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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및 종묘

동해건설산업 2025. 10. 21. 10:28

조선왕릉 이야기

 

서울 태릉과 강릉

 

태릉(泰陵, 중종비 문정왕후)

위치 : 서울 노원구 화랑로 681

조성 연도 : 1565(명종 20)

왕릉 형식 : 단릉

태릉과 강릉_태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태릉과 강릉_태릉_능침(궁능유적본부)

태릉과 강릉_태릉_무석인(궁능유적본부)

태릉과 강릉_태릉_문석인(궁능유적본부)

태릉과 강릉_태릉_병풍석(궁능유적본부)

태릉과 강릉_태릉_전경(궁능유적본부)

태릉과 강릉_태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태릉(泰陵) 이야기

 

태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 윤씨의 능이다. 1565(명종 20)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 능 자리를 중종의 정릉(靖陵) 부근(신정릉(新靖陵))으로 정하였으나 명종의 반대로 현재의 자리를 문정왕후의 능 자리로 정하고 능의 이름을 태릉이라 하였다. 원래 문정왕후는 남편 중종과 같이 묻히기를 원하여 당시 봉은사의 주지인 보우와 의논하여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희릉 옆에 있던 중종의 능을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그러나 옮긴 정릉은 지대가 낮아 비가 오면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명종은 어머니의 능을 지금의 자리로 정하게 되었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선릉·정릉과 마찬가지로 태릉과 강릉에도 왜적들에 도굴하려다 실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태릉은 국조오례의의 예에 따라 조성되어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병풍석에는 구름무늬와 십이지신을 새겼고,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겼다. 원래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긴 것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조성할 때만 적용되었는데, 태릉을 시작으로 십이지신상과 문자를 함께 새기는 것으로 바뀌었다. 능침 문석인과 무석인, 장명등 등 석물은 다른 조선왕릉에 비해 크게 세웠는데 이는 조선 중기의 양식이다. 특히 문석인과 무석인의 귓불에 귀고리 구멍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 능침 아래의 정자각은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94년에 복원하였다.

 

문정왕후(文定王后) 이야기

 

문정왕후 윤씨(재세 : 1501년 음력 1022~ 1565년 음력 47)는 본관이 파평인 파산부원군 윤지임과 전성부부인 이씨의 딸로 1501(연산군 7)에 태어났다. 1515(중종 10) 중종의 두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517(중종 12)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1(명종) 4녀를 낳았다.

 

당시 장경왕후의 아들인 인종이 왕세자로 책봉된 가운데 문정왕후가 경원대군(명종)을 낳자, 인종을 지지하는 대윤(大尹)과 경원대군을 지지하는 소윤(小尹) 간의 대립이 있었다. 1544년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윤이 정권을 잡았으나, 인종이 재위 9개월 만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이복동생 경원대군(명종)12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이때 왕실 최고 어른이자 명종이 어머니였던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고, 정권은 대윤에서 소윤으로 넘어갔다.

 

소윤은 의도적으로 대윤을 제거하기 위해 을사사화를 일으켰으며, 다시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대윤과 선비세력을 제거하였다. 수렴청정 기간 동안 정국은 불안정하여 매관매직이 빈번하였고,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또 문정왕후는 불교에 관심을 두어 불교 부흥에 앞장서 선교양종 및 승과제도를 부활시켰고, 보우를 봉은사의 주지로 임명하였다. 8여 년의 수렴청정을 끝내고 명종이 친정(親政)하였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문정왕후에게 있었다. 1565(명종 20)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서울 태릉과 강릉

 

강릉(康陵, 명종과 인순왕후)

위치 : 서울 노원구 화랑로 681

조성 연도 : 1567(선조 즉위), 1575(선조 8)

왕릉 형식 : 쌍릉

태릉과 강릉_강릉_곡장(궁능유적본부)

태릉과 강릉_강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태릉과 강릉_강릉_능침(궁능유적본부)

태릉과 강릉_강릉_문석인과 무석인(궁능유적본부)

태릉과 강릉_강릉_장명등(궁능유적본부)

태릉과 강릉_강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태릉과 강릉_강릉_표석(궁능유적본부)

 

강릉(康陵) 이야기

 

강릉은 조선 13대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능이다. 강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명종, 오른쪽(동쪽)이 인순왕후의 능이다. 강릉은 1567(명종 22) 명종이 어머니 문정왕후의 삼년상을 마친 후 며칠 뒤에 세상을 떠나자, 태릉 동쪽 언덕에 조성되었다. 이후 1575(선조 8) 인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명종의 능 동쪽에 능을 조성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문정왕후의 태릉을 조성한 지 2년 뒤에 조성된 능이기 때문에 태릉과 모습이 비슷하다. 두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였다.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 무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등을 배치하였고,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이 있다.

 

명종(明宗) 이야기

 

명종(재세 : 1534년 음력 522~ 1567년 음력 628, 재위 : 1545년 음력 76~ 1567년 음력 628)은 중종과 문정왕후 윤씨의 아들로 1534(중종 29)에 태어났다. 1539(중종 34) 경원대군(慶原大君)에 봉해졌고, 1545(인종 1) 이복형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 인종의 유명(遺命)으로 12살의 어린 나이에 경복궁 근정문에서 왕위에 올랐고,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재위 초에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 등이 일어나 소윤이 정권을 잡게 되었고, 외척 중심의 정치가 시작되면서 부정부패가 심해졌다. 사회적으로도 민생이 어지러워져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난 1553(명종 8)에 친정(親政)을 하여 외척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후 1567(명종 22) 경복궁 양심당에서 34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순왕후(仁順王后) 이야기

 

인순왕후 심씨(재세 : 1532~ 1575년 음력 12)는 본관이 청송인 청릉부원군 심강과 완산부부인 이씨의 딸로 1532(중종 27)에 태어났다. 1542(중종 27) 경원대군과 결혼하여 부부인(府夫人)에 되었으며, 1545년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1551(명종 6) 명종과의 사이에서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1563(명종 18)에 세상을 떠나는 비운을 겪었다. 1567(명종 22) 명종이 세상을 떠나자 명종의 유교(遺敎)에 따라 중종의 아들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선조)을 양자로 입양하였다. 이후 선조가 16세에 왕위에 오르자 8개월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고, 1575(선조 8) 창경궁 통명전에서 44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포 장릉

 

장릉(章陵,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

위치 : 경기 김포시 장릉로 79

조성 연도 : 1626(인조 4), 1627(인조 5), 1632(인조 10)

왕릉 형식 : 쌍릉

김포 장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김포 장릉_능침(궁능유적본부)

김포 장릉_문석인과 무석인(궁능유적본부)

김포 장릉_비각(궁능유적본부)

김포 장릉_연지(궁능유적본부)

김포 장릉_전경(궁능유적본부)

김포 장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장릉(章陵) 이야기

 

장릉은 왕으로 추존된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능이다. 장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원종, 오른쪽(동쪽)이 인헌왕후의 능이다.

 

1619(광해군 11) 선조의 아들 정원군(정원대원군, 원종)이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 양주 곡촌리(현 남양주시 금곡동)에 묘를 조성하였다. 1626(인조 4) 계운궁(연주부부인, 인헌왕후)이 세상을 떠나자 김포 성산을 무덤 자리로 정하고, 무덤의 이름을 능보다는 낮고 묘보다는 높게 정하여 중국의 예에 따라 ()’으로 정하였다. 이때 계운궁의 무덤 이름을 육경원(毓慶園)이라 하였고, 정원대원군의 무덤 이름을 흥경원(興慶園)이라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에 처음으로 왕의 생부모의 무덤을 으로 정한 최초의 사례이다. 이후 1627(인조 5) 흥경원과 육경원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1632(인조 10) 정원대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되면서 능의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고, 왕릉 제도에 맞게 무석인, 석마, 석양과 석호 등을 추가로 세웠다.

 

장릉 능침의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원의 형식에 따라 호석(護石)만 둘렀는데, 이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면 현궁(玄宮, 관을 묻는 방)의 훼손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있고, 비각 옆에는 땅에 묻혀있다가 노출되어 발굴·수습된 육경원 표석 받침돌이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지형에 따라 중간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재실 옆 연지(蓮池)는 현재 조선왕릉에 남아있는 연지 중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원종(元宗) 이야기

 

원종(재세 : 1580년 음력 622~ 1619년 음력 1229)은 선조와 인빈 김씨의 셋째 아들로 1580(선조 13) 경복궁 별전에서 태어났다. 1587(선조 20)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졌고,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선조를 모신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셋째 아들 능창군이 역모죄로 죽임을 당하자, 그의 화병으로 1619(광해군 11)40세로 세상을 떠났다. 1623(인조 1) 첫째 아들 능양군이 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자 왕의 생부로서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으로 신분이 높아졌고, 1632(인조 10) 왕으로 추존되어 묘호(廟號, 종묘에 붙여지는 이름)를 원종이라 하였다.

 

인조는 처음 할아버지 선조의 아들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는 인조 본인의 정통성에 문제가 되었다. 재위 초반부터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려고 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가 재위 10년 만에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여 정통성(선조(祖父)-원종()-인조) 문제를 정리하였다.

 

인헌왕후(仁獻王后) 이야기

 

인헌왕후 구씨(재세 : 1578년 음력 417~ 1626년 음력 114)는 본관이 능성인 능안부원군 구사맹과 평산부부인 신씨의 다섯째 딸로 1578(선조 11)에 태어났다. 1590(선조 23)에 선조의 아들 정원군(원종)과 혼인하여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이 되었고, 원종과의 사이에서 세 아들(인조, 능원대군, 능창대군)을 낳았다.

