 지었던 건물로, 1673년(현종 14) 영릉을 여주로 옮길 때 같이 옮겨온 것이다. 조선왕릉의 재실 중 안향청, 제기고, 행랑 등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재실의 기본형태가 잘 남아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 여주 효종대왕릉(영릉) 회양목(驪州 孝宗大王陵(寧陵) 淮陽木)
회양목은 회양목과의 나무로 잎이 두껍고 타원형이며 꽃은 4∼5월에 피고 열매는 6∼7월에 갈색으로 익는 사철 푸른 나무이다. 원래 회양목은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인데 효종 영릉 회양목은 키가 크고, 다른 회양목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생물학적인 가치가 큰 나무이다. 이 회양목은 1673년(현종 14) 현 구리 동구릉 내에 있던 효종의 영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함께 옮겨져 재실에서 300여 년 동안 자란 나무로, 2005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영월 장릉
장릉(莊陵, 단종)
위치 : 강원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조성 연도 : 1457년(세조 3), 1516년(중종 11), 1580년(선조 13), 1698년(숙종 24)
왕릉 형식 : 단릉

영월 장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영월 장릉_능침(궁능유적본부)

영월 장릉_문석인(궁능유적본부)

영월 장릉_박충원 낙촌비각(궁능유적본부)

영월 장릉_비각(궁능유적본부)

영월 장릉_엄흥도 정려각(궁능유적본부)

영월 장릉_장판옥(궁능유적본부)

영월 장릉_재실(궁능유적본부)

영월 장릉_전경(궁능유적본부)

영월 장릉_홍살문(궁능유적본부)
▷ 장릉(莊陵) 이야기
장릉은 조선 6대 단종의 능이다. 단종이 1457년(세조 3) 노산군(魯山君)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단종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현재의 자리에 가매장하였다. 이후 1516년(중종 11) 묘를 찾아 봉분을 만들었고, 1580년(선조 13)에 석물을 세운 후 제사를 지냈다. 1698년(숙종 24) 단종으로 왕의 신분이 회복되어 능의 이름을 장릉이라 하고,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조성하였다.
능침은 추존왕릉 제도에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 무석인 등을 생략하여 간소하게 조성하였고, 홍살문과 정자각, 비각, 수라간과 수복방, 재실 등은 지형에 맞게 능침 서쪽 아래에 조성하였다. 비각 안에는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朝鮮國 端宗大王 莊陵)’이라고 새겨진 표석이 있고, 향로와 어로는 지형에 맞게 조성하여 한 번 꺾여있다.
장릉은 일반적인 조선왕릉과 다르게 단종의 충신들을 위한 건조물이 있다. 장릉 입구에는 노산군묘을 찾아 제사를 올린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의 뜻을 기린 낙촌비각(駱村碑閣), 재실 옆에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묘를 만든 엄흥도의 정려각(旌閭閣),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충신, 환관, 궁녀, 노비 등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과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配食壇)이 있다.
▷ 단종(端宗) 이야기
단종(재세 : 1441년 음력 7월 23일 ~ 1457년 음력 10월 21일(또는 24일), 재위 : 1452년 음력 5월 18일 ~ 1455년 음력 윤6월 11일)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아들로 1441년(세종 23) 경복궁 자선당에서 태어났으나, 태어난 다음날 어머니 현덕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1448년(세종 30)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아버지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가 되었으며, 1452년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12세의 나이로 경복궁 근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당시 수렴청정을 할 대비(大妃)가 없어 고명대신 김종서 등이 단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숙부 수양대군(세조)이 불안정한 왕권을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조정을 장악하였다. 2년 뒤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박팽년 등이 단종 복위 운동(사육신 사건)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고,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후 송현수(단종의 장인) 등도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으나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1457년(세조 3) 노산군(魯山君)으로 신분이 낮아져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생활하던 중 홍수로 강물이 불어나자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같은 해 숙부 금성대군 등이 계획한 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결국 17세로 세상을 떠났다.『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자결하자 예로써 장례를 치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는 그 누구도 시신을 수습하지 않아 영월호장 엄흥도가 노산군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현재의 자리에 가매장하였다. 이후 1681년(숙종 7)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되었고, 1698년(숙종 24) 왕으로 신분이 회복되어 묘호(廟號, 종묘에 붙여지는 이름)를 단종(端宗)이라 하고 종묘에 신주를 모셨다.
남양주 광릉
광릉(光陵, 세조와 정희왕후)
위치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354
조성 연도 : 1468년(예종 즉위), 1483년(성종 14)
왕릉 형식 : 동원이강릉

광릉(세조)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광릉(세조)_능침(궁능유적본부)

광릉(세조)_문석인(궁능유적본부)

광릉(정희왕후)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광릉(정희왕후)_능침(궁능유적본부)

광릉(정희왕후)_무석인(궁능유적본부)

광릉_전경(궁능유적본부)

광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광릉_표석(궁능유적본부)
▷ 광릉(光陵) 이야기
광릉은 조선 7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능이다. 광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으로 조선왕릉 중 최초로 조성된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세조, 오른쪽 언덕(동쪽)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광릉은 1468년(예종 즉위)에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조성되었다. 본래 이 자리는 동래정씨 정창손의 선대묘역이 있던 자리였으나, 광릉이 조성되면서 동래정씨 묘역은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사대석(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에 따라 능 내부의 방을 석실 대신 회격(灰隔, 석회와 가는모래, 황토를 섞은 혼합 물질)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왕릉 공사에 드는 비용과 인원을 감소시켰다. 이 방법은 광릉 이후에 조성된 왕릉에 모두 적용되었다. 또, 병풍석이 생략되면서 병풍석에 새기는 십이지신상을 난간석에 새겼다. 이후 1483년(성종 14) 정희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광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이때 능의 이름을 동광릉(東光陵)으로 정하려고 하였으나 광릉과 같은 능역에 있다하여 광릉으로 합쳤고, 정자각은 두 능 사이로 옮겨지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는 조선시대에는 조성되었으나 현재는 소실되었고, 입구에는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하마비(下馬碑)가 남아 있다.
▷ 세조(世祖) 이야기
세조(재세 : 1417년 음력 9월 29일 ~ 1468년 음력 9월 8일, 재위 : 1455년 음력 윤6월 11일 ~ 1468년 음력 9월 7일)는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둘째 아들로 1417년(태종 17) 사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세종이 즉위하자 1428년(세종 10)에 진평대군에 봉해졌고, 그 후 함평대군, 진양대군을 거쳐 1445년(세종 27) 수양대군(首陽大君)에 봉해졌다.
대군 시절에 총명하고 영특하여 학문이 높았고 무예에도 뛰어나 아버지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세종 시기에는 세종의 명을 받아 불교 서적 번역을 담당하였고,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참여하였다. 문종이 즉위한 후에는 관습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단종이 왕위에 오른 후 왕실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으며, 2년 뒤인 1455년에 단종의 양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왕권 강화를 위하여 육조직계제를 단행하였고 호패법을 복원하였으며, 지방의 군사조직을 강화하여 방어체제를 강화하였다. 또, 현직 관료들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법(職田法)을 실시하여 토지제도를 개혁하였고,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즉위 초에 여러 차례의 단종복위 운동으로 사육신 등과 수많은 정적들을 제거하였고, 단종을 폐위시켜 죽게 하기도 하였다. 재위 후반에는 왕위찬탈에 대한 뉘우침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원각사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 왕세자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하루 뒤에 수강궁 정침(현 창경궁)에서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 정희왕후(貞熹王后) 이야기
정희왕후 윤씨(재세 : 1418년 음력 11월 11일 ~ 1483년 음력 3월 30일)는 본관이 파평인 파평부원군 윤번과 흥녕부대부인 이씨의 딸로 1418년(세종 즉위) 홍천 공아에서 태어났다. 1428년(세종 10) 진평(수양)대군과 혼인하여 낙랑부대부인에 봉해졌다.
조선 선조 대의 이기(李墍)가 쓴 글들을 모은 문집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정희왕후가 수양대군의 부인이 된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세종대에 수양대군의 부인을 간택하기 위하여 궁궐의 상궁들이 윤번의 집으로 찾아갔는데, 이때 수양대군 부인의 후보자는 정희왕후의 언니였다고 한다. 그런데 궁중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말에 정희왕후가 어머니 이씨 뒤에 숨어서 어른들 이야기를 듣다가 상궁의 눈에 띄었다고 한다. 언니보다 정희왕후의 성품이 더 뛰어나 수양대군의 부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이 일어날 당시 사전 정보가 누설되어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정희왕후가 손수 갑옷을 입혀줄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고 한다.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예종이 즉위한 후에는 왕태비가 되었으며, 내지(內旨)를 내려 간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이후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당시 예종의 아들(제안대군)이 나이가 어려 왕위에 오를 수 없어, 왕실의 어른이었던 정희왕후는 일찍 죽은 첫째 아들 의경세자(추존 덕종)의 둘째 아들 잘산군(성종)을 왕으로 지목하여 즉위하게 하였다. 그리고 12살의 나이의 왕을 대신하여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다. 수렴청정 기간 동안 성종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성종의 태평 치세의 발판을 닦아주었고, 7년 후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1483년(성종 14) 온양 행궁에서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양 서오릉

서오릉_경릉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오릉_대빈묘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오릉_명릉(인원왕후)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수경원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순창원_정자각(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익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창릉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오릉_홍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서오릉(西五陵)은 ‘서쪽에 있는 5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구리 동구릉 다음으로 규모가 큰 조선왕실의 왕릉군이다. 1457년(세조 3) 세조의 첫째 아들 의경세자(추존 덕종)의 의묘(懿墓, 경릉)가 처음 조성되었고, 1470년(성종 1) 예종의 창릉(昌陵)이 왕릉으로서 최초로 조성되었다. 이후 순회세자의 순창원(順昌園), 인경왕후의 익릉(翼陵), 숙종의 명릉(明陵), 정성왕후의 홍릉( 弘陵)이 차례로 조성되어 조선시대에는 5기의 능과 1기의 원이 조성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영빈 이씨의 수경원(綏慶園)과 옥산부대빈 장씨의 대빈묘(大嬪墓)가 옮겨져 지금의 서오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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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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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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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7년(세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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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첫째 아들 의경세자의 의묘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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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0년(성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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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경세자를 왕으로 추존하고 의묘를 경릉으로 높임
예종의 창릉 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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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9년(연산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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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두 번째 왕비 안순왕후의 능을 창릉 동쪽 언덕에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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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년(연산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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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 덕종 왕비 소혜왕후의 능을 경릉 서쪽 언덕에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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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3년(명종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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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아들 순회세자의 묘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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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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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회세자 부인 공회빈 윤씨가 세상을 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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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1년(숙종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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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익릉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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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년(숙종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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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의 명릉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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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년(경종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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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능을 명릉 왼쪽 자리에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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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7년(영조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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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홍릉 조성
숙종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의 능을 명릉 서쪽 언덕에 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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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고종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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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회세자의 묘를 순창원으로 높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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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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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 장조 생모 영빈 이씨의 수경원을 신촌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김
경종 생모 옥산부대빈 장씨의 대빈묘를 광주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김 |
고양 서오릉
경릉(敬陵, 추존 덕종과 소혜왕후)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조성 연도 : 1457년(세조 3), 1470년(성종 1), 1504년(연산군 10)
왕릉 형식 : 동원이강릉

