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릉 이야기
서울 연산군묘

연산군묘_연산군 딸과 사위묘(궁능유적본부)

연산군묘_연산군묘 묘역 전경(궁능유적본부)

연산군묘_연산군묘 봉분(궁능유적본부)

연산군묘_연산군묘 상석(궁능유적본부)

연산군묘_연산군묘 표석(궁능유적본부)

연산군묘_의정궁주묘(궁능유적본부)

연산군묘_재실(궁능유적본부)
연산군묘(燕山君墓)
위치 : 서울 도봉구 방학로 17길 46
조성 연도 : 1454년(단종 2), 1512년(중종 7), 1537년(중종 32)
묘의 형식 : 묘역
▷ 연산군묘(燕山君墓) 이야기
연산군묘는 조선 10대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이다. 연산군묘는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분의 형식으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연산군, 오른쪽(동쪽)이 거창군부인의 묘이다. 연산군은 1506년(중종 1) 유배지인 강화 교동에서 세상을 떠나 그곳에 묘가 조성되었다가, 1512년(중종 7) 거창군부인이 중종에게 연산군묘 이장을 요청하여 양주 해촌(현 도봉구 방학동)인 지금의 자리로 묘를 옮겼다. 이후 1537년(중종 32) 거창군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연산군묘 옆에 묘가 조성되었다. 묘에는 문석인 2쌍, 망주석, 장명등, 상석, 향로석, 표석을 배치하였고, 묘 근처에는 재실을 두었다.
▷ 연산군묘역(燕山君墓域) 이야기
이곳은 연산군과 거창군부인의 묘를 비롯하여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묘, 연산군의 딸(휘순공주)과 사위(능양위 구문경)의 묘가 같이 있다. 이 묘역은 원래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땅이었는데, 임영대군은 세종의 명으로 자식이 없던 태조의 후궁 성비 원씨와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를 모셨다. 1454년(단종 2) 의정궁주가 세상을 떠나자 자신의 땅인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고 제사를 맡았다. 이후 임영대군의 첫째 아들 오산군이 맡았고, 오산군의 묘 역시 이 근처에 조성되어 오산군파에서 묘를 관리하였다.
그러다가 1512년(중종 7) 임영대군의 외손녀인 거창군부인이 강화 교동에 있던 연산군묘를 자신의 외할아버지 땅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달라고 중종에게 요청하였다. 이로 인해 원래 있던 의정궁주묘 위에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묘가 조성되었고, 의정궁주묘 아래에 연산군의 딸과 사위의 묘가 조성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 연산군(燕山君) 이야기
연산군(재세 : 1476년 음력 11월 7일 ~ 1506년 음력 11월 6일, 재위 : 1494년 음력 12월 29일 ~ 1506년 음력 9월 2일)은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로 1476년(성종 7)에 태어났다. 연산군은 1479년(성종 10) 생모 윤씨가 폐위되자 성종의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의 손에서 자랐고, 실제로 정현왕후를 생모로 알고 자랐다. 1483년(성종 14)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94년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연산군은 성종의 능지문(陵誌文, 왕과 왕후의 생애와 행적을 쓴 글)을 읽다가 자신이 정현왕후가 아닌 폐비 윤씨의 아들임을 알았고 윤씨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연산군은 즉위 초 빈민을 구제하고 국경을 강화하기 위해 무기 제조에 힘을 썼고, 종묘에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는 등 왕으로서 위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김일손 등 사림파가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으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원인이 되어 사림이 피해를 본 사건)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생모 폐비 윤씨의 사사사건을 이용하여 훈구 및 사림파들이 척신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 사화 이후에는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아 경연(經筵)을 폐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으며 잔혹한 형벌을 시행하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결국 1506년 성희안, 박원종 등의 훈구세력들이 중종반정을 일으켜 왕위에서 폐위되었다. 이후 강화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유배지에서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 이야기
거창군부인 신씨(재세 : 1476년 음력 11월 29일 ~ 1537년 음력 4월 8일)는 본관이 거창인 거창부원군 신승선과 중모현주 이씨(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딸)의 딸로 1476년(성종 7)에 태어났다. 1488년(성종 19) 왕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494년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거창군부인으로 신분이 낮아져 궁 밖 정청궁(貞淸宮)에서 생활하였다. 1537년(중종 32)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 의정궁주 조씨(義貞宮主 趙氏) 이야기
의정궁주 조씨(재세 : ? ~ 1454년 음력 2월 8일)는 본관이 한양인 조뇌의 딸로 태어났다. 1422년(세종 4) 상왕 태종의 후궁으로 정해져 입궁하려고 하였으나, 곧바로 태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빈으로 책봉되지 못하였다. 이후 세종은 특별히 의정궁주라는 호칭을 내렸으며, 1454년(단종 2)에 세상을 떠났다.
▷ 연산군의 딸(휘순공주)과 사위(능양위 구문경) 이야기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는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장녀로 태어나 휘순공주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구문경과 혼인하였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공주의 칭호를 없앴다. 연산군의 사위 구문경은 본관이 능성인 구수영과 길안현주 이씨(세종의 아들 영응대군 딸)의 아들로 태어나, 1501년(연산군 7) 휘순공주와 혼인하여 능양위가 되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관직이 취소되었다. 반정 이후 아버지 구수영이 중종에게 휘순공주와의 이혼을 요청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남양주 순강원