 

1623(인조 1) 첫째 아들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계운궁(啟運宮)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으로 신분이 높아졌고, 1626(인조 4) 경덕궁(현 경희궁) 회상전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1632(인조 10)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자 인헌왕후로 추존되었다.

 

김포 장릉

김포 장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김포 장릉_능침(궁능유적본부)

김포 장릉_문석인과 무석인(궁능유적본부)

김포 장릉_비각(궁능유적본부)

김포 장릉_연지(궁능유적본부)

김포 장릉_전경(궁능유적본부)

김포 장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장릉(章陵,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

위치 : 경기 김포시 장릉로 79

조성 연도 : 1626(인조 4), 1627(인조 5), 1632(인조 10)

왕릉 형식 : 쌍릉

 

장릉(章陵) 이야기

 

장릉은 왕으로 추존된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능이다. 장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원종, 오른쪽(동쪽)이 인헌왕후의 능이다.

 

1619(광해군 11) 선조의 아들 정원군(정원대원군, 원종)이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 양주 곡촌리(현 남양주시 금곡동)에 묘를 조성하였다. 1626(인조 4) 계운궁(연주부부인, 인헌왕후)이 세상을 떠나자 김포 성산을 무덤 자리로 정하고, 무덤의 이름을 능보다는 낮고 묘보다는 높게 정하여 중국의 예에 따라 ()’으로 정하였다. 이때 계운궁의 무덤 이름을 육경원(毓慶園)이라 하였고, 정원대원군의 무덤 이름을 흥경원(興慶園)이라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에 처음으로 왕의 생부모의 무덤을 으로 정한 최초의 사례이다. 이후 1627(인조 5) 흥경원과 육경원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1632(인조 10) 정원대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되면서 능의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고, 왕릉 제도에 맞게 무석인, 석마, 석양과 석호 등을 추가로 세웠다.

 

장릉 능침의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원의 형식에 따라 호석(護石)만 둘렀는데, 이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면 현궁(玄宮, 관을 묻는 방)의 훼손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있고, 비각 옆에는 땅에 묻혀있다가 노출되어 발굴·수습된 육경원 표석 받침돌이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지형에 따라 중간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재실 옆 연지(蓮池)는 현재 조선왕릉에 남아있는 연지 중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원종(元宗) 이야기

 

원종(재세 : 1580년 음력 622~ 1619년 음력 1229)은 선조와 인빈 김씨의 셋째 아들로 1580(선조 13) 경복궁 별전에서 태어났다. 1587(선조 20)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졌고,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선조를 모신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셋째 아들 능창군이 역모죄로 죽임을 당하자, 그의 화병으로 1619(광해군 11)40세로 세상을 떠났다. 1623(인조 1) 첫째 아들 능양군이 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자 왕의 생부로서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으로 신분이 높아졌고, 1632(인조 10) 왕으로 추존되어 묘호(廟號, 종묘에 붙여지는 이름)를 원종이라 하였다.

 

인조는 처음 할아버지 선조의 아들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는 인조 본인의 정통성에 문제가 되었다. 재위 초반부터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려고 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가 재위 10년 만에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여 정통성(선조(祖父)-원종()-인조) 문제를 정리하였다.

 

인헌왕후(仁獻王后) 이야기

 

인헌왕후 구씨(재세 : 1578년 음력 417~ 1626년 음력 114)는 본관이 능성인 능안부원군 구사맹과 평산부부인 신씨의 다섯째 딸로 1578(선조 11)에 태어났다. 1590(선조 23)에 선조의 아들 정원군(원종)과 혼인하여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이 되었고, 원종과의 사이에서 세 아들(인조, 능원대군, 능창대군)을 낳았다.

 

1623(인조 1) 첫째 아들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계운궁(啟運宮)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으로 신분이 높아졌고, 1626(인조 4) 경덕궁(현 경희궁) 회상전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1632(인조 10)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자 인헌왕후로 추존되었다.

 

파주 장릉

파주 장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파주 장릉_능침(궁능유적본부)

파주 장릉_문석인과 무석인(궁능유적본부)

파주 장릉_병풍석(궁능유적본부)

파주 장릉_병풍석과 난간석(궁능유적본부)

파주 장릉_전경(궁능유적본부)

파주 장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장릉(長陵, 인조와 인열왕후)

위치 : 경기 파주시 탄현면 장릉로 90

조성 연도 : 1636(인조 14), 1649(효종 즉위), 1731(영조 7)

왕릉 형식 : 합장릉

 

장릉(長陵) 이야기

 

장릉은 조선 16대 인조와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의 능이다. 장릉은 같은 봉분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의 형식으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인조, 오른쪽에 인열왕후를 모셨다. 장릉은 1635(인조 13) 인열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 파주 운천리에 조성되었다. 이때 인조는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었고, 1649년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쌍릉의 형태로 인조의 능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장릉이 풍수상 불길하고, 화재가 자주 일어나며 뱀의 피해가 잦자 1731(영조 7)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옮기면서 능의 형식을 쌍릉에서 세종의 영릉(英陵)의 예에 따라 합장릉으로 바꾸었다.

 

현재 장릉 능침 석물은 옛 장릉의 석물과 옮긴 후 새로 만든 석물이 같이 있어 17세기와 18세기의 왕릉 석물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옛 장릉의 석물로는 병풍석 일부(인석), 난간석 일부, 석상(혼유석) 2, 장명등, 망주석, 문석인, 무석인, 석양, 석양, 석호이며, 그 외 병풍석과 난간석은 옮기면서 새로 만들었다. 특히 기존 병풍석의 면석(面席)과 우석(隅石)의 무늬는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를 새겼는데 이는 불교의 영향이기 때문에 예에 어긋난다 하여 모란과 연꽃무늬로 바꾸었다. 이는 이후에 조성된 병풍석 조각에도 영향을 끼쳤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수복방, 수라간이 있고 홍살문부터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 양옆에는 제향 때 제관이 걷는 변로(邊路)가 남아있다.

 

인조(仁祖) 이야기

 

인조(재세 : 1595년 음력 117~ 1649년 음력 58, 재위 : 1623년 음력 313~ 1649년 음력 58)는 왕으로 추존된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첫째 아들로 1595(선조 28) 임진왜란으로 피란 중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607(선조 40) 능양도정(綾陽都正)이 되었고 이후 능양군(綾陽君)에 봉해졌다.

 

1623년 서인 정권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한 후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반정공신 책록의 불만으로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수습하는 등 즉위 초 반정으로 잡은 정권이 불안정하였다. 이괄의 난 이후에는 총융청(摠戎廳), 정묘호란 이후 수어청(守禦廳)을 새로 만들어 군제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나라가 성장하는 시기를 인식하지 못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외교정책으로 인해 두 차례의 침략(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을 당하게 되었다. 이후 1649(인조 27) 창덕궁 대조전에서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효종이 왕위에 오른 후 묘호(廟號, 종묘에 붙여지는 이름)를 열조(烈祖)라 하였으나, 최종적으로 인조라 정하였다.

 

인열왕후(仁烈王后) 이야기

 

인열왕후 한씨(재세 : 1594년 음력 71~ 1635년 음력 129)는 본관이 청주인 서평부원군 한준겸과 회산부부인 황씨의 딸로 1594(선조 27) 강원 원주 내우소에서 태어났다. 1610(광해군 2) 능양군과 혼인하여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에 봉해졌으며, 1623년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인조와의 사이에서 6(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 등) 1녀를 낳았으며, 1635(인조 13) 아이를 낳은 후 창경궁 여휘당 산실청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서울 의릉

의릉(경종)_능침(궁능유적본부)

의릉(경종)_능침(궁능유적본부)

의릉(선의왕후)_능침(궁능유적본부)

의릉(선의왕후)_석호(궁능유적본부)

의릉_구 중앙정보부 강당 2(궁능유적본부)

의릉_구 중앙정보부 강당 내부 2(궁능유적본부)

의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의릉_전경(궁능유적본부)

의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의릉_표석(궁능유적본부)

 

의릉(懿陵, 경종과 선의왕후)

위치 : 서울 성북구 화랑로32146-20

조성 연도 : 1724(영조 즉위), 1730(영조 6)

왕릉 형식 : 동원상하릉

 

의릉(懿陵) 이야기

 

의릉은 조선 20대 경종과 두 번째 왕비 선의왕후 어씨의 능이다. 의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위아래로 조성한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가장 위에 봉분이 경종의 능이고, 아래 봉분이 선의왕후의 능이다. 이렇게 능을 위아래로 조성한 이유는 쌍릉의 형태처럼 봉분을 나란히 조성할 경우, 풍수지리상 생기가 왕성한 정혈(正穴)이 벗어나기 때문에 위아래로 배치한 것이다.

 

의릉은 1724(경종 4)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 양주 중랑포 천장산 언덕인 현재의 자리에 조성되었다. 이후 1730(영조 6) 선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의릉 아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의릉 두 능의 봉분은 모두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렀고, 난간석에 십이지신을 문자로 새겼다. 경종의 능침과 선의왕후 능침 석물은 각각 조성되었으나 곡장은 경종의 능침에만 둘렀다. 의릉의 무석인은 갑옷 아래에 표범가죽을 두른 모습으로 조각된 것이 특징인데, 특히 경종의 능침 무석인이 두른 표범가죽은 둥글게 말린 꼬리까지 표현되어 있다. 또 선의왕후의 능침 석호는 다른 왕릉의 석호와 달리 꼬리가 등 위까지 올라가게 표현되었다.