서오릉_경릉(덕종)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서오릉_경릉(덕종)_능침(궁능유적본부)

서오릉_경릉(덕종)_문석인(궁능유적본부)

서오릉_경릉(소혜왕후)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서오릉_경릉(소혜왕후)_능침(궁능유적본부)

서오릉_경릉(소혜왕후)_무석인(궁능유적본부)

서오릉_경릉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오릉_경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서오릉_경릉_표석(궁능유적본부)

서오릉_경릉_홍살문(궁능유적본부)
고양 서오릉
창릉(昌陵, 예종과 안순왕후)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조성 연도 : 1470년(성종 1), 1499년(연산군 5)
왕릉 형식 : 동원이강릉

서오릉_창릉(안순왕후)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창릉(안순왕후)_능침(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창릉(안순왕후)_무석인(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창릉(예종)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창릉(예종)_능침(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창릉(예종)_무석인(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창릉_비각(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창릉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창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창릉_향로와 어로(궁능유적본부)
▷ 창릉(昌陵) 이야기
창릉은 조선 8대 예종과 두 번째 왕비 안순왕후 한씨의 능이다. 창릉은 서오릉에서 왕릉으로 조성된 최초의 능으로,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동쪽)이 예종, 오른쪽 언덕(서쪽)이 안순왕후의 능이다.
창릉은 1469년(예종 1)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 의경세자의 의묘(경릉) 북쪽에 조성되었고, 1498년(연산군 4) 안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 창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창릉의 두 능침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석물의 상설은 예종과 안순왕후의 능이 비슷하다. 예종의 능침 석상(혼유석)을 받치는 고석(鼓石)의 무늬는 일반 조선왕릉의 도깨비 무늬가 아닌 북고리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왕릉 중 유일하다.
▷ 예종(睿宗) 이야기
예종(재세 : 1450년 음력 1월 1일 ~ 1469년 음력 11월 28일, 재위 : 1468년 음력 9월 7일 ~ 1469년 음력 11월 28일)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둘째 아들로 1450년(세종 32) 수양대군 사저에서 태어났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고, 형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20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1457년(세조 3) 왕세자가 되었다. 1468년(세조 14) 아버지 세조의 양위를 받아 수강궁(현 창경궁) 중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 동안 남이의 옥사를 수습하였고, 세종의 영릉을 현 여주로 옮겼다. 또 세조 대부터 편찬하던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반포를 앞두었으나, 재위 1여 년 만에 경복궁 자미당에서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는 예종이 아버지 세조가 세상을 떠난 것에 충격을 받아 건강을 해쳤다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종이 왕세자일 때 세조가 병환이 생기니 수라상을 보살피고 약을 먼저 맛보며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한잠도 못 잔 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 세조가 돌아가매 슬픔이 지나쳐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건강을 해치게 되어 이해 겨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는 효성이 지극했던 예종의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 안순왕후(安順王后) 이야기
안순왕후 한씨(재세 : ?년 음력 3월 12일 ~ 1498년 음력 12월 23일)는 본관이 청주인 청천부원군 한백륜과 서하부부인 임씨의 딸로 태어났다. 1463년(세조 9) 왕세자의 후궁인 소훈(昭訓, 내명부 세자궁 종5품)이 되었고,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예종이 세상을 떠난 후 원자인 제안대군이 왕위를 이어받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잘산군(성종)이 예종의 양자로 입양되어 왕위에 올랐다. 성종이 즉위한 후 인혜(왕)대비가 되었고, 연산군 즉위 후 대왕대비가 되었다. 1498년(연산군 4) 창경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양 서오릉
명릉(明陵, 숙종과 인현왕후·인원왕후)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조성 연도 : 1701년(숙종 27), 1720년(경종 즉위), 1757년(영조 33)
왕릉 형식 : 동원이강릉

서오릉_명릉(숙종과 인현왕후)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서오릉_명릉(숙종과 인현왕후)_능침(궁능유적본부)

서오릉_명릉(숙종과 인현왕후)_문석인과 무석인(궁능유적본부)

서오릉_명릉(숙종과 인현왕후)_석상(혼유석)(궁능유적본부)

서오릉_명릉(인원왕후)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서오릉_명릉(인원왕후)_능침(궁능유적본부)

서오릉_명릉(인원왕후)_무석인(궁능유적본부)

서오릉_명릉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오릉_명릉_표석(궁능유적본부)

서오릉_명릉_향로와 어로(궁능유적본부)
명릉(明陵) 이야기
명릉은 조선 19대 숙종과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 민씨,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명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고 서로 다른 언덕에 쌍릉과 단릉으로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 언덕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이고 왼쪽 언덕이 인원왕후의 단릉이다.
명릉이 이곳으로 정해진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다. 숙종이 하루는 평상복을 입고 민심을 살피기 위해 궁궐을 벗어나 어느 냇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냇가에서 한 젊은이가 울고 있는 것이 보여 연유를 물으니, 갈처사(葛處士)라는 유명한 지관이 이곳에 무덤을 쓰면 좋다고 해서 땅을 파는데, 아무리 파도 물이 나와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그 지관이 장난을 쳤다고 여기고, 젊은이를 불쌍히 여겨 관청에 가서 쌀 300석을 받아올 수 있도록 적은 서신을 주었다. 그리고 지관이 살고 있는 허름한 오두막집을 찾아가 청년의 일을 따져 물었다. 그러자 지관은 “모르면 잠자코 계시오. 저 땅은 무덤자리로 들어가기도 전에 쌀 300석을 받고 명당자리로 들어가는 자리라오!”라며 따져 묻는 숙종에게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그의 신통함에 놀라 자신이 국왕인 것을 밝히고, 훗날 본인이 묻힐 자리를 골라달라고 부탁하였다. 전해지는 설화에 따르면, 지금의 명릉 자리가 바로 신통한 지관 갈처사가 택한 입지라고 한다.
그런데 『숙종실록』에 1680년(숙종 6)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익릉을 공사할 때 숙종이 본인 능 자리를 지금의 명릉 자리로 미리 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숙종은 허우(虛右, 오른쪽 자리를 비우게 함)제도를 참고하여 인현왕후의 능과 숙종 본인의 능 자리를 미리 공사하였고, 1720년에 숙종의 능을 이곳에 조성하였다.
명릉을 조성한 지 37년이 지난 1757년(영조 33)에 인원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인원왕후의 능자리에 대해서는 『숙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713년(숙종 39) ‘명릉과 익릉 사이에 간좌곤향(艮坐坤向) 언덕이 있는데 후에 내상(왕비의 상)이 있을 경우 이 언덕을 쓰되, 명릉과 가까우니 정자각을 같이 쓰라’라는 내용이다. 이 내용은 명릉에서 400여보 떨어진 곳에 숙종이 미리 살아있는 왕비의 능 자리를 정한 것이고, 인원왕후 본인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명릉 곁에 묻히기는 원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1757년(영조 33) 인원왕후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에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영조는 정성왕후의 능(홍릉)과 영조 본인의 능 자리를 미리 공사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영조는 또 다른 왕릉 공사에 대한 부담이 커지자, 명릉 바로 오른쪽 언덕인 지금의 자리가 길지(吉地)라는 대신들의 의견에 따라 지금의 자리에 인원왕후의 능을 조성하여 왕릉 공사에 드는 인력과 국고를 줄였다.
명릉의 능침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석물의 상설은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과 인원왕후의 단릉 모두 비슷한 모습이다. 능침 아래의 비각 안에는 2개의 표석이 있는데 왼쪽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표석이고, 오른쪽이 인원왕후의 표석이다. 홍살문부터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 양옆에는 제향 때 제관이 걷는 변로(邊路)가 남아있다.
▷ 숙종(肅宗) 이야기
숙종(재세 : 1661년 음력 8월 15일 ~ 1720년 음력 6월 8일, 재위 : 1674년 음력 8월 23일 ~ 1720년 음력 6월 8일)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아들로 1661년(현종 2) 경덕궁(현 경희궁) 회상전에서 태어났다. 1667년(현종 8)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674년 현종이 세상을 떠나자 14살의 나이로 창덕궁 인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14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총명하고 영특하여 수렴청정을 받지 않았다.
재위기간 동안 붕당간 정치 대립이 심한 가운데 세 번의 환국(1680년 경신환국: 유악(油幄) 사건으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 교체, 1689년 기사환국: 원자 칭호 문제로 서인에서 남인으로 정권 교체, 1694년 갑술환국: 인현왕후 복위 문제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 교체)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고, 전국적인 대동법(大同法)과 양전(量田)을 실시하였다. 또 상평통보를 유통시켜 상업을 장려하였고, 1712년(숙종 38)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청나라와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왕실 족보인 『선원록』 편찬을 시작으로 2대 정종의 묘호(廟號, 종묘에 붙여지는 이름) 추숭과 6대 단종과 정순왕후의 복위, 소현세자빈 강씨를 복위하는 등 왕실의 질서와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후 1720년(숙종 45) 경덕궁(현 경희궁) 융복전에서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 인현왕후(仁顯王后) 이야기
인현왕후 민씨(재세 : 1667년 음력 4월 23일 ~ 1701년 음력 8월 14일)는 본관이 여흥인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은성부부인 송씨의 딸로 1667년(현종 8) 반송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680년(숙종 6) 숙종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681년(숙종 7)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689년(숙종 15) 숙종의 후궁 장씨가 왕자(경종)를 낳자 원자(元子)로 정하는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기사환국이 일어나면서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되었다. 1694년(숙종 20) 인현왕후의 복위운동으로 갑술환국이 일어나면서 다시 왕비로 복위되었다. 1701년(숙종 27) 창경궁 경춘전에서 35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한 죄로 옥사(신사옥사, 무고의 옥)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 인원왕후(仁元王后) 이야기
인원왕후 김씨(재세 : 1687년 음력 9월 29일 ~ 1757년 음력 3월 26일)는 본관이 경주인 경은부원군 김주신과 가림부부인 조씨의 딸로 1687년(숙종 13) 순화방 사저 양정재에서 태어났다. 1701년(숙종 27) 숙종의 두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702년(숙종 28) 왕비로 책봉되었다. 1720년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경종 연간에 있었던 노론과 소론의 대립인 신축·임인옥사(신임옥사)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은 영조를 끝까지 보호해 주었다. 1724년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가 되었으며, 1757년(영조 33) 창덕궁 영모당에서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 경릉(敬陵) 이야기
경릉은 왕으로 추존된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경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 언덕(동쪽)이 덕종, 왼쪽 언덕(서쪽)이 소혜왕후의 능이다.
1457년(세조 3) 덕종이 세상을 떠나자 고양현 치소 동쪽(현재의 자리)에 묘(의묘(懿墓))를 조성하였다. 원래 이 자리는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의 장인 정역(鄭易)의 묘가 있던 자리였으나, 의묘가 조성되면서 정역의 묘역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이후 덕종의 둘째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른 후 경릉(敬陵)으로 높여졌다. 이후 1504년(연산군 10) 소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소혜왕후의 유교(遺敎)에 따라 경릉 근처에 소혜왕후의 능을 조성하였다.
일반적인 왕릉은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에 따라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왕이 왼쪽, 왕비가 오른쪽에 모셔지지만, 경릉은 반대로 모셔져 있다. 덕종의 능은 왕세자묘로 조성되어 간소한 형식이고 소혜왕후의 능은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는 세상을 떠날 당시 신분이 덕종은 왕세자, 소혜왕후는 대왕대비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 덕종(德宗) 이야기
덕종(재세 : 1438년 음력 9월 15일 ~ 1457년 음력 9월 2일)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첫째 아들로 1438년(세종 20) 경복궁 금중에서 태어났다. 1445년(세종 27)에 도원군(桃源君)에 봉해졌고, 1455년(세조 1)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글 읽기를 즐겼으며 서예에도 능했다고 하나, 1457년(세조 3) 경복궁 정실에서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조는 왕세자에게 의경세자(懿敬世子)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이후 1469년 둘째 아들 잘산군(성종)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성종은 처음 예종의 양자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의경세자는 바로 왕으로 추존되지 않았고, 다만 의경왕(懿敬王)으로 높이되 종묘에 신주를 모시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1475년(성종 6) 본격적으로 성종을 예종의 아들이 아닌 생부의 아들로 대통을 잇는 것으로 정하여 묘호(廟號, 종묘에 붙여지는 이름)를 덕종이라 하고 종묘에 신주를 모셨다.
▷ 소혜왕후(昭惠王后) 이야기
소혜왕후 한씨(재세 : 1437년 음력 9월 8일 ~ 1504년 음력 4월 27일)는 본관이 청주인 서원부원군 한확과 남양부부인 홍씨의 딸로 1437년(세종 19)에 태어났다. 1450년(문종 즉위) 도원군과 혼인하였고, 1455년(세조 1)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빈이 되었다. 그러나 1457년(세조 3)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정빈(貞嬪)이라는 호칭을 받고 출궁하여 사저(현 덕수궁)에서 생활하였으며, 1465년(세조 11) 호칭을 수빈(粹嬪)으로 고쳤다. 1469년 둘째 아들 잘산군(성종)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의경왕비로 신분이 높아져 그 호칭을 인수왕비라 하였다. 이때 인혜(왕)대비(예종의 두 번째 왕비 안순왕후)와의 위차문제가 논의되어 형제 서열로 정해져 인수왕비가 인혜(왕)대비보다 높은 위치로 정해졌다. 1475년(성종 6) 의경왕이 정식적으로 덕종으로 추존되면서 인수(왕)대비로 높여졌다.
소혜왕후는 성품이 총명하고 학문이 깊어 부녀자들의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해 『내훈(內訓)』이라는 책을 직접 쓰기도 하였다. 이후 손자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대왕대비가 되었으며,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로 연산군의 폭정에 대한 충격으로 창경궁 경춘전에서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양 서오릉
익릉(翼陵, 숙종비 인경왕후)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조성 연도 : 1681년(숙종 7)
왕릉 형식 : 단릉