순강원_순강원_동자석(궁능유적본부)

순강원_순강원_신도비(궁능유적본부)

순강원_순강원_원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순강원_순강원_원침(궁능유적본부)

순강원_순강원_정자각(궁능유적본부)
순강원(順康園, 추존 원종 생모 인빈) [비공개]
위치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2로 84-31
조성 연도 : 1613년(광해군 5), 1755년(영조 31)
원의 형식 : 단분
▷ 순강원(順康園) 이야기
순강원은 조선 14대 선조의 후궁이자 왕으로 추존된 원종의 생모 인빈 김씨의 원이다. 순강원은 1613년(광해군 5)에 인빈 김씨가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인빈묘(仁嬪墓)로 처음 조성되었다. 1623년(인조 1) 손자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후 1636년(인조 14) 묘소 입구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이후 영조 대에 들어 왕을 낳은 후궁(사친)의 사당과 무덤을 궁과 원으로 높이는 제도인 궁원제(宮園制)가 만들어지면서, 1755년(영조 31) 묘를 원으로 높여 이름을 순강원이라 하고 원의 형식에 맞게 다시 조성하였다.
원침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호석(護石)만 둘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상석, 향로석, 동자석(童子石), 묘표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각 1쌍을 배치하였다. 석마, 석양, 석호만 1755년(영조 31) 원으로 높여지면서 다시 만든 것이고, 나머지는 인빈묘 당시에 조성된 석물이다. 봉분앞에 있는 묘표석에는 ‘유명조선국 인빈김씨지묘’라고 써있다. 원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향로와 어로, 홍살문이 있으며, 비각 안에 있는 표석은 원으로 높여지면서 세운 표석으로 ‘유명조선국 경혜인빈 순강원’라고 써있다.
▷ 인빈 김씨(仁嬪 金氏) 이야기
인빈 김씨(재세 : 1555년 음력 2월 29일 ~ 1613년 음력 10월 29일)는 본관이 수원인 사헌부감찰 김한우와 전주 이씨의 딸로 1555년(명종 10)에 태어났다. 외사촌 언니인 명종의 후궁 경빈 이씨(당시 숙의 이씨)가 인빈을 궁중에서 길렀는데, 선조 즉위 후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의 총애를 받아 1573년(선조 6)에 선조의 후궁이 되어 숙원(淑媛, 종4품)이 되었다. 선조와의 사이에서 4남(의안군, 신성군, 원종, 의창군) 5녀(정신·정혜·정숙·정안·정휘옹주)를 낳았으며, 1604년(선조 37)에 인빈에 책봉되었다.
둘째 아들 신성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동인 정권의 지지를 받아 왕세자로 책봉되려 하였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실현되지 못하였다. 선조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사저에 나가서 생활하였으며, 1613년(광해군 5)에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1755년(영조 31) 궁원제의 예에 따라 시호를 경혜(敬惠), 사당의 이름을 저경궁(儲慶宮)이라 하였다.
남양주 순강원