 

의릉은 1960년대 초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의릉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능 주변으로 청사, 운동장, 강당 등을 짓고 일반인에게 비공개하였다. 이후 회의실을 비롯하여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인공연못을 조성하는 등 훼손이 심하였다. 이후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뀌고 청사를 서초구로 이전하면서 1996년에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되었고,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외래수종 제거, 전통수종 식재, 인공연못 성토, 금천교 복원 등 기초적인 의릉 능제복원 공사를 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경종(景宗) 이야기

 

경종(재세 : 1688년 음력 1028(27) ~ 1724년 음력 825, 재위 : 1720년 음력 613~ 1724년 음력 825)은 숙종과 옥산부대빈(희빈) 장씨의 아들로 1688(숙종 14) 창경궁 취선당에서 태어났다. 경종이 태어나고 원자로 정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 기사환국(己巳換局, 서인에서 남인으로 정권이 교체된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690(숙종 16)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701(숙종 27)에 무고의 옥으로 어머니 장씨의 죽음을 목격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후 1717(숙종 43) 숙종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았고(대리청정), 1720년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경덕궁(현 경희궁) 숭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경종 재위기간에는 노론과 소론이 치열하게 대립하여 옥사가 일어나 이를 수습하였고, 1723(경종 3) 서양의 소화기를 참고하여 수총기(水銃器)가 만들어졌다. 이후 1724(경종 4) 창경궁 환취정에서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종 재위 기간인 1721(경종 1)1722(경종 2)에는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의 왕세제 책봉을 둘러싸고 큰 옥사가 일어났는데 이를 신축·임인옥사(신임옥사)라고 한다. 1721년 당시 노론의 4대신인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를 중심으로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자는 주장을 하였는데,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종은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자 노론은 더 나아가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심해졌고, 소론은 이 일을 두고 노론 4대신을 유배 보냈다. 다음 해인 1722년 노론이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는 고변이 원인이 되어 소론은 노론 4대신을 사사하고 그 주변 인물들을 제거하였다. 이렇게 반대파를 제거한 소론은 정권을 잡게 되었으나 경종이 재위 4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실권을 잃었다.

 

* 경종 탄생일 : 숙종실록에는 1027(숙종실록 19, 141027), 지문(誌文)과 행장(行狀), 표석에는 1028일로 기록되어 있음.

 

선의왕후(宣懿王后) 이야기

 

선의왕후 어씨(재세 : 1705년 음력 1029~ 1730년 음력 629)는 본관이 함종인 함원부원군 어유구와 완릉부부인 이씨의 셋째 딸로 1705(숙종 31) 숭교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718(숙종 44) 왕세자빈 심씨(단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경종과의 사이에서 소생을 낳지 못하였으며, 영조가 즉위하자 경순왕대비(敬純王大妃)가 되었다. 이후 1730(영조 6) 경덕궁(현 경희궁) 어조당에서 26세로 세상을 떠났다.

 

* 서울 의릉 구 중앙정보부 강당(서울 懿陵 舊 中央情報部 講堂)

 

이 강당은 1962년부터 1995년까지 옛 중앙정보부에서 사용했던 강당으로 1962년에 건축가 나상진의 설계로 지어진 건물이다. 이후 10년 뒤 강당 옆에 회의실을 지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이곳에서 1972년 분단 이후 최초로 남한과 북한이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한 7·4남북공동설명이 발표된 역사적인 장소성을 인정받아 2004년 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파주 삼릉

파주 삼릉_공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파주 삼릉_공릉_능침(궁능유적본부)

파주 삼릉_공릉_문석인(궁능유적본부)

파주 삼릉_공릉_전경(궁능유적본부)

파주 삼릉_공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공릉(恭陵, 예종비 장순왕후)

위치 : 경기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

조성 연도 : 1462(세조 8), 1470(성종 1)

왕릉 형식 : 단릉

 

공릉(恭陵) 이야기

 

공릉은 조선 8대 예종의 첫 번째 왕비 장순왕후 한씨의 능이다. 공릉은 1461(세조 7) 장순왕후가 왕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1462(세조 8)에 파주 보시동(普施洞)인 현재의 자리에 왕세자빈의 묘로 조성하여 장순빈묘(章順嬪墓)라 불렀다. 이후 1470(성종 1) 장순왕후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공릉이라 하였다.

 

능침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석양과 석호 각 1쌍만 배치하여 간략하게 조성되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는 지형에 맞게 조성하여 한 번 꺾여있다.

 

장순왕후(章順王后) 이야기

 

장순왕후 한씨(재세 : 1445년 음력 116~ 1461년 음력 125)는 본관이 청주인 상당부원군 한명회와 황려부부인 민씨의 셋째 딸로 1445(세종 27) 사저에서 태어났다. 1460(세조 6)에 왕세자빈에 책봉되었고, 다음 해 원손(인성대군)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1461(세조 7) 안기(安耆)의 사저에서 17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조는 세상을 떠난 왕세자빈에서 장순(章順)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고, 성종이 왕위에 오른 후 1470(성종 1) 장순왕후로 추존되었다.

 

파주 삼릉

파주 삼릉_순릉_고석(궁능유적본부)

파주 삼릉_순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파주 삼릉_순릉_능침(궁능유적본부)

파주 삼릉_순릉_무석인(궁능유적본부)

파주 삼릉_순릉_전경(궁능유적본부)

 

순릉(順陵, 성종비 공혜왕후)

위치 : 경기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

조성 연도 : 1474(성종 5)

왕릉 형식 : 단릉

 

순릉(順陵) 이야기

 

순릉은 조선 9대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순릉은 1475(성종 5)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언니 장순왕후의 공릉이 있는 현재의 자리에 조성되었다. 순릉은 파주 삼릉에 있는 3기의 능 중에서 유일하게 왕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는데, 이는 공혜왕후가 중전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능침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왕릉의 형식에 맞게 문석인, 무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2쌍을 배치하였다. 석상을 받치는 고석(鼓石)의 귀면 무늬가 넓게 조각된 것이 특이하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수라간, 수복방 등이 있고, 비각 안에는 조선국 공혜왕후 순릉(朝鮮國 恭惠王后 順陵)’이라고 새겨져 있는 표석이 있다.

 

공혜왕후(恭惠王后) 이야기

 

공혜왕후 한씨(재세 : 1456년 음력 1011~ 1474년 음력 415)는 본관이 청주인 상당부원군 한명회와 황려부부인 민씨의 넷째 딸로 1456(세조 2) 연화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예종의 첫 번째 왕비 장순왕후와는 자매지간이 된다.

 

1467(세조 13) 잘산군(者乙山君, (성종))과 혼인하여 천안군부인(天安郡夫人)이 되었고, 1469년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성종과의 사이에서 소생을 낳지 못하였으며, 1474(성종 5) 창덕궁 구현전에서 19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죽고 사는 데는 천명이 있으니, 세 왕후를 모시고 끝내 효도를 다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성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파주 삼릉

파주 삼릉_영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파주 삼릉_영릉_능침(궁능유적본부)

파주 삼릉_영릉_석마(궁능유적본부)

파주 삼릉_영릉_전경(궁능유적본부)

파주 삼릉_영릉_표석(대왕)(궁능유적본부)

파주 삼릉_영릉_표석(세자)(궁능유적본부)

파주 삼릉_영릉_표석(황제)(궁능유적본부)

 

영릉(永陵, 추존 진종과 효순황후)

위치 : 경기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

조성 연도 : 1729(영조 5), 1752(영조 28), 1776(정조 즉위)

왕릉 형식 : 쌍릉

 

영릉(永陵) 이야기

 

영릉은 황제로 추존된 진종과 효순황후 조씨의 능이다. 영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진종, 오른쪽(동쪽)이 효순황후의 능이다. 1728(영조 4) 진종이 왕세자(효장세자)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1729(영조 5)에 파주 순릉 왼쪽 언덕인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1751(영조 27) 효순황후가 왕세자빈(현빈)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1752(영조 28) 효장세자묘 동쪽에 묘를 조성하였다. 1776년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조의 계승상 아버지가 되는 효장세자가 진종으로 추존되면서 능의 이름을 영릉이라 하였다.

 

영릉은 왕세자의 묘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간소한 모습이다. 능침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각 1쌍을 배치하였다. 능침 아래에는 2개의 비각 안에 3개의 표석이 있다. 1비는 효장세자와 효순현빈의 표석, 2비는 진종대왕과 효순왕후의 표석, 3비는 진종소황제와 효순소황후의 표석이다. 이는 진종이 추존될 때마다 표석을 새로 세웠기 때문이다.

 

진종(眞宗) 이야기

 

진종(재세 : 1719년 음력 215~ 1728년 음력 1116)은 영조와 정빈 이씨의 아들로 1719(숙종 45) 창의궁에서 태어났다. 1724년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경의군(敬義君)이 되었고, 다음 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728(영조 4) 창경궁 진수당에서 10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일찍 죽은 왕세자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1776(영조 52) 영조의 명으로 이복동생 추존 장조(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정조)이 양자로 입양되자 효장승통세자(孝章承統世子)가 되었다. 같은 해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진종으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1908(융희 2)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로 추존되었다.

 

효순황후(孝純皇后) 이야기

 

효순황후 조씨(재세 : 1715년 음력 1214~ 1751년 음력 1114)는 본관이 풍양인 풍릉부원군 조문명과 완흥부부인 이씨의 딸로 1715(숙종 41) 숭교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727(영조 3) 왕세자빈이 되었으나, 1729(영조 5)에 진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왕비가 되지 못하였다. 1735(영조 11) 현빈(賢嬪)에 봉해졌으며, 1751(영조 27)에 창경궁 건극당에서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왕세자빈에게 효순(孝純)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영조의 명으로 장조(사도세자)의 아들 세손(정조)이 진종의 양자로 입양되자 효순승통세자빈(孝純承統世子嬪)이라 하였다.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효순왕후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1908(융희 2)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로 추존되었다.