서오릉_익릉_능침(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익릉_문석인과 무석인(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익릉_석양과 석호(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익릉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익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 익릉(翼陵) 이야기
익릉은 조선 19대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 김씨의 능이다. 익릉은 1680년(숙종 6) 인경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이듬해인 1681년(숙종 7)에 고양 경릉(敬陵) 근처인 현재의 자리에 조성되었다. 능침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숙종 초기에 조성된 능이기 때문에 석물의 크기가 크다. 정자각은 서오릉 내에 있는 정자각 중 유일하게 정전 양옆에 벽 없이 기둥을 세운 익랑(翼廊)을 설치하여 규모를 키웠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지형에 따라 중간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 인경왕후(仁敬王后) 이야기
인경왕후 김씨(재세 : 1661년 음력 9월 3일 ~ 1680년 음력 10월 26일)는 본관이 광산인 광성부원군 김만기와 서원부부인 한씨의 딸로 1661년(현종 2) 회현방에서 태어났다. 1671년(현종 12) 왕세자빈이 되었고, 1674년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숙종과의 사이에서 두 공주를 낳았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후 1680년(숙종 6) 천연두에 걸려 경덕궁(현 경희궁) 회상전에서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양 서오릉
홍릉(弘陵, 영조비 정성왕후)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조성 연도 : 1757년(영조 33)
왕릉 형식 : 단릉

서오릉_홍릉_난간석(궁능유적본부)

서오릉_홍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서오릉_홍릉_능침(궁능유적본부)

서오릉_홍릉_문석인과 무석인(궁능유적본부)

서오릉_홍릉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오릉_홍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서오릉_홍릉_표석(궁능유적본부)
▷ 홍릉(弘陵) 이야기
홍릉은 조선 21대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이다. 정성왕후의 단릉이지만 석물의 배치는 쌍릉의 형식이다. 1757년(영조 33)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정성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 숙종의 명릉(明陵)의 예를 따라, 영조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어 둔 허우제(虛右制)로 조성하였다. 석물 배치 역시 쌍릉의 형식으로 배치하였고, 비어있는 자리 정혈(正穴)에 십자(十字) 모형을 새겨 묻었다. 그러나 1776년 영조가 세상을 떠난 후 영조의 능 자리에 대한 대신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여러 차례 논의 끝에 정조는 효종의 옛 영릉 자리인 지금의 동구릉 내 원릉(元陵) 자리로 결정하였다. 이로 인해 앞에서 봤을 때 홍릉의 왼쪽 자리가 지금도 비어있는 모습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홍릉 능침의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에는 능의 방향(을 ‘乙’, 신 ‘辛’)만 새겨져 있다. 홍릉의 무석인은 투구와 등에 장식이 많이 되어 있다. 뒷면에는 문양이 촘촘히 넣어져 있는 목 가리개를 위로 올렸다. 갑옷의 등 부분에는 물고기 비늘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가슴 부분은 구름 모양을 새겼다.
▷ 정성왕후(貞聖王后) 이야기
정성왕후 서씨(재세 : 1692년 음력 12월 7일 ~ 1757년 음력 2월 15일)는 본관이 대구인 달성부원군 서종제와 잠성부부인 이씨의 딸로 1692년(숙종 18) 가회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704년(숙종 30) 숙종의 왕자 연잉군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에 봉해졌고, 1721년(경종 1) 왕세제빈으로 책봉된 후, 1724년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정성왕후는 조선 역대 왕비 중에서 중전 재임을 가장 오래 하였으나 영조와의 사이에서 소생을 낳지 못하였다. 두 후궁에서 낳은 효장세자(추존 진종)와 사도세자(추존 장조)가 왕세자로 책봉될 때 양자로 입양하였으며, 영조와 사도세자가 대립하게 되자 그 중심에 서서 갈등을 풀기 위해 노력하였다. 1757년(영조 33) 창덕궁 관리합에서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양 서오릉
순창원(順昌園, 순회세자와 공회빈)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조성 연도 : 1563년(명종 18), 1593년 이후, 1870년(고종 7)
원의 형식 : 합장

서오릉_순창원_문석인(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순창원_석양과 석호(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순창원_원침(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순창원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순창원_정자각(궁능유적본부)
▷ 순창원(順昌園) 이야기
순창원은 조선 13대 명종의 첫째 아들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원이다. 순창원은 한 봉분에 왕세자와 왕세자빈을 같이 모신 합장의 형식이다.
1563년(명종 18) 순회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고양 경릉(敬陵) 근처인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고 순회묘(順懷墓)라 불렀다. 1592년(선조 25) 공회빈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장례를 치르지 못하였다. 선조는 궁궐 후원에 시신을 임시로 묻으라는 명을 내렸고, 다시 시신을 찾으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이후 공회빈은 유의장(遺衣葬, 의복으로 장례를 치름)으로 순회묘에 합장되었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 순회세자와 같이 신주를 만들어 사당에 모셨다. 1870년(고종 7) 묘를 원으로 높여 이름을 순창원(順昌園)이라 하였다.
순창원은 추존 덕종의 경릉의 예로 조성되었으며,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생략하였고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과 석양과 석호 각 1쌍씩 배치하였다.
▷ 순회세자(順懷世子) 이야기
순회세자(재세 : 1551년 음력 5월 28일 ~ 1563년 음력 9월 20일)는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첫째 아들로 1551년(명종 6)에 태어났다. 1557년(명종 12)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563년(명종 18)에 13세로 세상을 떠났다.
▷ 공회빈(恭懷嬪) 이야기
공회빈 윤씨(재세 : 1552년(?) ~ 1592년 음력 3월 3일)는 본관이 무송인 윤옥과 파평 윤씨의 딸로 태어났다. 공회빈의 생년은 미상이나, 『선조수정실록』에 10세에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1552년(명종 7)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561년(명종 16) 왕세자빈으로 황대임의 딸이 간택되었으나 병으로 인하여 간택이 중단되었고, 그 대신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563년(명종 18) 순회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덕빈(德嬪)에 봉해졌다. 이후 1592년(선조 25)에 41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양 서오릉
수경원(綏慶園, 추존 장조 생모 영빈)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조성 연도 : 1764년(영조 40), 1899년(광무 3), 1970년
원의 형식 : 단분

서오릉_수경원_묘표석(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수경원_문석인(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수경원_원침(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수경원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오릉_수경원_표석(궁능유적본부)
▷ 수경원(綏慶園) 이야기
수경원은 조선 21대 영조의 후궁이자 황제로 추존된 장조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원이다. 1764년(영조 40) 영빈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양주 연희궁 대야동(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학교)에 의열묘(義烈墓)라는 이름으로 묘를 조성하였다. 1788년(정조 12) 무덤의 이름을 선희묘(宣禧墓)로 고쳤고, 1899년(광무 3)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자 영빈 이씨는 황제의 어머니 지위(궁원제의 예)에 맞게 무덤을 원으로 높여 이름을 수경원이라 하였다. 이후 수경원은 1970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원침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상석, 석상(혼유석), 망주석, 표석을 배치하였다. 봉분 앞에 있는 표석에는 ‘영빈전의이씨지묘’라 쓰여있다. 입구에는 대한제국 때 세운 표석(대한 소유영빈 수경원)이 있다.
▷ 영빈 이씨(暎嬪 李氏) 이야기
영빈 이씨(재세 : 1696년 음력 7월 18일 ~ 1764년 음력 7월 26일)는 본관이 전의인 증 찬성 이유번과 한양 김씨의 딸로 1696년(숙종 22)에 태어났다. 1701년(숙종 27) 궁녀로 입궁하였다가 1726년(영조 2) 영조의 후궁이 되었고, 1730년(영조 6) 영빈이 되었다. 영조와의 사이에서 1남(사도세자) 6녀(화평·화협·화완옹주 등)를 낳았다.
영빈은 사도세자의 생모였으나 아들에 대한 일을 간섭하지 않았는데, 헌경황후(혜경궁) 홍씨가 저술한 『한중록』에 의하면 영조가 사도세자의 처분을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영빈이 영조에게 ‘대처분’을 청하였다고 할 정도로 냉정하고 강철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1764년(영조 40) 경희궁 양덕당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고, 1899년(광무 3)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영빈은 황제의 어머니 지위로 신분이 높아져 시호(諡號)를 소유(昭裕)라 올렸다.
고양 서오릉
대빈묘(大嬪墓, 경종 생모 옥산부대빈)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조성 연도 : 1702년(숙종 28), 1719년(숙종 45), 1970년 이후
묘의 형식 : 단분

서오릉_대빈묘_문석인(궁능유적본부)

서오릉_대빈묘_봉분(궁능유적본부)

서오릉_대빈묘_장명등(궁능유적본부)