순강원_순강원_전경(궁능유적본부)

순강원_의창군묘_봉분 전경(궁능유적본부)

순강원_의창군묘_봉분(궁능유적본부)

순강원_의창군묘_전경(궁능유적본부)

순강원_의창군묘_표석(궁능유적본부)
의창군묘(義昌君墓) [비공개]
위치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2로 84-31
조성 연도 : 1645년(인조 23)
묘의 형식 : 합장
▷ 의창군묘(義昌君墓) 이야기
의창군묘는 조선 14대 선조와 인빈 김씨의 넷째 아들 의창군과 부인 양천군부인 허씨의 묘이다. 의창군묘는 1645년(인조 23) 의창군이 세상을 떠난 후에 어머니 인빈 김씨의 순강원(당시 인빈묘) 동쪽 언덕에 조성되었다.
묘에는 문석인, 장명등, 상석, 동자석, 망주석, 묘표석이 있고, 봉분은 호석(護石)을 둘렀다. 봉분 앞에 있는 묘표석에는 ‘조선국왕자의창군 증시경헌공광지묘 양천군부인허씨부좌’라 써있다. 묘 앞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 의창군(義昌君) 이야기
의창군(재세 : 1589년 ~ 1645년)은 선조와 인빈 김씨의 넷째 아들로 1589년(선조 22)에 태어나 의창군에 봉해졌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1618년(광해군 10)에 허균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유배지에서 풀려났으며, 종친으로서 생활하다가 1645년(인조 23)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인 양천군부인 허씨陽川郡夫人 許氏)는 본관이 양천인 허성(허균의 형이자 난설한 허씨의 오빠)의 딸로 태어나 1603년(선조 36) 의창군과 혼인하였다. 의창군과의 사이에서는 소생을 낳지 못하였다.
광명 영회원

영회원_문석인(궁능유적본부)

영회원_원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영회원_원침(궁능유적본부)

영회원_장명등(궁능유적본부)

영회원_전경(궁능유적본부)
영회원(永懷園, 소현세자빈 민회빈) [비공개]
위치 : 경기 광명시 노온사동 산 141-20
조성 연도 : 1646년(인조 24), 1719년(숙종 44), 1870년(고종 7)
원의 형식 : 단분
▷ 영회원(永懷園) 이야기
영회원은 조선 16대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의 원이다. 1646년(인조 24) 소현세자빈 강씨가 폐세자빈의 신분에서 사사되자 친정 금천 강씨의 집안 묘역인 현재의 자리에 묘가 조성되었다. 1719년(숙종 44) 다시 신분이 회복되어 무덤의 이름을 민회묘(愍懷墓)라 하고, 무덤을 다시 세자빈묘의 형태로 다시 조성하였다. 이후 1870년(고종 7) 묘를 원으로 높여 이름을 영회원(永懷園)이라 하였다.
원침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봉분 주변에 문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석양과 석호 각 1쌍을 배치하였다. 홍살문, 정자각 등은 소실되었다.
▷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 이야기
민회빈 강씨(재세 : 1611년 ~ 1646년 음력 3월 15일)는 본관이 금천인 우의정 강석기와 고령 신씨의 딸로 1611년(광해군 3)에 태어났다. 1627년(인조 5)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으로 남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의 볼모로 가게 되었다. 청나라 심양에서 소현세자를 도와 서양 문물을 습득하고, 무역과 농장 경영을 하여 볼모자가 아닌 여성 경영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645년(인조 23)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하였지만, 두 달 후 소현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비운을 겪었다. 이후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 등이 강씨가 왕실을 저주하였다고 모함하면서 1646년(인조 24)에 왕세자빈의 신분에서 폐위되어 사사되었다. 사사 후 소현세자의 아들 3명이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첫째 아들 경선군과 둘째 아들 경완군은 유배지에서 죽었으며, 셋째 아들 경안군만 겨우 살아남게 되었다. 효종 대부터 무고함을 주장하여 신분을 회복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모두 무산되었다가, 1718년(숙종 44) 무혐의가 인정되어 왕세자빈의 신분을 회복하여 시호(諡號)를 민회빈(愍懷嬪)이라 하였다.
파주 소령원·수길원