 

화성 융릉과 건릉

융릉과 건릉_융릉_개비자나무(궁능유적본부)

융릉과 건릉_융릉_능침(궁능유적본부)

융릉과 건릉_융릉_문석인과 무석인(궁능유적본부)

융릉과 건릉_융릉_병풍석(궁능유적본부)

융릉과 건릉_융릉_전경(궁능유적본부)

융릉과 건릉_융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융릉과 건릉_융릉_표석(궁능유적본부)

 

융릉(隆陵, 추존 장조와 헌경황후)

위치 : 경기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조성 연도 : 1762(영조 38), 1789(정조 13), 1816(순조 16), 1899(광무 3)

왕릉 형식 : 합장릉

 

융릉(隆陵) 이야기

 

융릉은 황제로 추존된 장조와 헌경황후 홍씨의 능이다. 융릉은 한 봉분 안에 황제와 황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이다. 1762(영조 38) 장조(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에 묘를 조성하였고, 이후 무덤을 수은묘(垂恩墓)라 불렀다. 1776년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에게 장헌세자(莊獻世子)라는 존호(尊號)를 올렸고, 묘를 원으로 높여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였다. 이는 장헌세자가 왕세자의 신분도 있었지만, 왕의 생부이기 때문에 무덤의 이름을 원으로 정한 것이다. 이후 정조는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1789(정조 13) 수원 화산인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원의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꾸었다. 1815(순조 15) 헌경황후(혜경궁)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 현륭원에 합장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광무 3) 장헌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되자 원을 능으로 높여 융릉이라 하였다.

 

융릉은 원으로 조성되었으나 정조가 특별히 예를 갖추어 화려하게 조성하여 다른 조선시대 왕세자 무덤의 형식과 다르다. 봉분은 병풍석만 둘렀고 난간석은 생략하였는데 병풍석은 인조의 장릉(長陵)의 예에 따라 모란과 연꽃무늬로 새겼고, 병풍석의 인석(引石)은 꽃봉오리 모양으로 조각하였다. 그리고 무석인을 추가로 설치하였고, 문석인은 금관조복을 입은 형태이며 석마, 석양, 석호는 각 1쌍씩 배치하였다. 능침 아래에 있는 비각에는 2개의 표석이 있는데 1비는 정조 대에 세운 사도장헌세자 현륭원표석이고, 2비는 조선시대 헌경혜빈표석을 대한제국 때 장조의황제 융릉 헌경의황후 부좌로 바꾼 표석이다. 홍살문 앞에는 동그란 모양의 연못인 곤신지(坤申池)가 있는데, 이는 풍수적 논리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장조(莊祖) 이야기

 

장조(재세 : 1735년 음력 121~ 1762년 음력 윤521)는 영조와 영빈 이씨의 아들로 1735(영조 11)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나 다음 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3세가 되었을 때 이미 효경을 외울 정도였으며, 수시로 글을 쓰고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왕세자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갖춰 영조의 기대가 매우 컸다.

 

그러나 1749(영조 25) 영조를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자(대리청정), 왕세자를 경계하는 세력과 대립하게 되었고 영조와도 불화가 자주 생겼다. 특히 1762(영조 38) 나경언이 왕세자의 비행을 고변하자 크게 노한 영조는 나경언을 처형하고 왕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하였다. 결국 영조는 왕세자를 폐위한 후 창경궁 휘령전(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신주를 모신 곳, 현 문정전) 앞에 있던 뒤주에 가두었고, 왕세자는 8일 만에 28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자신의 행동을 곧 후회하고 폐위하였던 왕세자의 신분을 회복한 후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이후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장헌세자(莊獻世子)라는 호칭을 올렸으며, 1899(광무 3) 고종의 직계 5대 조상의 자격(고조부)으로 장종대왕(莊宗大王)으로 추존되었다가 곧바로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되었다.

 

헌경황후(獻敬皇后) 이야기

 

헌경황후 홍씨(재세 : 1735년 음력 618~ 1815년 음력 1215)는 본관이 풍산인 영풍부원군 홍봉한과 한산부부인 이씨의 딸로 1735(영조 11) 반송방 외가 사저에서 태어났다. 1744(영조 20) 왕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1762(영조 38) 장조가 세상을 떠나자 혜빈(惠嬪)에 봉해졌다.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호칭을 높여 혜경궁(惠慶宮)이라 하였다. 헌경황후는 본인의 삶을 비롯하여 친정 가문, 그리고 남편 장조의 참변에 관한 이야기를 자전적 수필로 쓴 한중록을 남겼다.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왕실의 어른으로 생활하다가 1815(순조 15) 창경궁 경춘전에서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1899(광무 3) 사도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되자 헌경왕후(獻敬王后)로 추존되었고, 곧바로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추존되었다.

 

* 화성 융릉 개비자나무(華城 隆陵 개비자나무)

 

개비자나무는 개비자나무과의 늘푸른 바늘잎 작은키나무로 보통 높이 3m 이내로 자란다. 융릉 재실에 위치하고 있는 이 개비자나무는 높이가 4m에 이르고 줄기 둘레도 80cm에 이르는 등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으로 조사되어 융릉 재실 조성 당시에 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보존 상태가 우수하여 우리나라 개비자나무를 대표하여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커 2009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화성 융릉과 건릉

융릉과 건릉_건릉_곡장(궁능유적본부)

융릉과 건릉_건릉_난간석(궁능유적본부)

융릉과 건릉_건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융릉과 건릉_건릉_능침(궁능유적본부)

융릉과 건릉_건릉_문석인과 무석인(궁능유적본부)

융릉과 건릉_건릉_비각(궁능유적본부)

융릉과 건릉_건릉_전경(궁능유적본부)

 

건릉(健陵, 정조와 효의황후)

위치 : 경기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조성 연도 : 1800(순조 즉위), 1821(순조 21)

왕릉 형식 : 합장릉

 

건릉(健陵) 이야기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와 효의황후 김씨의 능이다. 건릉은 한 봉분 안에 황제와 황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이다. 건릉은 1800(정조 24)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장조의 융릉(당시 사도세자의 현륭원) 동쪽 언덕에 조성하였다. 그러나 풍수상 불길하다는 논의가 있어 1821(순조 21) 효의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건릉을 옮기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능 자리는 융릉 서쪽 언덕인 현재의 자리로 정하고 정조를 먼저 모신 다음에 효의황후를 합장하였다.

 

능침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봉분 주변의 석물은 융릉과 달리 왕릉의 형식에 맞게 세웠다. 문석인은 융릉의 예에 따라 금관조복을 입은 형태이다. 능침 아래에 있는 비각에는 1개의 표석이 있는데 원래 정종대왕과 효의왕후의 표석이었으나, 대한제국 선포 후 정조로 추존되면서 기존 표석을 갈아서 정조선황제와 효의선황후로 다시 새겼다.

 

정조(正祖) 이야기

 

정조(재세 : 1752년 음력 922~ 1800년 음력 627, 재위 : 1776년 음력 310~ 1800년 음력 627)는 황제로 추존된 장조와 헌경황후 홍씨의 둘째 아들로 1752(영조 28)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1759(영조 35)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1762(영조 38)에 아버지 장조의 죽음을 목격하는 일을 겪었다. 영조는 정조에게 왕위 계승의 명분을 주기 위해 일찍 세상을 뜬 첫째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정하였다. 정조는 1775(영조 51) 영조를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았고(대리청정), 다음 해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경희궁 숭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 동안 아버지 장조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노력하였고,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제거하였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을 계승하여 당파와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과 학문을 통해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 학문연구 기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였고, 신해통공(금난전권 폐지 등)을 실시하였으며 활자를 새로 만들어 많은 책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흉년으로 어린이들의 구호를 위해 자휼전칙(字恤典則)을 만들었고,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으며 수원 화성(華城)을 건축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현 서울 배봉산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하였다. 1790(정조 14)부터 1796(정조 20)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인 과천, 안양, 사근참, 시흥, 안산, 화성에 행궁(行宮, 왕이 임시로 머무는 궁)을 설치하였다. 특히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조는 현륭원을 옮긴 이후 재위 후반까지 12차례에 걸려 원행(園行)을 하였고, 이때마다 화성행궁에서 크고 작은 행사를 거행하였다. 화성행궁은 성곽과 더불어 정조가 지향했던 왕권 강화정책의 상징물로 정치적, 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후 1800(정조 24) 창경궁 영춘헌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나 묘호(廟號, 종묘에 붙여지는 이름)를 정종(正宗)이라 하였다가, 대한제국 선포 후 1899(광무 3)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로 추존되었다.

 

효의황후(孝懿皇后) 이야기

 

효의황후 김씨(재세 : 1753년 음력 1213~ 1821년 음력 39) 본관이 청풍인 청원부원군 김시묵과 당성부부인 홍씨의 딸로 1753(영조 29) 가회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762(영조 38)에 왕세손빈이 되었고,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조와의 사이에서 소생을 낳지 못하였으나, 천성이 공손하고 온후하여 60세가 넘어서도 정순왕후와 헌경황후를 잘 모셔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1800년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일생을 검소하게 지내어 수차례에 걸쳐 존호(尊號)를 올렸으나 선왕(정조)께서 존호를 받지 못하시는데, 미망인으로서 이를 받는 것이 어찌 가당하단 말인가.”라고 하며 모두 거절하였다고 한다. 1820(순조 20) 여러 대신들이 하수연(賀壽宴, 장수를 축하는 잔치)을 베풀고자 했으나 사양하였다고 한다. 이후 1821(순조 21) 창경궁 자경전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광무 3)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로 추존되었다.