서오릉_대빈묘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오릉_대빈묘_표석(궁능유적본부)
▷ 대빈묘(大嬪墓) 이야기
대빈묘는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20대 경종의 생모인 옥산부대빈 장씨의 묘이다. 1701년(숙종 27) 옥산부대빈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702년(숙종 28) 양주 인장리(현 구리 인창동)에 묘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묘소 자리가 불길하다 하여 1719년(숙종 45) 광주 진해촌(현 광주시 오포읍 문형리)으로 옮겼다가 1970년 이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대빈묘는 일반 후궁묘의 형식에 맞게 조성되었다.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봉분 주변에 문석인, 망주석, 장명등, 상석, 향로석, 석상(혼유석) 등을 배치하였다. 봉분 앞에는 표석이 있는데 ‘유명조선국 옥산부대빈장씨지묘(有明朝鮮國玉山府大嬪張氏之墓)’라고 쓰여있다.
▷ 옥산부대빈 장씨(玉山府大嬪 張氏) 이야기
옥산부대빈 장씨(재세 : 1659년 ~ 1701년 음력 10월 9일?)는 본관이 인동인 장형과 파평 윤씨의 딸로 1659년(효종 10)에 태어났다. 숙종 대 당시 대왕대비였던 장렬왕후 조씨를 모시는 궁녀로 입궁하였고 숙종의 총애를 받아 1686년(숙종 12) 숙종의 후궁이 되었다. 1688년(숙종 14) 소의(昭儀)의 품계에서 숙종의 첫째 아들(경종)을 낳아 희빈(禧嬪)에 봉해졌다.
숙종은 희빈이 낳은 왕자를 원자(元子)로 정하려는 뜻을 밝히자, 당시 집권당이었던 서인은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이 일로 기사환국이 일어나면서 남인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숙종은 환국 이후 인현왕후를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하고 희빈을 왕비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 인현왕후 복위 운동 사건이 일어나면서 갑술환국이 일어나고 서인 정권이 다시 들어서게 되었다. 이 일로 인현왕후가 다시 왕비로 복위되고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신분이 낮아졌다. 이후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인현왕후를 무고한 죄(무고의 옥)로 세상을 떠났다. 『숙종실록』에는 자진(自盡)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720년 숙종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1722년(경종 2)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되어 사당의 이름을 대빈궁(大嬪宮), 묘의 이름을 대빈묘라 하였다. 그러나 영조 대 궁원제(宮園制, 왕을 낳은 후궁의 사당을 궁, 묘를 원으로 정하는 제도)가 만들어질 때 옥산부대빈은 논의하지 않아, 경종 대에 올려진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울 선릉과 정릉

선릉과 정릉_선릉(성종)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선릉과 정릉_선릉(성종)_능침(궁능유적본부)

선릉과 정릉_선릉(성종)_병풍석과 난간석(궁능유적본부)

선릉과 정릉_선릉(정현왕후)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선릉과 정릉_선릉(정현왕후)_능침(궁능유적본부)

선릉과 정릉_선릉(정현왕후)_장명등(궁능유적본부)

선릉과 정릉_선릉_비각(궁능유적본부)

선릉과 정릉_선릉_전경(궁능유적본부)

선릉과 정릉_선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선릉과 정릉_선릉_홍살문(궁능유적본부)
선릉(宣陵, 성종과 정현왕후)
위치 : 서울 강남구 선릉로 100길 1
조성 연도 : 1495년(연산군 1), 1530년(중종 25)
왕릉 형식 : 동원이강릉
▷ 선릉(宣陵) 이야기
선릉은 조선 9대 성종과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다. 선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성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정현왕후의 능이다.
선릉은 1494년(성종 25)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인 1495년(연산군 1) 광주 학당리인 현재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원래 이 자리는 4대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묘역이 있던 자리였으나, 선릉이 조성되면서 광평대군묘역은 현 강남구 수서동으로 옮겼다. 이후 1530년(중종 25) 정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선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선릉은 정릉과 함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능을 파헤쳐 재궁(梓宮, 관)까지 불에 타는 피해를 당하여, 1593년(선조 26) 7월에 다시 장례를 치렀다.
선릉은 『국조오례의』의 예에 따라 조성되었는데, 성종의 능침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둘렀고, 정현왕후의 능침 봉분에는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그 외 문석인, 무석인,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은 두 능 모두 비슷한 형태이다.
▷ 성종(成宗) 이야기
성종(재세 : 1457년 음력 7월 30일 ~ 1494년 음력 12월 24일, 재위 : 1469년 음력 11월 28일 ~ 1494년 음력 12월 24일)은 왕으로 추존된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의 둘째 아들로 1457년(세조 3) 경복궁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할아버지인 세조가 잠시 궁중에서 키웠는데, 성품이 작하고 서예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1461년(세조 7) 잘산군(者乙山君*)에 봉해졌고, 1469년(예종 1) 작은 아버지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 정희왕후(세조의 왕비)의 명으로 13세의 나이로 경복궁 근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7년 동안 받았으며, 1476년(성종 7) 친정(親政)을 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세조 대부터 편찬하던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1485년(성종 16)에 반포하였고, 1492년(성종 23)에는 『대전속록』을 완성하여 법제를 정비하였다. 또 국가 의례를 정리한 『국조오례의』를 완성하여 반포하였고,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악학궤범』 등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선비(사림세력)들을 등용하여 기존 정치 세력인 훈구세력과 국정의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 이후 1494년(성종 25) 창덕궁 대조전에서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 잘산군(자을산군) : 『승정원일기』에 성종의 군호는 ‘자을산者乙山으로 쓰고 잘산으로 읽어도 무방하다’는 기록이 있음
▷ 정현왕후(貞顯王后) 이야기
정현왕후 윤씨(재세 : 1462년 음력 6월 25일 ~ 1530년 음력 8월 22일)는 본관이 파평인 영원부원군 윤호와 연안부부인 전씨의 딸로 1462년(세조 8) 신창 관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윤창년(尹昌年)이다. 1473년(성종 4) 성종의 후궁이 되어 숙의(淑儀, 종2품)에 봉해지고, 1479년(성종 10)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위되자 1480년(성종 11)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현왕후는 왕비가 된 후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키웠고, 연산군도 친어머니를 정현왕후로 알고 자랐다. 그러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생모가 폐비 윤씨라는 것을 알고도 정현왕후에 대한 예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현왕후는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자순왕대비가 되었으며,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때 연산군을 폐위하고 친아들 진성대군(중종)의 즉위를 허락하였다. 이후 1530년(중종 25) 경복궁 동궁 정침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서울 선릉과 정릉
정릉(靖陵, 중종)
위치 : 서울 강남구 선릉로 100길 1
조성 연도 : 1545년(인종 1), 1562(명종 17)
왕릉 형식 : 단릉

선릉과 정릉_정릉_곡장(궁능유적본부)

선릉과 정릉_정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선릉과 정릉_정릉_능침(궁능유적본부)

선릉과 정릉_정릉_문석인과 무석인(궁능유적본부)

선릉과 정릉_정릉_병풍석과 난간석(궁능유적본부)

선릉과 정릉_정릉_전경(궁능유적본부)

선릉과 정릉_정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 정릉(靖陵) 이야기
정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능이다. 중종은 1544년에 세상을 떠나 다음 해인 1545년(인종 1)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희릉 서쪽 언덕(현 고양 서삼릉 내 철종의 예릉 자리)에 능을 조성하고 능의 이름을 희릉과 함께 정릉이라 하였다. 그러나 정릉은 1562년(명종 17)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에 의해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문정왕후는 당시 봉은사 주지였던 보우와 논의하여 중종의 능을 이곳으로 옮겼는데, 이는 문정왕후 본인이 중종의 묻히기를 원해서였다. 그러나 옮긴 정릉이 지대가 낮아 비가 오면 침수되는 일이 자주 일어나자, 문정왕후는 세상을 떠난 후 정릉이 아닌 현재 서울 노원구 태릉에 묻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중종과 세 왕비(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의 능은 모두 따로 흩어지게 되었다. 정릉은 선릉과 마찬가지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능이 파헤쳐져 재궁(梓宮, 관)이 불에 타는 피해를 입었고, 1593년(선조 26) 8월에 다시 장례를 치렀다.
정릉은 『국조오례의』의 예에 따라 조성되어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둘렀고, 문석인, 무석인,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의 석물을 배치하였다. 현재 정릉 능침에 있는 석물은 모두 1562년(명종 17)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새로 제작하였다.
▷ 중종(中宗) 이야기
중종(재세 : 1488년 음력 3월 5일 ~ 1544년 음력 11월 15일, 재위 : 1506년 음력 9월 2일 ~ 1544년 음력 11월 15일)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로 1488년(성종 19)에 태어났다. 1494년(성종 25) 진성대군(晋城大君)에 봉해졌고, 1506년 중종반정으로 이복형 연산군이 폐위되자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1506년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은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들어 반정을 계획하였다. 1506년 음력 9월 1일, 반정 세력들은 훈련원에 무사들을 집결시키고, 경복궁에 있는 정현왕후(왕대비)에게 반정의 사실을 알렸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정현왕후는 반정 세력들의 요청이 계속되자 연산군 폐위와 진성대군의 옹립을 허락하였다. 이후 반정 세력들은 임사홍과 신수근 등을 죽이고 연산군이 있는 창덕궁을 에워싸고 옥사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다음날, 박원종 등은 창덕궁에 들어가 연산군을 폐위하는 데 성공하였고, 국새를 경복궁으로 가져가 진성대군을 왕위에 올렸다.
중종은 재위기간 동안 연산군 재위시절의 잘못된 정치와 제도를 바로잡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향약(鄕約)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유교적 향촌질서를 자리 잡게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정치적으로도 개혁을 위하여 조광조 등 선비들을 등용하여 기존의 훈구세력을 견제하려고 하였으나, 급진적인 정책이 큰 반발을 불러와 많은 선비가 죽임(기묘사화)을 당하였다. 이후 1544년(중종 39) 창경궁 환경전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양 서삼릉

서삼릉_예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서삼릉_왕자·왕녀묘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태실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회묘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효릉_석양과 석호(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효창원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후궁묘(빈·귀인묘)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후궁묘(숙의묘)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희릉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삼릉(西三陵)은 ‘서쪽에 있는 3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경기 고양시에 위치한 조선왕릉 중 서오릉 다음으로 큰 왕릉군이다. 1537년(중종 32)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희릉(禧陵)이 현 서울 서초구 헌릉과 인릉 서쪽 언덕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고, 1545년(인종 1) 중종의 정릉이 희릉 서쪽 언덕에 조성되자 능의 이름을 희릉과 합쳐 정릉이라 하였다. 그러나 1562년(명종 17) 정릉이 현 서울 강남구로 옮겨지면서 다시 희릉이 되었다. 이후 인종의 효릉(孝陵), 소현세자의 소현묘(昭顯墓, 이후 소경원(昭慶園)), 철종의 예릉(睿陵)이 조성되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때 전국에 있던 왕을 비롯한 왕실가족의 태실(胎室)과 왕자·왕녀·후궁의 묘와 문효세자의 효창원(孝昌園)이 서삼릉 경내로 옮겨졌다. 1945년 광복 후 의소세손의 의령원(懿寧園)이 옮겨졌고, 도시화 개발 시기에 왕실 후궁들의 묘와 폐비 윤씨의 회묘(懷墓)가 경내로 옮겨지면서 지금의 서삼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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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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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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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5년(중종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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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희릉 조성(현 헌릉과 인릉 서쪽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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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7년(중종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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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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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년(인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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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중의 정릉은 희릉 서쪽 언덕(예릉 자리)에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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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년(명종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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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의 효릉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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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2년(명종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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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정릉을 현 서울 강남으로 옮김, 다시 희릉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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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8년(선조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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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왕비 인성왕후의 능을 효릉 오른쪽 자리에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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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5년(인조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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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아들 소현세자의 소현묘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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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2년(영조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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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조의 맏아들 의소세손의 의소묘 조성(현 서울 북아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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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년(정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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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효창묘 조성(현 서울 효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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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고종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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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의 예릉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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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고종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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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묘를 소경원, 의소묘를 의령원, 효창묘를 효창원으로 높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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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고종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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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왕비 철인황후의 능을 예릉 오른쪽 자리에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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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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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있던 태실, 왕자·왕녀·후궁묘를 경내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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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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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원을 현 서울 효창공원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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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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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원을 현 서울 북아현동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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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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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화 개발로 왕실 후궁들의 묘를 경내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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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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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 윤씨의 회묘를 현 서울 회기동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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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서삼릉
희릉(禧陵, 중종비 장경왕후)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조성 연도 : 1515년(중종 10), 1537년(중종 32)
왕릉 형식 : 단릉