소령원_문석인(궁능유적본부)

소령원_상석과 묘표석(궁능유적본부)

소령원_신도비(궁능유적본부)

소령원_원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소령원_원침(궁능유적본부)

소령원_전경(궁능유적본부)

소령원_정자각(궁능유적본부)
소령원(昭寧園, 영조 생모 숙빈) [비공개]
위치 : 경기 파주시 광탄면 소령원길 41-65
조성 연도 : 1718년(숙종 44), 1753년(영조 29)
원의 형식 : 단분
▷ 소령원(昭寧園) 이야기
소령원은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21대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원이다. 소령원은 1718년(숙종 44) 숙빈 최씨가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숙빈묘(淑嬪墓)로 조성되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른 후 1725년(영조 1) 묘소 입구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고, 1744년(영조 20)에 묘의 이름을 소령묘(昭寧墓)로 올렸다. 이후 1753년(영조 29) 왕을 낳은 후궁(사친)의 사당과 무덤을 궁과 원으로 높이는 제도인 궁원제(宮園制)가 만들어지면서, 묘를 원으로 높여 이름을 소령원이라 하고 원의 형식에 맞게 다시 조성하였다.
원침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봉분 주변으로 문석인, 석마, 장명등, 망주석, 상석, 석상(혼유석), 묘표석, 석양과 석호 각 1쌍을 배치하였다. 석마 옆에는 중배설석(中排設石)이 있고, 상석 옆에는 제주병석(祭酒甁石)이 있는데 이는 보물로 지정된 『숙빈최씨 소령원도(淑嬪崔氏 昭寧園圖)』에 있는 「묘소도형여산론(墓所圖形與山論)」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봉분 앞에 있는 묘표석 앞면에는 ‘유명조선국 후궁 숙빈수양최씨지묘’라 쓰여있다. 원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수복방, 홍살문이 있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시묘살이를 했던 터가 남아있다. 비각은 총 2개가 있는데 원침 근처에 있는 비각에는 1744년(영조 20) 소령묘로 올린 후 세운 표석(숙빈해주최씨소령묘)이 있고, 정자각 근처에 있는 비각에는 1753년(영조 29)에 소령원으로 올린 후 세운 표석(조선국 화경숙빈 소령원)이 있다.
▷ 숙빈 최씨(淑嬪 崔氏) 이야기
숙빈 최씨(재세 : 1670년 음력 11월 6일 ~ 1718년 음력 3월 9일)는 본관이 해주인 증 영의정 최효원과 남양 홍씨의 딸로 1670년(현종 11)에 태어났다. 1676년(숙종 2) 7세의 나이로 궁녀로 입궁하였고, 1693년(숙종 19) 숙종의 후궁이 되어 숙원(淑媛, 종4품)이 되었다. 숙의(淑儀, 종2품)의 신분에서 1694년(숙종 20)에 영조를 낳았으며, 귀인(貴人, 종1품)을 거쳐 1699년(숙종 25) 숙빈이 되었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난 후 희빈 장씨를 자진시킨 무고의 옥을 고변(희빈 장씨가 왕후를 무고한 일)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1718년(숙종 44) 창의궁 사저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1753년(영조 29) 궁원제의 예에 따라 시호(諡號)를 화경(和敬), 사당의 이름을 육상궁(毓祥宮)이라 하였다.
파주 소령원·수길원

수길원_원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수길원_원침(궁능유적본부)

수길원_전경(궁능유적본부)

수길원_정자각(궁능유적본부)