 

남양주 홍릉과 유릉

홍릉과 유릉_덕혜옹주묘_전경(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영원, 회인원 전경(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유릉_전경(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의친왕묘_봉분(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홍릉_침전 내부(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홍릉_침전(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후궁묘_전경(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은 기존의 조선왕릉 형식이 아닌 대한제국 황제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고종은 대한제국 선포 전후로 대신들을 중국 황제릉으로 보냈고, 이를 바탕으로 명나라 황제릉의 제도를 일부 인용하고 기존의 조선왕릉 형식을 계승하여 새롭게 대한제국 황제릉 제도를 만들었다.

 

기존 조선왕릉과 달라진 점은 크게 두 가지인데, 먼저 제향을 지내는 건물인 정자각(丁字閣)을 일자형 침전(寢殿)으로 바꾸었고 침전 안에는 어탑(御榻)과 당가(唐家)를 배치하였다. 또 능침공간에 있던 문석인, 무석인, 석마, 석양, 석호 등을 침전 앞으로 배치하였는데, 석양과 석호를 없애고 기린석, 코끼리석, 사자석, 해치(해태), 낙타석, 석마 순서로 바꾸었다.

 

홍릉과 유릉 주변에는 의민황태자(영친왕)와 황태자비의 영원(英園), 황세손 이구의 회인원(懷仁園),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묘, 고종의 딸 덕혜옹주의 묘, 고종의 후궁(귀인 장씨, 광화당 귀인 이씨, 삼축당 김씨)과 의친왕의 후실(수관당 정씨, 수인당 김씨)의 묘 등 대한제국 황실 가족의 무덤이 있다.

연도
내용
1897년(광무 1)
고종 황후 명성황후의 홍릉 조성(현 서울 청량리 홍릉수목원 경내)
1900년(광무 4)
황제릉의 형식으로 현재의 자리에 홍릉 공사
1905년(광무 9)
순종 첫 번째 황태자비 순명비의 유강원 조성(현 서울 어린이대공원 근처)
1907년(융희 1)
유강원을 유릉으로 높임
1919년
홍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고종과 합장함
1926년
유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순종과 합장함
1964년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부인 의친왕비묘 조성
1966년
순종 두 번째 황후 순정황후를 유릉에 합장함
1967년
고종 후궁 광화당 귀인 이씨의 묘 조성
1970년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영원 조성
고종 후궁 삼축당 김씨의 묘 조성
1971년
영원을 현재의 자리로 옮김
1989년
고종 딸 덕혜옹주의 묘 조성
의민황태자비 이씨를 영원에 합장함
1996년
의친왕묘를 현 서삼릉 경내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의친왕비와 합장함
2005년
황세손 이구의 회인원 조성
2009년
귀인 장씨묘와 수관당 정씨묘를 현 서삼릉 경내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김

남양주 홍릉과 유릉

홍릉과 유릉_홍릉_난간석(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홍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홍릉_능침(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홍릉_문석인(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홍릉_재실(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홍릉_전경(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홍릉_침전 내부(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홍릉_침전 석물(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홍릉_침전(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홍릉_표석(궁능유적본부)

 

홍릉(洪陵, 고종과 명성황후)

위치 :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조성 연도 : 1897(광무 1), 1900(광무 4), 1919

왕릉 형식 : 합장릉

 

홍릉(洪陵) 이야기

 

홍릉은 대한제국 1대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의 능이다. 홍릉은 한 봉분 안에 황제와 황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으로, 기존 조선왕릉의 형식과 다른 대한제국 황제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1895(고종 32)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참변을 당한 후 폐위와 복위를 거쳐 현 동구릉 내 숭릉 오른쪽 언덕에 숙릉(肅陵)이라는 이름으로 왕릉공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친일 내각이 무너지면서 고종은 왕릉공사를 중단시켰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명성황후로 추존하고 홍릉이라는 이름으로 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에 능을 새로 조성하였다. 이때 대한제국 황제릉 제도를 일부 반영하여 제향을 지내는 건물인 정자각을 침전으로 바꾸었다. 이후 고종은 1900(광무 4) 새로운 홍릉 자리를 현 남양주시 금곡으로 정하고 대한제국 황제릉 형태로 공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바로 능을 옮기지 못하였다가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청량리 홍릉을 현재의 자리로 먼저 옮기고, 고종을 합장하여 현재의 홍릉이 되었다.

 

능침의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그 주변으로 석상(혼유석), 망주석, 장명등만 배치하였다. 제향공간인 침전 앞으로 문석인, 무석인, 기린석, 코끼리석, 사자석, 해치(해태), 낙타석, 석마 순으로 석물을 배치하였는데, 석마만 2쌍 배치하였다. 비각 안에는 1개의 표석이 있는데 앞면에만 대한 고종태황제 홍릉 명성태황후 부좌라고 새겨져 있다. 홍살문과 향로와 어로 사이에는 거석(炬石, 횃불을 걸어 놓을 때 쓰는 석조물로 추정)이 있다.

 

고종(高宗) 이야기

 

고종(재세 : 1852년 음력 725~ 1919년 양력 121, 왕재위 : 1863년 음력 1213~ 1897년 양력 1011, 황제재위 : 1897년 양력 1012~ 1907년 양력 719)는 흥선대원군(헌의대원왕)과 여흥부대부인(순목대원비) 민씨의 둘째 아들로 1852(철종 3) 청니방 사저(운현궁)에서 태어났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당시 대왕대비인 신정황후(추존 문조의 황후)의 명으로 익종(문조)의 양자로 입양되어 익성군(翼成君)에 봉해졌고, 관례(冠禮)를 행한 뒤 창덕궁 인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신정황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생부인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운영하였다가 1873(고종 10) 친정(親政)을 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세계정세에 발맞추고자 문호를 개방하여 서양과 수교를 하였고, 조사시찰단을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들여왔다. 하지만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의 대립으로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이 일어났고, 1894(고종 31)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같은 해 갑오개혁을 시행하여 정치·경제··사회제도 등을 바꾸었다. 그러나 1895(고종 32) 을미사변을 겪은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하였다(아관파천). 1897년 자주 독립국가의 체제를 갖추고, 세계열강과 동등한 국격을 갖추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로 정한 뒤 환구단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황위에 오른 후 개혁을 추진하여 일제를 견제하려 하였으나,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압력이 심해지는 가운데 1905(광무 9)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다.

 

1907년 을사늑약의 무효함을 주장하기 위해 세계만국평화회담이 열리는 헤이그로 밀사를 파견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이 일로 일제와 친일파의 강압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순종이 황위에 오른 후 태황제(太皇帝)로 불리다가 1910년 경술국치로 주권을 일제에게 빼앗기면서 조선국 이태왕(덕수궁 이태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1919년 덕수궁 함녕전에서 67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고종의 장례일을 맞추어 3·1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명성황후(明成皇后) 이야기

 

명성황후 민씨(재세 : 1851년 음력 925~ 1895년 음력 820)는 본관이 여흥인 여성부원군 민치록과 한창부부인 이씨의 딸로 1851(철종 2) 여주 사저에서 태어났다. 1866(고종 3) 고종의 생모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로 책봉되었다. 통상수교거부정책에 맞서 개화정책을 추진하였으나 1882(고종 19)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험해지자 궁궐을 탈출하여 피신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갑신정변(1884) 때에는 급진 개화파를 견제하였으며, 갑오개혁 이후 일제를 견제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895(고종 32)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에서 45세로 세상을 떠났다.

 

1894년 갑오개혁이 시행되자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를 사주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미우라는 1895102(양력) 한성신보사에 있는 낭인을 이용하고자 사장 아다치를 공사관으로 불러 거액의 거사자금을 주고 왕비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다. 그 외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 경찰관을 동원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 정부에서는 일본 훈련대의 해산과 무장해제를 통고하고,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한 일본은 명성황후의 시해 계획을 108(양력) 새벽으로 정하였다. 일본인 자객들은 명성황후의 처소인 건청궁 옥호루로 들이닥쳐 궁녀들 사이에서 명성황후를 찾아내 처참하게 살해한 후 시신을 불에 태웠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일제는 고종을 압박하여 폐위하였으나 곧바로 후궁()으로 삼았고, 두 달 후 다시 왕비의 신분을 회복하였다. 이후 고종은 장례를 준비하였으나 아관파천으로 장례를 중단하였고,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명성황후로 추존한 후 황후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남양주 홍릉과 유릉

홍릉과 유릉_유릉_기린석(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유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유릉_능침(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유릉_문석인(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유릉_병풍석과 난간석(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유릉_재실(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유릉_전경(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유릉_침전 내부(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유릉_침전 석물(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유릉_표석(궁능유적본부)

 

유릉(裕陵, 순종과 순명황후·순정황후)

위치 :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조성 연도 : 1905(광무 9), 1907(융희 1), 1926, 1966

왕릉 형식 : 합장릉

 

유릉(裕陵) 이야기

 

유릉은 대한제국 2대 순종과 첫 번째 황후 순명황후 민씨, 두 번째 황후 순정황후 윤씨의 능이다. 유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한 봉분 안에 황제와 두 황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가장 왼쪽에 순정황후, 가운데에 순종, 오른쪽에 순명황후를 모셨다. 유릉은 홍릉(洪陵)과 마찬가지로 대한제국 황제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유릉은 1904(광무 8) 순명황후가 황태자비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 현 용마산(어린이대공원 부근)에 유강원(裕康園)이라는 이름으로 조성되었다가, 1907년 순종이 황위에 오른 후 유릉으로 높였다.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용마산에 있던 유릉을 홍릉 동쪽 언덕에 옮기는 것으로 정하고 순종과 순명황후, 순정황후의 능 자리도 함께 공사하였다. 이후 순명황후를 먼저 모시고 순종을 합장하였으며, 1966년 순정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유릉에 합장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유릉은 홍릉에 비해 능역 규모가 좁지만, 홍릉과 같은 형태로 조성되었다. 능침의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그 주변으로 석상(혼유석), 망주석, 장명등만 배치하였다. 제향공간인 침전 앞으로 문석인, 무석인, 기린석, 코끼리석, 사자석, 해치(해태), 낙타석, 석마 순으로 석물을 배치하였는데, 석마만 2쌍 배치하였다. 비각 안에는 1개의 표석이 있는데 1966년 순정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2년 뒤에 새로 제작한 표석으로 ‘(우측면)대한 (앞면)순종효황제 유릉 순명효황후 부좌 순정효황후 부우라고 써있다.