서삼릉_희릉_곡장(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희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희릉_능침(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희릉_무석인(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희릉_전경(궁능유적본부)
▷ 희릉(禧陵) 이야기
희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이다. 희릉은 1515년(중종 10)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헌릉과 인릉 서쪽 언덕에 조성되었다. 그러나 1537년(중종 32) 희릉 조성 당시 큰 돌이 있었는데 이를 신중하게 논의하지 못했다는 김안로의 주장에 따라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후 1544년(중종 39)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중종의 능을 희릉 서쪽 언덕(현 철종 예릉)에 조성하면서 능의 이름을 희릉에서 정릉(靖陵)으로 바꾸었다가, 1562년(명종 17) 중종의 정릉을 현 서울 강남구로 옮기면서 다시 희릉으로 부르게 되었다.
희릉의 능침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문석인, 무석인,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의 석물을 배치하였다. 현재 희릉 능침 석물은 모두 1537년(중종 32)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새로 제작하였다. 무석인은 큼직한 이목구비와 당당하고 위엄 있는 자세로 칼을 쥐고 있으며, 문석인 역시 큼직한 체구에 맞게 홀 역시 크게 조각하였다.
▷ 장경왕후(章敬王后) 이야기
장경왕후 윤씨(재세 : 1491년 음력 7월 6일 ~ 1515년 음력 3월 2일)는 본관이 파평인 파원부원군 윤여필과 순천부부인 박씨의 딸로 1491년(성종 22) 호현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506년(중종 1) 중종의 후궁이 되어 숙의(淑儀, 내명부 종2품)로 책봉되었다가, 중종의 첫 번째 왕비가 폐위되면서 이듬해 왕비로 책봉되었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효혜공주와 인종을 낳았으며, 1515년(중종 10)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경복궁 동궁 별전에서 25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양 서삼릉
효릉(孝陵, 인종과 인성왕후)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조성 연도 : 1545년(명종 즉위), 1578년(선조 11)
왕릉 형식 : 쌍릉

서삼릉_효릉_능침(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효릉_무석인(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효릉_문석인(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효릉_병풍석과 난간석(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효릉_석양과 석호(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효릉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효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 효릉(孝陵) 이야기
효릉은 조선 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능이다. 효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인종, 오른쪽(동쪽)이 인성왕후의 능이다. 효릉은 1545년(인종 1)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 당시 정릉(靖陵, 중종과 장경왕후 능) 서쪽 언덕에 조성되었고, 1577년(선조 10) 인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1578년(선조 11) 인종의 능 서쪽에 능을 조성하였다.
효릉의 능침 봉분은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였고, 인종의 능에만 병풍석을 둘렀다. 효릉 조성 당시에는 병풍석이 없었으나, 1578년(선조 11) 인성왕후의 능을 조성한 이후에 인종의 능에 추가로 병풍석을 세웠다. 그 밖에 문석인, 무석인,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의 석물을 쌍릉의 형식에 맞게 배치하였다.
▷ 인종(仁宗) 이야기
인종(재세 : 1515년 음력 2월 25일 ~ 1545년 음력 7월 1일, 재위 : 1544년 음력 11월 20일 ~ 1545년 음력 7월 1일)은 중종과 장경왕후 윤씨의 아들로 1515년(중종 10) 경복궁 동궁 별전에서 태어났다. 1520년(중종 15)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544년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창경궁 명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인종은 조선 역대 국왕 중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9개월(윤달 포함)) 왕이다. 재위기간 동안 기묘사화로 유명무실해진 현량과(賢良科, 인재를 천거하는 제도)를 다시 시행하고, 조광조의 신분을 회복 시켜주었다. 그러나 중종의 상을 치르면서 몸이 약해져 1545년(인종 1) 경복궁 청연루 소침에서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 인성왕후(仁聖王后) 이야기
인성왕후 박씨(재세 : 1514년 음력 10월 1일 ~ 1577년 음력 11월 29일)는 본관이 반남인 금성부원군 박용과 문소부부인 김씨의 딸로 1514년(중종 9)에 태어났다. 1524년(중종 19)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인종과의 사이에서 소생을 낳지 못하였으며, 명종 즉위 후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가 되었다. 1577년(선조 10)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양 서삼릉
예릉(睿陵, 철종과 철인황후)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조성 연도 : 1863년(고종 1), 1878년(고종 15)
왕릉 형식 : 쌍릉

서삼릉_예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서삼릉_예릉_능침(궁능유적본부)

서삼릉_예릉_문석인과 무석인(궁능유적본부)

서삼릉_예릉_장명등(궁능유적본부)

서삼릉_예릉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삼릉_예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서삼릉_예릉_표석(궁능유적본부)
▷ 예릉(睿陵) 이야기
예릉은 조선 25대 철종과 철인황후 김씨의 능이다. 예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철종, 오른쪽(동쪽)이 철인황후의 능이다. 예릉은 1863년(철종 14) 철종이 세상을 떠나자 1864년(고종 1)에 희릉(禧陵) 서쪽 언덕에 있었던 중종의 옛 정릉(靖陵) 자리에 조성하였다. 1878년(고종 15) 철인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철종의 능 동쪽에 능을 조성하여 쌍릉의 모습이 되었다.
예릉은 영조 대에 편찬된 『국조상례보편』의 예에 따라 조성된 마지막 조선왕릉의 형태이다.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을 둘러 두 봉분을 연결하였다. 현재 능침에 배치된 문석인, 무석인, 석마, 장명등, 일부 석양과 석호는 옛 정릉(靖陵)의 석물로, 정릉을 현 서울 강남으로 옮길 때 땅에 묻었다가 예릉을 조성할 때 다시 꺼내 다듬어서 사용하였다. 장명등은 문석인 가운데가 아닌 능침 앞쪽으로 배치한 것이 특이하다.
▷ 철종(哲宗) 이야기
철종(재세 : 1831년 음력 6월 17일 ~ 1863년 음력 12월 8일, 재위 : 1849년 음력 6월 9일 ~ 1863년 음력 12월 8일)은 추존 장조(사도세자)의 손자 전계대원군과 용성부대부인 염씨의 아들로 1831년(순조 31) 경행방 사저(현 서울 종로2가 부근)에서 태어났다. 철종의 할아버지 은언군(추존 장조의 아들)은 정조 즉위 후 역모 사건에 휘말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부인과 며느리와 함께 사사되었고, 은언군의 아들 이광(전계대원군)은 강화도에서 생활하였다. 이광은 1830년(순조 30) 유배에서 풀려나 한양에서 생활하였고, 이듬해 철종을 낳았다. 그러나 헌종이 왕위에 오른 후 이광의 아들들이 역모사건에 휘말려 죽거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때 철종도 강화도에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 생활하던 중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순원황후(순조의 왕비)의 명으로 순조의 양자로 입양되어 창덕궁 인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는 순원황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1852년(철종 3)부터 친정(親政)하였다. 그러나 외척 세도정치로 나라의 정책이 문란하여 국정이 불안정하였다. 헌종 대에부터 시작된 삼정(三政 :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극에 달해 진주민란을 비롯한 농민 봉기가 일어났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삼정이정청(三政釐政廳)을 설치 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후 1863년(철종 14) 창덕궁 대조전에서 33세로 세상을 떠났고,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융희 2)에 철종장황제(哲宗章皇帝)로 추존되었다.
▷ 철인황후(哲仁皇后) 이야기
철인황후 김씨(재세 : 1837년 음력 3월 23일 ~ 1878년 음력 5월 12일)는 본관이 안동인 영은부원군 김문근과 흥양부부인 민씨의 딸로 1837년(헌종 3) 순화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851년(철종 2)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1858년(철종 9) 원자를 낳았으나 일찍 죽는 비운을 겪었다.
철인황후는 안동 김씨 왕비였지만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고, 말수가 적고 성품이 온화하였다고 한다. 1863년 철종이 세상을 떠나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명순대비(明純大妃)가 되었으며, 1878년(고종 15) 창경궁 양화당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융희 2)에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로 추존되었다.
고양 서삼릉
소경원(昭慶園, 소현세자) [비공개]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조성 연도 : 1645년(인조 23), 1870년(고종 7)
원의 형식 : 단분

서삼릉_소경원_석양과 석호(궁능유적본부)

서삼릉_소경원_원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서삼릉_소경원_원침(궁능유적본부)

서삼릉_소경원_장명등(궁능유적본부)

서삼릉_소경원_정자각터(궁능유적본부)
▷ 소경원(昭慶園) 이야기
소경원은 조선 16대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의 원이다. 소경원은 서삼릉 경내에 있는 3기의 원 중에서 가장 먼저 조성되었다. 1645년(인조 23)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귀국 후 두 달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효릉(孝陵) 근처인 지금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고 소현묘(昭顯墓)라 불렀다. 이후 1870년(고종 7) 묘를 원으로 높여 이름을 소경원(昭慶園)이라 하였다.
소경원은 왕세자의 묘제에 따라 조성되었으며,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생략하였고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과 석양과 석호 각 1쌍씩 배치하였다. 현재 정자각은 터만 남아있고, 입구에는 홍살문을 세웠다.
▷ 소현세자(昭顯世子) 이야기
소현세자(재세 : 1612년 음력 1월 4일 ~ 1645년 음력 4월 26일)는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첫째 아들로 1612년(광해군 4) 회현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623년 아버지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후 1625년(인조 3)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627년(인조 7) 정묘호란 때 전주로 내려가 남도의 민심을 수습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하자, 다음 해에 부인 강씨와 동생 봉림대군(효종)과 함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가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심양에 머무는 동안 단순한 볼모가 아닌 조선을 대표하는 외교적 재량권을 행사하였다. 또, 서양 문물에 관심을 두어 천주교 신부인 아담 샬 등과 친교를 맺고 그를 통하여 서양의 천문학과 수학 등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조를 비롯한 반청(反淸)파 대신들은 친정(親淸)적인 인물로 보여 왕세자로는 부적격자로 보이기도 하였다.
9년 후인 1645년(인조 23) 볼모 생활을 끝내고 귀국하였으나 인조와 대신들에게 환영받지 못하였다. 귀국 두 달 후에 갑자기 병으로 눕게 되어 4일 만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34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조실록』에는 시신의 아홉 구멍(九血)에서 출혈이 있었고, 시신의 낯빛이 진흑으로 변해있었다고 하여 독살의 의혹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고양 서삼릉
의령원(懿寧園, 의소세손)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조성 연도 : 1752년(영조 28), 1870년(고종 7), 1949년
원의 형식 : 단분