수길원_표석(궁능유적본부)
수길원(綏吉園, 추존 진종 생모 정빈) [비공개]
위치 : 경기 파주시 광탄면 소령원길 41-65
조성 연도 : 1721년(경종 1), 1778년(정조 2)
원의 형식 : 단분
▷ 수길원(綏吉園) 이야기
수길원은 조선 21대 영조의 후궁이자 황제로 추존된 진종의 생모 정빈 이씨의 원이다. 1721년(경종 1) 정빈 이씨가 소훈(昭訓, 내명부 세자궁 종5품 후궁)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숙빈 최씨의 묘(소령원) 앞쪽에 묘가 조성되었다.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아들 효장세자가 진종으로 추존된 후 1778년(정조 2)에 궁원제(宮園制, 왕을 낳은 후궁의 사당과 무덤을 궁과 원으로 정하는 제도)의 예에 따라 무덤의 이름을 수길원이라 하였다.
원침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봉분 주변으로 문석인, 석마, 장명등, 망주석, 상석, 석상(혼유석), 표석을 배치하였다. 봉분 앞에 있는 표석은 1725년(영조 1)에 세운 표석이 있었으나 마모가 되자 1909년(융희 3)에 다시 세운 표석으로, 앞면에는 ‘대한 온희정빈 수길원’이라 쓰여있다. 원침 아래에는 2022년에 복원한 정자각과 향로와 어로가 있고,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다.
▷ 정빈 이씨(靖嬪 李氏) 이야기
정빈 이씨(재세 : 1694년 ~ 1721년 음력 11월 16일)는 본관이 함성인 증 좌찬성 이준철과 김해 김씨의 딸로 1694년(숙종 20)에 태어났다. 1701년(숙종 27) 8세의 나이로 입궁하였고, 영조와의 사이에서 1남(진종) 2녀(화억·화순옹주)를 낳았다.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1721년(경종 1) 영조가 왕세제로 책봉되자 소훈(昭訓, 내명부 세자궁 종5품 후궁)이 되었으나, 그 해에 28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가 왕위에 오른 후 소원(昭媛, 정4품)에 추봉되었고, 1725년(영조 1) 아들 경의군(敬義君)이 왕세자(효장세자)로 책봉되자 정빈(靖嬪)으로 신분이 높아졌다. 정조 즉위 후 효장세자가 진종으로 추존되자 1778년(정조 2) 궁원제의 예에 따라 시호(諡號)를 온희(溫僖), 사당의 이름을 연호궁(延祜宮)이라 하였다.
남양주 휘경원

휘경원_문석인(궁능유적본부)

휘경원_원침 전경(궁능유적본부)

휘경원_원침(궁능유적본부)

휘경원_장명등(궁능유적본부)

휘경원_전경(궁능유적본부)
휘경원(徽慶園, 순조 생모 유비) [비공개]
위치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186번길 56
조성 연도 : 1823년(순조 23), 1855년(철종 6), 1863년(철종 14)
원의 형식 : 단분
▷ 휘경원(徽慶園) 이야기
휘경원은 조선 22대 정조의 후궁이자 23대 순조의 생모 유비 박씨의 원이다. 휘경원은 1822년(순조 22)에 유비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 양주 배봉산(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배봉산 부근, 옛 사도세자의 영우원 근처)에 조성되었다. 그러나 풍수상 불길하다고 하여 1855년(철종 6) 인빈 김씨의 순강원 근처로 옮겼다가, 1863년(철종 14)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휘경원 원침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호석(護石)만 둘러져 있고, 봉분 주변으로 문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석양과 석호 각 1쌍씩 배치하였다. 원침 석물은 땅에 묻혀있던 장조(사도세자)의 옛 영우원 석물을 다시 꺼내 다듬어서 사용하였다. 원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이 있고, 비각 안에는 1863년(철종 14)에 휘경원을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기존에 있던 표석을 갈아서 다시 쓴 표석으로, 앞면에는 ‘유명조선국 현목유빈 휘경원’이라고 쓰여있다. 유빈은 이후 대한제국 때 유비로 추봉되었으나 표석을 따로 고치거나 추가로 세우지 않았다.
▷ 유비 박씨(綏妃 朴氏) 이야기
유비 박씨(재세 : 1770년 음력 5월 8일 ~ 1822년 음력 12월 26일)는 본관이 반남인 증 영의정 박준원과 원주 원씨의 딸로 1770년(영조 46)에 태어났다. 1787년(정조 11) 유빈(綏嬪)으로 간택되어 가순궁(嘉順宮)의 칭호를 받았으며, 정조와의 사이에서 순조와 숙선옹주를 낳았다.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의 생모로서 예우를 받으며 살았다.
1822년(순조 22) 창덕궁 보경당에서 53세로 세상을 떠나 궁원제(宮園制, 왕을 낳은 후궁의 사당과 무덤을 궁과 원으로 정하는 제도)의 예에 따라 시호를 현목(顯穆), 사당의 이름을 경우궁(景祐宮), 무덤의 이름을 휘경원(徽慶園)이라 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1901년(광무 5) 황제(정조선황제)의 후궁이자 황제(순조숙황제)의 생모이므로 특별히 추봉해야 한다는 논의로 유비(綏妃)로 신분이 높아졌다.
* 綏의 음은 ‘수’ 또는 ‘유’이나, 1823년(순조 23)에 작성된 <유빈박씨 진향문>에 한글로 ‘유빈’이라 기록되어 있어 이를 토대로 ‘유’로 씀.
남양주 광해군묘