 

순종(純宗) 이야기

 

순종(재세 : 1874년 음력 28~ 1926년 양력 425, 재위 : 1907년 양력 719~ 1910년 양력 829)은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의 둘째 아들로 1874(고종 11) 창덕궁 관물헌에서 태어났다. 바로 다음 해에 왕세자가 되었고 1897(광무 1)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7(광무 11) 일제의 압박으로 고종이 황위에서 물러나자 대한제국의 두 번째 황제로 경운궁(덕수궁) 돈덕전에서 황위에 올랐다. 황위에 오른 후 연호(年號)를 융희(隆熙)로 고치고, 일제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미7조약(丁未七條約)과 기유각서(己酉覺書) 등이 강제로 체결되었으며, 결국 1910(융희 4) 829,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되었다. 이후 조선국 이왕(창덕궁 이왕)으로 불리며 창덕궁에서 생활하다가 1926년 창덕궁 대조전에서 53세로 세상을 떠나 묘호(廟號)와 제호(帝號)를 합쳐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라 하였다. 순종의 장례일을 맞추어 6·10만세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순명황후(純明皇后) 이야기

 

순명황후 민씨(재세 : 1872년 음력 1020~ 1904년 양력 115)는 본관이 여흥인 여은부원군 민태호와 진양부부인 송씨의 딸로 1872(고종 9) 양덕방 계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882(고종 19) 왕세자빈이 되었고, 1897(광무 1) 황태자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순종이 황위에 오르기 전 1904(광무 8) 경운궁(현 덕수궁) 강태실에서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1907(융희 1) 순종이 황위에 오르자 황후로 추존되었고, 이후 시호(諡號)와 제호(帝號)를 합쳐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라 하였다.

 

순정황후(純貞皇后) 이야기

 

순정황후 윤씨(재세 : 1894년 음력 820~ 1966년 양력 23)는 본관이 해평인 해풍부원군 윤택영과 경흥부부인 유씨의 딸로 1894(고종 31) 양근(현 양평) 서종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윤증순(尹曾順)이다. 1904(광무 8) 순종의 첫 번째 황태자비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에 황태자비가 되었고, 같은 해 순종이 황위에 오르자 대한제국 최초의 황후로 책봉되었다.

 

순정황후는 한일병합을 반대하여 병풍 뒤에서 옥새를 치마속에 감추고 어전회의를 듣고 있다가 큰아버지 윤덕영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결국 1910(융희 4)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되자 조선국 이왕비(창덕궁 이왕비)로 신분이 낮아진 후 순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생활하였다. 순종이 세상을 떠난 후 일제의 침략행위와 광복과 한국전쟁을 겪었고, 1960년 이후 창덕궁으로 다시 환궁하였다. 1966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72세로 세상을 떠나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렀고, 시호(諡號)와 제호(帝號)를 합쳐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라 하였다.

 

남양주 홍릉과 유릉

홍릉과 유릉_영원_곡장(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영원_원침 전경(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영원_원침(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영원_재실(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영원_홍살문(궁능유적본부)

 

영원(英園, 의민황태자와 황태자비)

위치 :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조성 연도 : 1970, 1971, 1989

원의 형식 : 합장

 

영원(英園) 이야기

 

영원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의민황태자(영친왕)와 의민황태자비 이씨(이방자)의 원이다. 영원은 한 봉분 안에 황태자와 황태자비를 같이 모신 합장(合葬)의 형식으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의민황태자, 오른쪽에 의민황태자비를 모셨다. 영원은 1970년 의민황태자가 세상을 떠나자 홍릉 근처에 조성되었다가, 다음 해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이후 1989년 의민황태자비가 세상을 떠나자 영원에 합장되었다.

 

영원은 조선왕릉의 형태로 조성되었는데 원침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봉분 주변으로 문석인, 무석인, 석상(혼유석), 장명등,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원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향로와 어로, 홍살문을 조성하였고, 비각 안에는 1개의 표석(‘대한 의민황태자 영원 의민황태자비 부좌’)이 있다. 입구에 있는 재실은 1970년대 서울 의릉(경종의 능)의 재실을 옮겨왔다.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 이야기

 

의민황태자(재세 : 1897년 양력 1020~ 1970년 양력 51)는 고종과 순헌황귀비 엄씨의 아들로 1897(광무 1) 경운궁(현 덕수궁) 숙옹재에서 태어났다. 1900(광무 4) 영친왕(英親王)에 봉해졌고 1907(융희 1)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일본 유학이 결정되어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고, 1910년 경술국치로 이왕세자(李王世子)로 신분이 낮아졌다.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명목상으로 이왕(李王)의 지위를 받았으나 한국에 귀국하지 못하였다. 이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교수부장, 육군 중장이 되었다가 1945년 해방을 맞이하여 한국에 귀국하려 하였으나 무산되었다. 평민으로 강등된 황태자는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1963년 대한민국의 국적을 얻어 귀국하였으나 이미 병환이 악화되어 혼수상태로 귀국하게 되었다. 1970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73세로 세상을 떠났고, 신주는 종묘 영녕전 16실에 모셨다.

 

의민황태자비(懿愍皇太子妃) 이야기

 

의민황태자비 이씨(재세 : 1901년 양력 114~ 1989년 양력 430)는 일본 왕족인 이본궁 수정왕(梨本宮 守正王,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왕)과 이도자(伊都子, 이츠코)의 첫째 딸로 동경부 동경시 이본궁저에서 태어났다. 처음에 일본 황태자비로 정해졌었으나, 대한제국과의 정략결혼이 결정되면서 1920년 황태자와 결혼하였다. 의민황태자와의 사이에서 2(이진, 이구)을 낳았으며, 1945년 해방을 맞이하여 한국에 귀국하려 하였으나 무산되었다.

 

광복 후 일본 왕족에서도 제외되어 재산이 몰수되는 일을 겪었다가 1963년 대한민국의 국적을 얻어 귀국하였다. 귀국 후 사회봉사사업에 힘을 써 신체장애자 재활협회 부회장을 역임하였고, 사회복지법인 명휘원을 설립하였으며 의민황태자가 세상을 떠난 후 영친왕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지나온 세월, 세월이여 왕조여등이 있으며, 1989년 고종의 딸 덕혜옹주가 세상을 떠난 지 9일 만에 창덕궁 낙선재에서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신주는 종묘 영녕전 16실에 모셨다.

 

남양주 홍릉과 유릉

홍릉과 유릉_회인원_곡장(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회인원_문석인(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회인원_석양과 석호(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회인원_원침 전경(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회인원_원침(궁능유적본부)

 

회인원(懷仁園, 황세손 이구)

위치 :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조성 연도 : 2005, 2023

원의 형식 : 단분

 

회인원(懷仁園) 이야기

 

회인원은 의민황태자의 둘째 아들 황세손 이구의 원이다. 2005년 황세손이 세상을 떠나자 영원 경내에 회인원이 조성되었다. 조성 당시에는 봉분만 조성되었다가 2023년 원의 형식에 맞게 봉분 호석(護石), 문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곡장을 조성하였다.

 

황세손(皇世孫) 이야기

 

황세손 이구(재세 : 1931년 양력 1229~ 2005년 양력 716)는 의민황태자와 의민황태자비 이씨의 둘째 아들로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1945년 광복 후 귀국하려 하였으나 무산되어 일본에서 계속 생활하였다. 1953년 미국 메사추세츠 공과대학에 입학하여 건축가로서 활동하였고, 1959년에 미국인 줄리아와 결혼하였다. 1963년에 귀국한 후 창덕궁 낙선재에서 생활하며 서울대와 연세대 등에 출강하기도 하였다. 의민황태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명예총재로 지내다가, 2005년 일본에서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남양주 홍릉과 유릉

홍릉과 유릉_의친왕묘_망주석(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의친왕묘_봉분 전경(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의친왕묘_봉분(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의친왕묘_상석(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의친왕묘_장명등(궁능유적본부)

 

의친왕묘(義親王墓)

위치 :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조성 연도 : 1964, 1996

묘의 형식 : 합장

 

의친왕묘(義親王墓) 이야기

 

의친왕묘는 고종의 아들 의친왕과 의친왕비 김씨의 묘이다. 의친왕묘는 한 봉분 안에 의친왕과 의친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合葬)의 형식이다.

 

1955년 의친왕이 세상을 떠나자 양주 화양리(현 서울 광진구 화양동)에 묘가 처음 조성되었고, 1964년 의친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홍릉과 유릉 권역 내(현 외재실 부근)에 묘가 조성되었다. 1965년 화양리에 있던 의친왕묘는 어머니 귀인 장씨의 묘와 함께 고양 서삼릉 권역으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1996년 의친왕묘와 의친왕비의 묘를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합장하였다. 묘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 등을 배치하였다.