서삼릉_의령원_문석인(궁능유적본부)

서삼릉_의령원_원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서삼릉_의령원_원침(궁능유적본부)

서삼릉_의령원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삼릉_의령원_표석(궁능유적본부)
▷ 의령원(懿寧園) 이야기
의령원은 조선 21대 영조의 손자이자 황제로 추존된 장조(사도세자)의 첫째 아들 의소세손의 원이다. 1752년(영조 28) 의소세손이 세상을 떠나자 안현(鞍峴) 남쪽 기슭(현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묘를 조성하고 의소묘(懿昭墓)라 불렀다. 1870년(고종 7) 묘를 원으로 높여 이름을 의령원(懿寧園)이라 하였다. 이후 1949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의령원은 영조의 명으로 석물을 간략하게 조성하였고, 재실, 홍살문, 정자각, 비각 등도 갖추었었다. 그러나 1949년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원침에 있는 석물과 표석만 옮겨왔다.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생략하였고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망주석, 석상(혼유석), 석양과 석호 각 1쌍이 있다. 표석은 봉분 기준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데, 앞면과 뒷면은 모두 영조가 직접 썼다. 의령원 앞에는 문효세자의 효창원이 있다.
▷ 의소세손(懿昭世孫) 이야기
의소세손(재세 : 1750년 음력 8월 27일 ~ 1752년 음력 3월 4일)은 황제로 추존된 장조(사도세자)와 헌경황후(혜경궁) 홍씨의 첫째 아들로 1750년(영조 26)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1751년(영조 27)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나, 다음 해에 창경궁 통명전에서 3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양 서삼릉
효창원(孝昌園, 문효세자)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조성 연도 : 1786년(정조 10), 1870년(고종 7), 1944년
원의 형식 : 단분

서삼릉_효창원_문석인(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효창원_신도비(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효창원_원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효창원_원침(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효창원_전경(궁능유적본부)
▷ 효창원(孝昌園) 이야기
효창원은 조선 22대 정조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의 원이다. 1786년(정조 10) 문효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고양 율목동(栗木洞)(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묘를 조성하고, 묘의 이름을 효창묘(孝昌墓)라 하였다. 1870년(고종 7) 묘를 원으로 높여 효창원(孝昌園)이라 하였고, 이후 1944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처음 조성할 때 효창원은 재실, 홍살문, 정자각, 비각 등을 갖추었으나 1944년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원침에 있는 석물과 표석, 신도비만 옮겨왔다.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생략하였고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망주석, 석상(혼유석), 석양과 석호 각 1쌍이 있다. 표석은 봉분 기준 오른쪽에 세워져 있고, 정조가 직접 지은 신도비는 의령원과 효창원 입구에 세워져 있다. 효창원 뒤에는 의소세손의 의령원이 있다.
▷ 문효세자(文孝世子) 이야기
문효세자(재세 : 1782년 음력 9월 7일 ~ 1786년 음력 5월 11일)는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로 1782년(정조 6)에 태어났다. 처음 원자로 정해졌고, 1784년(정조 8)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786년(정조 10) 홍역에 걸려 창덕궁 별당에서 5세로 세상을 떠났다. 처음 시호(諡號)는 온효(溫孝)라 하였다가, 최종적으로 문효(文孝)로 정하였다.
고양 서삼릉
태실(胎室)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조성 연도 : 1928년~1929년

서삼릉_태실_왕 태실 전경(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태실_왕 태실(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태실_왕실가족 태실(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태실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태실_태조 태실(궁능유적본부)
▷ 태실
태실이란 왕실에서 아기가 태어났을 때 그 태반과 탯줄을 묻는 석실(石室)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산실청(또는 호산청)에 순산을 알리기 위한 동종을 설치하고 내부에는 순산을 기원하는 부적을 붙였다. 짚과 종이, 족제비 가죽을 깔아 산모가 누울 자리를 준비하고, 천장에 말고삐를 건다. 산모가 아기를 출산하면 임금이 직접 종을 울리고 아기의 탯줄과 태반은 좋은 날을 택하여 깨끗하게 백 번 씻은 다음 미리 제작된 태항아리에 넣게 된다. 작은 항아리 바닥에 동전을 앞면이 향하게 놓은 후 그 위에 태를 놓고 기름종이를 항아리 입구에 덮는다. 그리고 다시 준비된 큰 항아리에 태가 든 작은 항아리를 넣어 태실을 묻을 전국 명산까지 운반하여 태항아리를 묻고 주변에 비석과 석물을 갖춘다. 태실을 묻을 곳은 풍수지리상 길지로 신중하게 골랐는데, 이는 아기의 건강뿐 아니라 왕실과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서이다. 태실을 모신 후에는 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여러 명의 관리인을 두었다.
▷ 서삼릉에 모여있는 태실
전국 명산에 있어야 할 태실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부터 1929년까지 서삼릉 경내로 옮겨졌다. 1928년 9월 10일자 매일신문의 보도문을 보면 ‘창덕궁의 예식과(禮式課)에서 존귀하던 어른들의 태가 무슨 지경에 갈지 모른다고 하여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명산에 묻힌 태실 29기를 파서 경성으로 모셔왔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전국 명당지에 산재되어 있던 태실의 파괴, 손실방지를 위하여 태항아리 39개를 경성으로 옮겨와 현재 종로구 내수동의 지방경찰청 부근에 봉안실을 마련하고 임시 보관 후 추위가 물러가면 서삼릉으로 이전한다.’는 기사가 1929년 3월 1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조성 당시에는 ‘일(日)’ 자형 담장에 일본식 철문으로 되어 있었으나 1995년에 담장과 철문을 철거하였다. 그리고 1996년에 발굴 조사하여 태항아리와 태지석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이곳에는 당시에 세운 비석만 남아있다. 태실비석 뒷면에는 언제 옮겨졌는지에 대한 내용이 쓰여있고, 일본 연호를 삭제한 흔적이 있다. 이곳에는 오석(烏石) 비군과 화강석(花崗石) 비군으로 나누어지는데, 오석 비군은 왕과 황제, 황태자의 태실(22기), 화강석 비군은 왕실과 황실 가족들의 태실(32기)로 총 54기가 있다.
▷ 서삼릉 태실 현황
⊙ 왕, 황제, 황태자 태실(오석(烏石) 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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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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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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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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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상 초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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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 복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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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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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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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고황제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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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금산군 추부면
(현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산1-86
(충남 유형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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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대 정종
|
정종대왕태실
|
경북 김천군 대항면
(현 경북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
경북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216
직지사 경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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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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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태종
|
태종대왕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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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성주군 성남면
(현 경북 성주군 성암면 대봉리) |
|
|
4
|
4대 세종
|
세종대왕태실
|
경남 사천군 곤명면
(현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산 27
(경남 기념물) |
|
5
|
5대 문종
|
문종대왕태실
|
경북 영주군 상리면
(현 경북 예천군 효자면 명봉리) |
경북 예천군 효자면 명봉리 산 2
경북 예천군 효자면 명봉리 501 (경북 유형유산) |
|
6
|
7대 세조
|
세조대왕태실
|
경북 성주군 월항면
(현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 8
(사적 : 세종대왕자태실) |
|
7
|
8대 예종
|
예종대왕태실
|
전북 전주군 구이면
(현 전북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44 (경기전 경내)
(전북 민속유산) |
|
8
|
9대 성종
|
성종대왕태실
|
경기 광주군 경안면
(현 경기 광주시 태전동) |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 185 (창경궁 경내)
|
|
9
|
11대 중종
|
중종대왕태실
|
경기 가평군 내면
(현 경기 가평군 가평읍 상색리) |
경기 가평군 가평읍 상색리 산 112
(가평 향토유적) |
|
10
|
12대 인종
|
인종대왕태실
|
경북 영천군 청통면
(현 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
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산 24
(경북 유형유산) |
|
11
|
13대 명종
|
명종대왕태실
|
충남 서산군 운산면
(현 충남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 |
충남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 산 6
(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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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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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선조
|
선조대왕태실
|
충남 부여군 충화면
(현 충남 부여군 충화면 오덕리) |
충남 부여군 충화면 오덕리 284
(충남 국가유산 자료) 충남 부여군 충화면 오덕리 109-9 (부여 향토유적) |
|
13
|
19대 숙종
|
숙종대왕태실
|
충남 공주군 목동면
(현 충남 공주시 태봉동) |
충남 공주시 태봉동 산 64
(충남 국가유산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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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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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경종
|
|
현 충북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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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산 34-1
(충북 유형유산) |
|
15
|
21대 영조
|
영조대왕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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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주군 낭성면
(현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무성리) |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무성리 산 6
(충북 유형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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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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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 장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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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조의황제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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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군 상리면
(현 경북 예천군 효자면 명봉리) |
경북 예천군 효자면 명봉리 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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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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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정조
|
정조선황제태실
|
강원 영월군 하동면
(현 강원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
강원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산 134
(강원 유형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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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23대 순조
|
순조숙황제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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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보은군 속리면
(현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산1-1
(충북 유형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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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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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대 헌종
|
헌종성황제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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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 덕산면
(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 산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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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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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2대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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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효황제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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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군 구항면
(현 충남 홍성군 구항면 태봉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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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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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민황태자(영친왕)
|
이왕전하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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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비원
(현 창덕궁 후원 능허정 부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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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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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세손 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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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태실
|
일본 동경부 이왕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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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실가족 태실(화강석(花崗石) 비군)
|
번호
|
태실 주인
|
비석 앞면
|
기록상 초봉지
|
태실 복원지
|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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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대군
(예종·장순왕후 남) |
인성대군태실
|
경남 사천군 곤명면
(현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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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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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 윤씨
(연산군 생모) |
연산군모윤씨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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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군 용문면
(현 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
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산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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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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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군
(성종·귀인정씨 장남) |
안양군태실
|
경북 상주군 모동면
(현 경북 상주시 모동면 상판리) |
|
|
4
|
완원군
(성종·숙의홍씨 장남) |
완원군태실
|
현 경북 상주군 모동면
(현 경북 상주시 모동면 상판리) |
|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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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남
(봉안군으로 추정) |
왕자수장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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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양주군 진접면
(현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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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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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군
(성종·숙의홍씨 3남) |
견성군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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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양양군 강현면
(현 강원 양양군 강현면 하복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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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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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원자
(연산군·신씨 장남) |
연산군원자금돌이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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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상주군 화서면
(현 경북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 |
경북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 3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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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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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대군
(연산군·신씨 남) |
연산군자인수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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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문경군 가은면
(현 경북 문경시 가은면 왕릉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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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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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왕녀 영수
(연산군·숙용장씨 녀) |
왕녀영수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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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양주군 진접면
(현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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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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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왕녀 복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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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녀복억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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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삼척군 삼척면
(현 강원 삼척시 자원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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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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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왕녀 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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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녀복합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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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황주군 인교면
(현 황해 황주시 인교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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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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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대원군
(선조 생부) |
덕흥대원군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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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금산군 추부면
(현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
금산역사문화박물관
(태실비 및 석함 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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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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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군
(선조·정빈민씨 장남) |
인성군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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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주군 용흥면
(현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산덕리) |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산덕리 411
(충북 시도기념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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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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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흥군
(선조·정빈민씨 차남) |
인흥군태실
|
경북 상주군 함창면
(현 경북 상주시 함창읍 태봉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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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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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공주
(효종·인선왕후 3녀) |
숙명공주태실
|
경북 김천군 지례면
(현 경북 김천시 지례면 관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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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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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정공주
(효종·인선왕후 5녀) |
숙정공주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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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원주군 흥업면
(현 강원 원주시 흥업면 대안리) |
강원 원주시 흥업면 대안리 산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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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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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경공주
(효종·인선왕후 6녀) |
숙경공주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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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김천군 지례면
(현 경북 김천시 지례면 관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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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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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선공주
(현종·명성왕후 장녀) |
명선공주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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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보령군 미산면
(현 충남 보령시 미산면 남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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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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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군
(숙종·명빈박씨 남) |
연령군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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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 대술면
(현 충남 예산군 대술면 궐곡리) |
충남대학교박물관
(태실비 및 석재 유구 일부 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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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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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유옹주
(영조·귀인조씨 녀) |
영조왕녀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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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당진군 순성면
(현 충남 당진시 순성면 성북리) |
당진 순성초등학교 경내
(태실비 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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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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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령옹주
(영조·숙의문씨 장녀) |
영조왕녀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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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 광시면
(현 충남 예산군 광시면 월송리) |
예산 대흥군관아 경내
(태실비 및 석함 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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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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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길옹주
(영조·숙의문씨 차녀) |
영조왕녀태실
|
충북 단양군 대강면
(현 충북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
충북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산 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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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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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소세손
(장조·헌경황후 장남) |
의소세손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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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군 영주면
(현 경북 영주시 고현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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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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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효세자
(정조·의빈성씨 남) |
문효세자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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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군 용문면
(현 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
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산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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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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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원자
(철종·철인황후 남) |
철종왕자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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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영월군 양변면
(현 강원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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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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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고종·귀인양씨 녀) |
덕혜옹주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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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비원
(현 창덕궁 후원 부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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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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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8남
(고종·광화당이씨 남) |
고종제팔남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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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비원
(현 창덕궁 후원 부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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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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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9남
(고종·보현당정씨 남) |
고종제구남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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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비원
(현 창덕궁 후원 부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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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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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손 이진
(의민황태자 장남) |
진전하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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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동경부 이왕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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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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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군
(성종·숙용심씨 차남) |
영산군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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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군 적성면
(현 파주시 적성면 어유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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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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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혜공주
(중종·문정왕후 장녀) |
의혜공주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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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 규암면
(현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함양리) |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함양리 97
(태실비 및 석함 : 부여 향토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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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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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평군
(선조·온빈한씨 차남) |
경평군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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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대전군 유성면
(현 대전 서구 가수원동) |
대전시립박물관
(태함 : 대전 국가유산 자료) |
고양 서삼릉
회묘(懷墓, 연산군 생모 폐비)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조성 연도 : 1482년(성종 13), 1497년(연산군 3), 1504년(연산군 10), 1969년
묘의 형식 : 단분