광해군묘_곡장(궁능유적본부)

광해군묘_문석인(궁능유적본부)

광해군묘_봉분(궁능유적본부)

광해군묘_상석(궁능유적본부)

광해군묘_전경(궁능유적본부)
광해군묘(光海君墓) [비공개]
위치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337-4 (송능리 산 59)
조성 연도 : 1623년(인조 1), 1641년(인조 19)
묘의 형식 : 쌍분
▷ 광해군묘(光海君墓) 이야기
광해군묘는 조선 15대 광해군과 문성군부인 류씨의 묘이다. 광해군묘는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분의 형식으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광해군, 오른쪽(동쪽)이 문성군부인의 묘이다. 1623년(인조 1) 문성군부인이 강화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묘가 먼저 조성되었고, 1641년(인조 16) 광해군이 제주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묘가 조성되었다.
묘는 왕자의 묘제로 조성되어 봉분 주변에 문석인, 장명등, 상석, 향로석, 석상(혼유석), 망주석, 묘표석을 배치하였다. 묘표석은 봉분 앞에 각각 세워져 있으며, 각각 ‘광해군지묘’와 ‘문성군부인류씨지묘’라고 쓰여있다. 묘소 아래에는 재실 터로 추정되는 주춧돌이 있다.
▷ 광해군(光海君) 이야기
광해군(재세 : 1575년 음력 4월 26일 ~ 1641년 음력 7월 1일, 재위 : 1608년 음력 2월 2일 ~ 1623년 음력 3월 13일)은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로 1575년(선조 8)에 태어났다. 왕자로서 광해군에 봉해진 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왕세자가 된 후에는 분조(分朝, 조정을 둘로 나눔)의 형식으로 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왜란의 승전에 기여하였다. 이후 선조의 적자(嫡子, 왕비의 아들)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왕세자의 지위가 불안정하였으나, 1608년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릉동 행궁(현 덕수궁) 서청에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국토 복구사업을 시작하여 창덕궁을 비롯한 종묘와 사직을 다시 지었다. 또 왜란으로 소실된 여러 서적을 다시 간행하였으며,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민생안정에 힘을 썼다. 광해군 재위기간 당시에는 명나라가 기울어지고 후금(청)이 일어나는 시기였는데, 이때 광해군은 두 사이의 중립 외교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위 계승의 불안감으로 친형 임해군을 죽였고, 계축옥사(癸丑獄事) 등 여러 역모사건으로 광해군의 반대 세력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유배 보낸 후 죽이기도 하였다. 심지어 치열한 당파싸움으로 어머니 인목왕후를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유폐시켜 서궁(西宮)이라 낮추어 불렀다. 이런 상황과 중립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 정권이 1623년 인조반정을 일으켜 왕위에서 폐위되었다. 이후 유배지를 강화도로 정하였다가 1637년(인조 15) 제주도로 옮겼고, 1641년(인조 19)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이야기
문성군부인 류씨(재세 : 1576년 음력 7월 21일 ~ 1623년 음력 10월 8일)는 본관이 문화인 문양부원군 류자신과 봉원부부인 정씨의 딸로 1576년(선조 9)에 태어났다. 선조의 왕자 광해군과 혼인하여 문성군부인에 봉해졌으며, 광해군과의 사이에서 3남(둘째 아들이 폐세자 이지)을 낳았다. 1592년(선조 25) 왕세자빈이 되었고, 1608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1622년(광해군 14)에 광해군의 외교정책의 잘못을 지적한 상소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문성군부인으로 신분이 낮아져 강화도로 유배되었으며, 같은 해 유배지에서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구리 명빈묘