 

의친왕(義親王) 이야기

 

의친왕(재세 : 1877년 음력 330~ 1955년 양력 816)은 고종과 귀인 장씨의 아들로 1877(고종 14)에 태어나 1891(고종 28) 의화군(義和君)에 봉해졌다. 1899(광무 3) 고종의 명으로 미국유학을 하였고, 다음 해 의친왕에 봉해졌다. 1905(광무 9)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부장, 대한적십자 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등 조국의 광복에 힘썼다. 이후 대동단 간부들과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실패하였고,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끝까지 거부하였다. 1945년 광복 후 평민의 신분으로 살았고, 천주교의 세례를 받았으며 1955년 안국동에서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친왕비(義親王妃) 이야기

 

의친왕비 김씨(재세 : 1880년 음력 1121~ 1964년 양력 114)는 본관이 연안인 김사준과 창원황씨의 딸로 1880(고종 17)에 태어났다. 본명은 김덕수(金德修)이다. 1893(고종 30) 의화군과 혼인하여 연원군부인(延原郡夫人)에 봉해졌고, 1907(융희 1) 의친왕비에 봉해졌으나 의친왕과의 사이에서는 소생을 낳지 못하였다. 이후 경술국치와 광복, 한국전쟁을 겪었고, 천주교의 세례를 받았으며 1964년 궁정동 칠궁에서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남양주 홍릉과 유릉

홍릉과 유릉_덕혜옹주묘_봉분(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덕혜옹주묘_상석(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덕혜옹주묘_장명등(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덕혜옹주묘_전경(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덕혜옹주묘_표석(궁능유적본부)

 

덕혜옹주묘(德惠翁主墓)

위치 :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조성 연도 : 1989

묘의 형식 : 단분

 

덕혜옹주묘(德惠翁主墓) 이야기

 

덕혜옹주묘는 고종의 딸 덕혜옹주의 묘이다. 1989년에 덕혜옹주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묘가 조성되었다. 묘는 의친왕묘와 같이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 등을 배치하였고, 봉분 오른쪽에는 대한 덕혜옹주지묘라고 써있는 표석이 있다.

 

덕혜옹주(德惠翁主) 이야기

 

덕혜옹주(재세 : 1912년 양력 525~ 1989년 양력 421)는 고종과 귀인 양씨의 딸로 1912년에 덕수궁에서 태어났다. 고종이 60세에 낳은 딸로, 덕혜옹주를 위해 덕수궁 준명당에 유치원을 만들 정도로 덕혜옹주를 아꼈다고 한다. 아버지 고종이 세상을 떠난 후 1921년 덕혜의 호칭을 받았고, 1922년에 심상소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192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생활하면서부터 신경쇠약의 증세가 보이기 시작하였고, 1929년 생모 귀인 양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조현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1931년 대마도주의 후손 종무지(宗武志, 소 다케유키)와 정략결혼 후 딸(정혜)을 낳았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생활을 하였다. 결국 1955년에 종무지와 강제 이혼하였고, 딸 정혜도 실종되었다. 이후 1962년 대한민국 국적을 얻어 귀국한 후 창덕궁에서 생활하였고,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남양주 홍릉과 유릉

홍릉과 유릉_후궁묘_광화당 귀인 이씨묘(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후궁묘_귀인 장씨묘(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후궁묘_삼축당 김씨묘(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후궁묘_수관당 정씨묘(궁능유적본부)

홍릉과 유릉_후궁묘_수인당 김씨묘(궁능유적본부)

 

후궁묘(後宮墓)

위치 :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조성 연도 : 1967, 1970, 2009

 

후궁묘는 홍릉과 유릉 경내에 있는 대한제국 황실의 후궁들의 묘를 말한다. 이곳에 모셔진 후궁들은 조선과 대한제국 시기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광복, 한국전쟁을 겪었고, 이후에는 구황실(舊皇室)의 일원으로 생활하였다.

 

이곳에는 고종의 후궁 귀인 장씨, 광화당 귀인 이씨, 삼축당 김씨의 묘와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후실 수관당 정씨, 수인당 김씨의 묘가 있다.

 

귀인 장씨 묘(貴人 張氏 墓)

 

대한제국 1대 고종의 후궁 귀인 장씨(재세 : 18381012~ 18871014)는 본관이 덕수로, 1877(고종 14) 궁인의 신분에서 의친왕을 낳았다. 1887(고종 24) 50세로 세상을 떠난 후 1900(광무 4) 숙원(淑媛, 4)을 거쳐 1906(광무 10)에 귀인으로 추증되었다. 귀인 장씨의 처음 묘자리는 확실치 않고, 1911년에 두모포 화양정(현 서울 광진구 화양동)으로 옮겨졌고, 1965년 아들 의친왕묘와 함께 고양 서삼릉 권역으로 옮겨졌다. 2009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묘에는 봉분, 상석, 망주석, 표석이 있고, 2009년에 옮기면서 장명등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표석에는 증 귀인 덕수장씨 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광화당 귀인 이씨 묘(光華堂 貴人 李氏 墓)

 

대한제국 1대 고종의 후궁 광화당 귀인 이씨(재세 : 1885~ 19671110)의 본명은 이완덕(李完德)이다. 1898(광무 2)에 궁녀가 되었고, 1906(광무 10) 고종의 후궁이 되었다. 1914년 고종의 아들 이육(李堉)을 낳고 광화당이라는 호칭을 받았다. 이후 광복과 한국전쟁을 겪은 후 종로구 사간동에서 살다가 1967년에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삼축당 김씨 묘(三祝堂 金氏 墓)

 

대한제국 1대 고종의 후궁 삼축당 김씨(재세 : 1890~ 1970923)는 김순옥의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옥기(金玉基)이다. 1898(광무 2)에 궁녀가 되었고, 1911년 고종의 후궁이 되었다. 고종과의 사이에서는 소생이 없으며, 순종이 특별히 삼축당이라는 호칭을 내렸다. 이후 광복과 한국전쟁을 겪은 후 종로구 사간동에서 살다가 1970년에 세브란스 병원에서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수관당 정씨 묘(修觀堂 鄭氏 墓)

 

대한제국 1대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후실 수관당 정씨는 자세한 행적이 남아있지 않으나, 1909(융희 3) 사동궁에서 의친왕의 첫째 아들 이건(李鍵)을 낳았다. 원래 묘는 고양 서삼릉 경내 귀인 장씨의 묘 아래에 있었으나 2009년 귀인 장씨의 묘와 함께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옮기면서 장명등, 상석, 망주석, 표석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수인당 김씨 묘(修仁堂 金氏 墓)

 

대한제국 1대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후실 수인당 김씨의 본명은 김흥인(金興仁)으로, 자세한 행적이 남아있지 않으나 의친왕과의 사이에서 이우(李鍝), 이주(李鑄), 이곤(李錕)을 낳았다.

 

서울 정릉

정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정릉_능침(궁능유적본부)

정릉_문석인(궁능유적본부)

정릉_장명등(궁능유적본부)

정릉_전경(궁능유적본부)

정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정릉_표석(궁능유적본부)

 

정릉(貞陵, 태조비 신덕황후)

위치 : 서울 성북구 아리랑로 19116

조성 연도 : 1396(태조 5), 1409(태종 9), 1669(현종 10)

왕릉 형식 : 단릉

 

정릉(貞陵) 이야기

 

정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두 번째 왕비 신덕황후 강씨의 능이다. 1396(태조 5) 신덕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취현방(현 서울 중구 영국대사관 근처)에 정릉을 조성하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만들었다. 그러나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집을 짓는 것을 허락하였다. 1408(태종 8) 태조가 세상을 떠난 후 다음 해(1409) 정릉이 도성 안에 있는 것이 예에 어긋난다 하여 사을한 산기슭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옛 정릉의 목재는 태평관(太平館)을 짓는데 사용하였고, 병풍석과 난간석은 홍수로 무너진 청계천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다. 일반묘나 다름없었던 정릉은 260여 년이 지난 1669(현종 10)에 왕릉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정릉의 능침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이 있고 석양과 석호는 1쌍씩 배치하였다. 능침 석물 중 장명등과 석상(혼유석)을 받치는 고석(鼓石)만 옛 정릉의 석물이고 나머지는 현종 대에 다시 만든 석물이다. 장명등은 고려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왕릉 중 가장 오래된 석물이다. 능침 아래에 있는 비각에는 1개의 표석이 있는데 조선시대에 세운 조선국 신덕왕후 정릉의 표석을 대한제국 때 신덕왕후를 황후로 추존하면서 대한 신덕고황후 정릉으로 바꾸었다. 향로와 어로는 지형에 맞게 조성하여 한 번 꺾여있다.

 

신덕황후(神德皇后) 이야기

 

신덕황후 강씨(재세 : ?~ 1396년 음력 813)는 본관이 곡산인 상산부원군 강윤성과 진산부부인 강씨의 딸로 태어났다. 신덕황후는 태조의 경처(京妻, 고향에 본처를 두고 서울에서 결혼한 부인)가 되어 2(무안대군 방번, 의안대군 방석) 1(경순공주)를 낳았다. 신덕황후의 집안은 고려의 권문세가로서 태조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세력을 키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의 향처(鄕妻) 한씨(신의황후)가 이미 조선 건국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신덕황후가 조선의 첫 왕비(현비)가 되었고,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다. 그러나 이 일은 후에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1396(태조 5) 이득분의 사저에서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시호(諡號)를 신덕왕후(神德王后)라 하고 정릉을 조성한 후 정릉 옆에 흥천사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그러나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정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고, 1410(태종 10) 태조와 신의왕후(황후)의 신주만 종묘에 모시고, 신덕왕후는 태조의 왕비로 인정하지 않아 종묘에 신주를 모시지 않았다. 이후 선조 대에부터 신덕왕후의 예우를 높이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가, 1669(현종 10)에 신덕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고, 정릉을 새로 조성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광무 3)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로 추존되었다.