서삼릉_회묘_난간석(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회묘_무석인(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회묘_봉분(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회묘_석양과 석호(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회묘_전경(궁능유적본부)
▷ 회묘(懷墓) 이야기
회묘는 조선 9대 성종의 폐비이자 10대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묘이다. 1482년(성종 13) 폐비 윤씨가 사사되자 경기 장단(長湍)에 묘를 조성하였고, 1489년(성종 20)에 성종은 특별히 ‘윤씨지묘’라는 묘비를 세우도록 허락하였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1497년(연산군 3) 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으로 옮기고 묘의 이름을 회묘(懷墓)라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가 일어난 후 폐비 윤씨를 왕후로 추존하고 묘를 능으로 높여 회릉(懷陵)이라 한 후, 왕릉 제도에 맞게 새로 조성하였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회릉은 다시 회묘로 낮아졌다. 이후 1969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현재 회묘는 회릉으로 추봉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의 석물을 배치하였다.
▷ 폐비 윤씨(廢妃 尹氏) 이야기
폐비 윤씨(재세 : 1455년 음력 윤6월 1일 ~ 1482년 음력 8월 16일)는 본관이 함안인 함안부원군 윤기견과 장흥부부인 신씨의 딸로 1455년(단종 3)에 태어났다. 1473년(성종 4) 성종의 후궁이 되어 숙의(淑儀, 종2품)에 봉해졌다가, 다음 해 성종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476년(성종 7) 성종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 다른 후궁들을 투기하는 일이 자주 있었고, 1477년(성종 8)에는 중궁전에 비상(砒霜)과 주술 서책이 발견되어 원자(연산군)와 성종에게 해가 끼칠 위험이 있다 하여 폐위될 뻔하였으나 위기를 넘기기도 하였다. 1479년(성종 10)에는 왕비로서 품위를 잃었다 하여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되었다. 야사에 의하면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원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1482년(성종 13) 폐위된 지 3년 만에 사사되었다.
연산군은 왕위에 오른 후 성종의 능지문(陵誌文, 왕과 왕후의 생애와 행적을 쓴 글)을 읽으면서 자신이 폐비 윤씨의 아들임을 알고, 생모를 위해 제사를 지내주고 묘의 이름을 회묘라 올렸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가 일어난 후 왕후로 추존되어 시호(諡號)를 제헌왕후(齊獻王后)라 하였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윤씨의 모든 칭호를 없앴다.
고양 서삼릉
왕자·왕녀묘(王子·王女墓)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조성 연도 : 1935년~1939년, 1960년대

서삼릉_왕자·왕녀묘_문석인(궁능유적본부)

서삼릉_왕자·왕녀묘_봉분(궁능유적본부)

서삼릉_왕자·왕녀묘_석상(궁능유적본부)

서삼릉_왕자·왕녀묘_완친왕묘(궁능유적본부)

서삼릉_왕자·왕녀묘_전경(궁능유적본부)
▷ 왕자·왕녀묘
왕자·왕녀묘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왕과 황제의 왕자(대군과 군)묘 8기와 왕녀(공주와 옹주)묘 14기 등 총 22기의 묘가 있다. 조선과 대한제국 시대에는 모두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 조성되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35년부터 1939년까지 현재의 자리에 옮겨놓았다. 봉분에는 표석이 세워져 있으며, 표석 뒷면(또는 옆면)에는 언제 옮겨졌는지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다. 묘역은 하나의 담장안에 있으며, 앞에는 문석인과 상석,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일부 묘에는 해당 묘주(墓主)의 태실(胎室)도 묻혀있는데 그 표석에 ‘태실병장’이라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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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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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공주(貞昭公主)
(재세 : 1412년 ~ 1424년) |
인성대군(仁城大君)
(재세 : 1461년 ~ 1463년) |
인순공주(仁順公主)
(재세 : 1542년 ~ 15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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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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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소헌왕후 심씨 (첫째 딸)
|
예종, 장순왕후 한씨 (첫째 아들)
|
중종, 문정왕후 윤씨 (넷째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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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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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군 벽제면
(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
고양군 신도면
(현 서오릉 내 인성대군 초장지) |
양주군 진접면
(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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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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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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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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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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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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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공주지묘(貞昭公主之墓)
|
인성대군지묘(仁城大君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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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순공주지묘(仁順公主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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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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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王女)
(재세 : 1586년 ~ 1591년) |
숙신공주(淑愼公主)
(재세 : 1635년 ~ 1637년) |
명선공주(明善公主)
(재세 : 1659년 ~ 167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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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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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인선왕후 장씨 (첫째 딸)
|
현종, 명성왕후 김씨 (첫째 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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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지
|
양주군 진접면
(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
고양군 신도면
(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
광주군 중부면
(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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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연도
|
1939년
|
1936년
|
193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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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 앞면
|
왕녀지묘(王女之墓)
|
숙신공주지묘(淑愼公主之墓)
|
명선공주지묘(明善公主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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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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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공주(明惠公主)
(재세 : 1665년 ~ 1673년) |
화억옹주(和億翁主)
(재세 : 1717년 ~ 1718년) |
영조 왕녀(王女) 1
(재세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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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현종, 명성왕후 김씨 (둘째 딸)
|
영조, 정빈 이씨 (첫째 딸)
|
영조, 영빈 이씨
|
|
초장지
|
광주군 중부면
(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
고양군 신도면
(현 서울 은평구 진관동) |
고양군 신도면
(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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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연도
|
1936년
|
1939년
|
193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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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 앞면
|
명혜공주지묘(明惠公主之墓)
|
어필 증화억옹주지묘(御筆 贈和億翁主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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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지묘(王女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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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주
|
영조 왕녀(王女) 2
(재세 : 1730년 ~ 1731년) |
영온옹주(永溫翁主)
(재세 : 1817년 ~ 1829년) |
대군(大君)
(재세 : 1820년 ~ 18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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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영조, 영빈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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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숙의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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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순원황후 김씨 (둘째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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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지
|
고양군 신도면
(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
경성부 청엽정
(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
경성부 신촌정
(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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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연도
|
1939년
|
1939년
|
193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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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 앞면
|
왕녀지묘(王女之墓)
|
영온옹주지묘(永溫翁主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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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지묘(大君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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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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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王女)
(재세 : 미상) |
원자(元子)
(재세 : 1858년 ~ 1859년) |
원자(元子), 태실병장
(재세 : 1871년 ~ 1871년) |
|
부모
|
헌종, 숙의 김씨
|
철종, 철인황후 김씨
|
고종, 명성황후 민씨 (첫째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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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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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 청엽정
(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
고양군 연희면
(현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
경성부 북아현정
(현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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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연도
|
1939년
|
1935년
|
193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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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 앞면
|
왕녀지묘(王女之墓)
|
원자지묘(元子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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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지묘(元子之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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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주
|
왕녀(王女)
(재세 : 미상) |
대군(大君), 태실병장
(재세 : 1878년 ~ 1878년) |
공주(公主), 태실병장
(재세 : 1871년 ~ 187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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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고종, 내안당 귀인 이씨
|
고종, 명성황후 민씨 (넷째 아들)
|
고종, 명성황후 민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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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지
|
고양군 연희면
(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
고양군 신도면
(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
고양군 숭인면
(현 서울 성북구 석관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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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연도
|
1936년
|
1935년
|
193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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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 앞면
|
왕녀지묘(王女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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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지묘(大君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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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지묘(公主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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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주
|
왕녀(王女)
(재세 : 미상) |
대군(大君)
(재세 : 1875년 ~ 1875년) |
왕자(王子) (육(堉))
(재세 : 1914년 ~ 19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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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고종, 영보당 귀인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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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명성황후 민씨 (셋째 아들)
|
고종, 광화당 귀인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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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지
|
경성부 금정
(현 서울 용산구 청파동) |
고양군 숭인면
(현 서울 성북구 정릉동) |
경성부 청량리정
(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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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연도
|
1936년
|
1935년
|
193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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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 앞면
|
왕녀지묘(王女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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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지묘(大君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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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지묘(王子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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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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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王子) (우(堣))
(재세 : 1915년 ~ 19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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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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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보현당 귀인 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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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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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군 둑도면
(현 서울 광진구 능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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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연도
|
193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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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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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지묘(王子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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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친왕(完親王)묘
완친왕묘는 대한제국 1대 고종의 첫째 아들 완친왕의 묘이다. 완친왕은 1880년(고종 17)에 세상을 떠나 양주 치남 월곡(현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 묘가 조성되었다. 이후 1960년대 도시화 개발로 서삼릉 후궁묘 내 숙의 묘역으로 묘를 옮겼다.
완친왕(재세 : 1868년 음력 윤4월 10일 ~ 1880년 음력 1월 12일)은 고종과 영보당 귀인 이씨의 아들로 1868년(고종 5)에 태어났다. 1876년(고종 13) 완화군(完和君)에 봉해졌으나, 1880년(고종 17) 13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7년(융희 1)에 완친왕(完親王)으로 신분이 높아졌다.
묘에는 상석과 향로석, 표석이 있는데, 표석에는 ‘유명조선국 왕자영종정경부사완화군 증시효헌공묘(有明朝鮮國 王子領宗正卿府事完和君 贈諡孝憲公墓)’라 쓰여있다. 그 밖에 원래 자리에 있는 석물과 신도비는 서울 태릉과 강릉 내 조선왕릉전시관 앞에 있다.
고양 서삼릉
후궁묘(後宮墓)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조성 연도 : 1930년대~1940년대, 1960년대~1970년대