 

남양주 사릉

사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사릉_능침(궁능유적본부)

사릉_문석인(궁능유적본부)

사릉_비각(궁능유적본부)

사릉_숲길(궁능유적본부)

사릉_재실(궁능유적본부)

사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사릉(思陵, 단종비 정순왕후)

위치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

조성 연도 : 1521(중종 16), 1698(숙종 24)

왕릉 형식 : 단릉

 

사릉(思陵) 이야기

 

사릉은 조선 6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이다. 1521(중종 16) 정순왕후가 노산군부인(魯山君夫人)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묘는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시댁 해주 정씨의 집안 묘역인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고, 해주 정씨 집안에서 제사도 지내주었다. 1698(숙종 24) 정순왕후로 복위되면서 능의 이름을 사릉이라 하고 묘를 왕릉 제도에 맞게 다시 조성하였다. 이때 사릉 주변에 있던 해주 정씨 묘역을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숙종의 명으로 묘들을 그대로 두어 현재까지 남아있게 되었다.

 

사릉의 능침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을 세웠고, 석양과 석호는 1쌍씩 배치하였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수라간, 수복방, 홍살문 등이 있고, 비각 안에는 조선국 정순왕후 사릉(朝鮮國 定順王后 思陵)’이라고 새겨진 표석이 있다.

 

정순왕후(定順王后) 이야기

 

정순왕후 송씨(재세 : 1440년 음력 312~ 1521년 음력 64)는 본관이 여산인 여량부원군 송현수와 여흥부부인 민씨의 딸로 1440(세종 22) 전북 정읍 태인(현 정읍시)에서 태어났다. 1454(단종 2)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다음 해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남겨주고 상왕이 되자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가 되었다.

 

그러나 1456(세조 2)부터 계속해서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나면서 사육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제거되자 1457(세조 3) 단종은 노산군으로 신분이 낮아져 영월로 유배되었고, 정순왕후도 군부인으로 신분이 낮아져 현재의 동대문 밖 정업원에서 생활하였다. 정업원 뒤쪽 산봉우리(동망봉)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비통한 마음으로 단종을 그리워하며 한 많은 세월을 보냈다. 이후 1521(중종 16) 82세로 세상을 떠났고, 1698(숙종 24) 단종이 왕으로 신분이 회복되자 정순왕후도 왕비의 신분을 회복하였고, 시호(諡號)를 정순왕후라 정한 후 종묘에 신주를 모셨다.

 

정순왕후는 15세에 왕비가 되었다가 18세에 단종과 이별하고 평생 혼자 살았던 비운의 왕비인데, 정순왕후와 관련한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1457(세조 3) 단종이 영월에서 세상을 떠나자, 이 소식을 들은 정순왕후는 아침저녁으로 산봉우리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렸으며 온 마을 여인들이 땅을 한 번 치고 가슴을 한 번 치는 동정곡을 했다고 전한다. 그 뒤부터 이 봉우리는 왕후가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하여 동망봉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한경지략에 의하면 영도교 부근에 부녀자들만 드나드는 금남의 채소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정순왕후를 동정한 부녀자들이 끼니 때마다 정순왕후에게 채소를 가져다주었는데, 이를 궁에서 막자 정순왕후가 거처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장을 열어 주변을 혼잡하게 하고, 계속해서 몰래 채소를 전해주려는 여인들의 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양주 온릉

온릉_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온릉_능침(궁능유적본부)

온릉_문석인(궁능유적본부)

온릉_석마(궁능유적본부)

온릉_전경(궁능유적본부)

온릉_정자각(궁능유적본부)

온릉_향로와 어로(궁능유적본부)

 

온릉(溫陵, 중종비 단경왕후)

위치 : 경기 양주시 장흥면 호국로 255-41

조성 연도 : 1557(명종 12), 1739(영조 15)

왕릉 형식 : 단릉

 

온릉(溫陵) 이야기

 

온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첫 번째 왕비 단경왕후 신씨의 능이다. 1557(명종 12) 단경왕후가 폐비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나자, 친정 집안인 거창 신씨의 묘역인 지금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1739(영조 15)에 단경왕후로 복위되면서 능의 이름을 온릉이라 하고, 묘를 정릉(貞陵, 신덕황후)과 사릉(思陵, 정순왕후)의 예에 따라 다시 조성하였다.

 

능침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을 세웠고, 석양과 석호는 1쌍씩 배치하였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 등이 있고, 비각 안에는 조선국 단경왕후 온릉(朝鮮國 端敬王后 溫陵)’이라고 새겨진 표석이 있다.

 

단경왕후(端敬王后) 이야기

 

단경왕후 신씨(재세 : 1487년 음력 114~ 1557년 음력 127)는 본관이 거창인 익창부원군 신수근과 청원부부인 한씨의 딸로 1487(성종 18)에 태어났다. 1499(연산군 5) 성종의 아들 진성대군과 혼인하여 부부인(府夫人)이 되었고, 1506년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단경왕후의 아버지 신수근이 역적(연산군의 처남으로 중종반정을 반대했었음)이라는 이유로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폐위되었다.

 

1515(중종 10)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폐비 복위론이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1557(명종 12)71세로 세상을 떠났고, 세상을 떠난 지 182년이 지난 1739(영조 15) 왕비의 신분을 회복하여 시호(諡號)를 단경왕후라 하고 종묘에 신주를 모셨다.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

영휘원과 숭인원_영휘원_원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영휘원과 숭인원_영휘원_원침(궁능유적본부)

영휘원과 숭인원_영휘원_장명등(궁능유적본부)

영휘원과 숭인원_영휘원_전경(궁능유적본부)

영휘원과 숭인원_영휘원_표석(궁능유적본부)

 

영휘원(永徽園, 황태자 생모 황귀비)

위치 : 서울 동대문구 홍릉로 90

조성 연도 : 1911

원의 형식 : 단분

 

영휘원(永徽園) 이야기

 

영휘원은 대한제국 1대 고종의 후궁이자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생모 순헌황귀비 엄씨의 원이다. 영휘원은 1911년 황귀비 엄씨가 세상을 떠나자 명성황후의 홍릉(옛 홍릉) 경내인 현재의 자리에 조성되었다.

 

영휘원은 조선시대 왕의 생모의 무덤 제도(궁원제)에 따라 조성되었다. 원침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호석(護石)만 둘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각 1쌍을 배치하였다. 원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향로와 어로, 홍살문이 있고, 비각 안에는 순헌귀비 영휘원이라고 쓰여있는 표석이 있다.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이야기

 

순헌황귀비 엄씨(재세 : 1854~ 1911년 양력 720)는 본관이 영월인 증 찬성 엄진삼의 딸로 1854(철종 5)에 태어났다. 5살의 나이에 궁녀로 입궁하여 명성황후를 모시다가, 1895(고종 32)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에는 고종을 모셨다. 을미사변 후 일본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것을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이때 황귀비의 신분은 상궁이었는데, 며칠 동안 가마 2채로 궁을 출입하며 일본의 감시를 느슨하게 한 뒤 고종과 왕세자(순종)를 가마에 태워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시켰다고 한다. 이 사건을 아관파천이라고 한다.

 

이 일로 정식으로 고종의 후궁이 되어 1897(광무 1) 대한제국 선포 후 황태자인 영친왕을 낳았다. 이후 귀인(貴人), 순빈(淳嬪), 순비(淳妃)를 거쳐 1903(광무 7)에 황귀비로 책봉되었다. 황귀비는 여성의 신교육에 관심을 두어 진명여학교(현 진명여고)와 명신여학교(현 숙명여자대학교), 양정의숙(현 양정중·고등학교)의 설립을 지원하였다. 경술국치 후 1911년 덕수궁 즉조당에서 58세로 세상을 떠나 시호(諡號)를 순헌, 사당의 이름을 덕안궁(德安宮)이라 하였다.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

영휘원과 숭인원_숭인원_비각(궁능유적본부)

영휘원과 숭인원_숭인원_석호(궁능유적본부)

영휘원과 숭인원_숭인원_원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영휘원과 숭인원_숭인원_원침(궁능유적본부)

영휘원과 숭인원_숭인원_전경(궁능유적본부)

 

숭인원(崇仁園, 원손 이진)

위치 : 서울 동대문구 홍릉로 90

조성 연도 : 1922

원의 형식 : 단분

 

숭인원(崇仁園) 이야기

 

숭인원은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첫째 아들 원손 이진의 원이다. 숭인원은 1922년 원손이 세상을 떠나자 영휘원 동쪽 언덕에 조성되었다. 원침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호 1쌍을 배치하였다. 전체적인 모습은 영휘원과 비슷하나 봉분과 석물의 크기는 작다. 원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이 있고 비각 안에는 원손 숭인원이라고 쓰여있는 표석이 있다.

 

원손(元孫) 이야기

 

원손 이진(재세 : 1921년 양력 818~ 1922년 양력 511)은 의민황태자(영친왕)과 황태자비 이씨(이방자)의 첫째 아들로 일본에서 태어났다. 1922년 황태자 부부와 함께 잠시 귀국하였으나, 일본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인 1922511일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급사하였다. 순종은 원손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후하게 장례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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