서삼릉_후궁묘(빈·귀인묘)_곡장(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후궁묘(빈·귀인묘)_봉분(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후궁묘(빈·귀인묘)_전경(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후궁묘(숙의묘)_봉분(궁능유적본부)

서삼릉_후궁묘(숙의묘)_전경(궁능유적본부)
▷ 숙의 묘역
숙의 묘역에는 조선의 후궁묘 5기가 있다. 모두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 조성되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38년부터 1940년까지 현재의 자리에 옮겨놓았다. 이 묘역은 한 담장 안에 있으며 각 묘 봉분 앞에는 상석과 표석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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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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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후궁 소의 유씨(昭儀 劉氏)
(재세 : ? ~ 1688년) |
순조 후궁 숙의 박씨(淑儀 朴氏)
(재세 : 미상) |
헌종 후궁 숙의 김씨(淑儀 金氏)
(재세 : 1813년 ~ 189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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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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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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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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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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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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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군 신도면
(현 서울 은평구 진관동) |
경성부 청엽정
(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
남부 두모방 진팔리
(현 서울 성동구 행당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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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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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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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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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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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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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강릉유씨지묘
(昭儀江陵劉氏之墓) |
숙의밀양박씨지묘
(淑儀密陽朴氏之墓) |
숙의김해김씨지묘
(淑儀金海金氏之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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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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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후궁 숙의 나씨(淑儀 羅氏)
(재세 : 미상) |
인조 후궁 숙원 장씨(淑媛 張氏)
(재세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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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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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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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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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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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군 신도면 지축리
(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
고양군 은평면 신사리
(현 서울 은평구 신사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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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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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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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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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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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의나씨지묘
(淑儀羅氏之墓) |
숙원장씨지묘
(淑媛張氏之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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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귀인 묘역
빈·귀인 묘역에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후궁묘 16기가 있다. 모두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 조성되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까지 일부를 옮겼고, 광복 후 도시화 개발로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일부를 옮겨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이 묘역은 한 담장 안에 있으며 각 묘 봉분 앞에는 상석과 표석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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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주
|
명종 후궁 경빈 이씨(慶嬪 李氏)
(재세 : 미상) |
숙종 후궁 귀인 김씨(貴人 金氏)
(재세 : 1690년 ~ 1735년) |
철종 후궁 귀인 조씨(貴人 趙氏)
(재세 : 1842년 ~ 186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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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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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첨정, 전주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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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구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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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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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연안 → 양주군 풍양
(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
고양군 원당면 인창리
(현 구리 동구릉 부근) |
포천군 서면 선단리
(현 포천시 선단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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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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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
1966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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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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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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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조선국증경빈이씨묘
(有明朝鮮國贈慶嬪李氏墓) |
조선국귀인경주김씨지묘
(朝鮮國貴人慶州金氏之墓) |
귀인평양조씨지묘
(貴人平壤趙氏之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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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주
|
철종 후궁 귀인 박씨(貴人 朴氏)
(재세 : 1827년 ~ 1889년) |
철종 후궁 숙의 방씨(淑儀 方氏)
(재세 : 미상) |
철종 후궁 숙의 김씨(淑儀 金氏)
(재세 : 183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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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미상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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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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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지
|
포천군 서면 선단리
(현 포천시 선단동) |
고양군 은평면 홍제외리
(현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
고양군 은평면 홍제외리
(현 사울 서대문구 홍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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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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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
1969년
|
196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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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 앞면
|
귀인밀양박씨지묘
(貴人密陽朴氏之墓) |
숙의온양방씨지묘
(淑儀溫陽方氏之墓) |
숙의김해김씨지묘
(淑儀金海金氏之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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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주
|
철종 후궁 숙의 범씨(淑儀 范氏)
(재세 : 1838년 ~ 1883년) |
정조 후궁 원빈 홍씨(元嬪 洪氏)
(재세 : 1766년 ~ 1779년) |
정조 후궁 의빈 성씨(宜嬪 成氏)
(재세 : 1753년 ~ 178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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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범원식
|
홍낙춘, 우봉 이씨
|
성윤우, 부안 임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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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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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군 은평면 홍제외리
(현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
(현 서울 성북구 안암동) |
고양군 율목동(경성부 금정)
(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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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연도
|
1966년 이후
|
1949년
|
19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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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 앞면
|
숙의나주범씨지묘
(淑儀羅州范氏之墓) |
원빈풍산홍씨지묘
(元嬪豐山洪氏之墓) |
의빈창녕성씨지묘
(宜嬪昌寧成氏之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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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주
|
정조 후궁 화빈 윤씨(和嬪 尹氏)
(재세 : 1765년 ~ 1824년) |
헌종 후궁 경빈 김씨(慶嬪 金氏)
(재세 : 1832년 ~ 1907년) |
고종 후궁 보현당 귀인 정씨(貴人 鄭氏)
(재세 : 미상) |
|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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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윤, 성주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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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청, 평산 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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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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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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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 고양군 연희면 아현북리
(현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
고양군 숭인면 휘경리, 구 휘경원 부근
(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
현 서울 동대문구 월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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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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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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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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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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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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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빈남원윤씨지묘
(和嬪南原尹氏之墓) |
대한 경빈김씨지묘
(大韓 慶嬪金氏之墓) |
보현당해주정씨지묘
(寶賢堂海州鄭氏之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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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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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후궁 정화당 김씨(貞和堂 金氏)
(재세 : 미상) |
고종 후궁 귀인 양씨(貴人 梁氏)
(재세 : 1882년 ~ 1929년) |
고종 후궁 영보당 귀인 이씨(貴人 李氏)
(재세 : 1843년 ~ 192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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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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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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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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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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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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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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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군 숭인면 월곡리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
고양군 숭인면 월곡리
(서울 성북구 월곡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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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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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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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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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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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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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당광산김씨지묘
(貞和堂光山金氏之墓) |
귀인양씨지묘
(貴人梁氏之墓) |
귀인이씨지묘
(貴人李氏之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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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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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후궁 내안당 귀인 이씨(貴人 李氏)
(재세 : 1847년 ~ 19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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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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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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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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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군 숭인면 월곡리
(서울 성북구 월곡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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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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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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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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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인이씨지묘
(貴人李氏之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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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서삼릉
경선군·경완군묘(慶善君·慶完君墓) [비공개]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조성 연도 : 1648년(인조 26)
묘의 형식 : 쌍분

서삼릉_경선군·경완군묘_전경(궁능유적본부)
고양 서삼릉
경선군·경완군묘(慶善君·慶完君墓) [비공개]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조성 연도 : 1648년(인조 26)
묘의 형식 : 쌍분
▷ 경선군·경완군묘(慶善君·慶完君墓) 이야기
경선군·경완군묘는 조선 16대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의 첫째 아들 경선군과 둘째 아들 경완군의 묘이다. 묘는 쌍분의 형식으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경선군, 오른쪽이 경완군의 묘이다. 1648년(인조 26) 제주도 유배지에 있던 경선군과 경완군이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소현세자의 묘(소경원) 앞쪽에 묘를 조성하였다. 묘에는 문석인과 상석을 배치하였고, 경선군묘 봉분 앞에는 ‘경선군지묘’라 쓰여있는 표석이 있다.
▷ 경선군(慶善君) 이야기
경선군(재세 : 1636년 음력 3월 25일 ~ 1648년 음력 9월 18일)은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첫째 아들로 1636년(인조 14)에 원손(元孫)으로 태어났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청나라의 요청으로 심양에 볼모로 잠깐 가기도 하였다. 1645년(인조 23) 아버지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다음 해 어머니 민회빈 강씨가 폐위되어 사사되었다. 1647년(인조 25) 두 동생(경완군, 경안군)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1648년(인조 26) 13세로 세상을 떠났다. 1659년(효종 10)에 경선군(慶善君)으로 신분이 회복되었다.
▷ 경완군(慶完君) 이야기
경완군(재세 : 1640년 ~ 1648년 음력 12월 23일)은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둘째 아들로 1640년(인조 18)에 태어났다. 1647년(인조 25) 형 경선군과 동생 경안군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9세로 세상을 떠났다. 1872년(고종 9)에 경완군(慶完君)으로 신분이 회복되었다.
고양 서삼릉
영동현주·이숙무묘(永同縣主·李叔畝墓) [비공개]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조성 연도 : 1439년(세종 21), 1458년(세조 4)
묘의 형식 : 쌍분

서삼릉_영동현주묘_전경(궁능유적본부)
▷ 영동현주·이숙무묘(永同縣主·李叔畝墓) 이야기
영동현주·이숙무묘는 조선 1대 태조의 첫째 아들 진안대군의 딸 영동현주와 이숙무의 묘이다. 묘는 쌍분의 형식으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이 영동현주, 왼쪽이 이숙무의 묘이다.
묘의 봉분은 고려 말 조선 초기의 형식인 사각분의 모습에 호석(護石, 둘레돌)을 둘렀다.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과 상석, 표석을 세웠다. 표석에는 ‘조선 숭정대부지돈녕부부사 한산이공휘숙무 증시양도공지 묘, 배 영동현주 전주이씨 부우’라고 써있다.
▷ 영동현주(永同縣主) 이야기
영동현주(재세 : ? ~ 1458)는 태조의 첫째 아들 진안대군 이방우와 삼한국대부인 지씨의 딸로 태어났다. 처음 종친의 딸로 1413년(태종 13) 경혜옹주(敬惠翁主)가 되었고, 1440년(세종 22)에 호칭을 영동현주(永同縣主)로 고쳤다. 이숙무와의 사이에서 2남(이원증, 이형증) 4녀를 낳았으며, 1458년(세조 4)에 세상을 떠났다.
▷ 이숙무(李叔畝) 이야기
이숙무(재세 : ? ~ 1439년)는 본관이 한산인 이종학의 아들로 목은 이색의 손자이다. 처음 영동현주와 혼인하여 대호군(大護君)이 되었고, 1418년(세종 즉위) 우군 동지총제(右軍 同知摠制)가 된 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공안부 윤(恭安府 尹), 형조판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등을 거쳐 1437년(세종 19)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1439년(세종 21)에 세상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