명빈묘_문석인(궁능유적본부)

명빈묘_봉분(궁능유적본부)

명빈묘_상석(궁능유적본부)

명빈묘_전경(궁능유적본부)

명빈묘_표석(궁능유적본부)
명빈묘(明嬪墓) [비공개]
위치 : 경기 구리시 아천동 333-3 (아천동 산 14)
조성 연도 : 1479년(성종 10)
묘의 형식 : 단분
▷ 명빈묘(明嬪墓) 이야기
명빈묘는 조선 3대 태종의 후궁 명빈 김씨의 묘이다. 1479년(성종 10) 명빈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묘가 조성되었다. 묘에는 문석인과 상석, 향로석, 묘표석만 있다.
▷ 명빈 김씨(明嬪 金氏) 이야기
명빈 김씨(재세 : ? ~ 1479년)는 본관이 안동인 지돈녕부사 김구덕과 영산 신씨의 딸로 태어났다. 1411년(태종 11) 명빈(明嬪)이 되었는데, 태종 재위기간에 봉해진 유일한 빈이다. 그 외 자세한 행적은 남아 있지 않으며, 1479년(성종 10)에 세상을 떠났다.
남양주 성묘

성묘_곡장(궁능유적본부)

성묘_난간석(궁능유적본부)

성묘_문석인과 무석인(궁능유적본부)

성묘_봉분(궁능유적본부)

성묘_전경(궁능유적본부)
성묘(成墓, 광해군 생모 공빈) [비공개]
위치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312-8 (송능리 산 55)
조성 연도 : 1577년(선조 10), 1610년(광해군 2)
묘의 형식 : 단분
▷ 성묘(成墓) 이야기
성묘는 조선 14대 선조의 후궁이자 15대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의 묘이다. 1577년(선조 10) 공빈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풍양 조씨 시조 묘 뒤인 현재의 자리에 묘가 조성되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1610년(광해군 2) 공빈을 공성왕후로 추존하고 묘를 능으로 올려 이름을 성릉(成陵)이라 한 후 왕릉의 모습으로 다시 조성하였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성릉은 성묘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성묘는 성릉으로 추봉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봉분은 공빈김씨의 묘일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호석(護石)이 있고, 성릉으로 높여지면서 난간석을 추가로 둘렀다.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 무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2쌍을 배치하였다.
▷ 공빈 김씨(恭嬪 金氏) 이야기
공빈 김씨(재세 : 1553년 음력 10월 11일 ~ 1577년 음력 5월 27일)는 본관이 김해인 해령부원군 김희철과 안동 권씨의 딸로 1553년(명종 8)에 태어났다. 선조의 후궁이 되어 숙의(淑儀, 종2품)의 신분에서 1572년(선조 5) 선조의 첫째 아들 임해군을 낳았고, 2년 뒤에 광해군을 낳았다. 광해군을 낳은 후 공빈이 된 것으로 보이며, 1577년(선조 10) 25세로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후 생모를 왕후로 추존하려고 하였으나, 광해군은 선조의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의 양자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대신들은 공빈의 왕후 추존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1610년(광해군 2) 생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성릉(成陵)이라 올린 후, 1615년(광해군 7) 종묘에 신주를 모셨다. 이로 인해 광해군은 후궁 소생이 아닌 왕후의 소생이 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공성왕후의 모든 예를 없애고 다시 공빈으로 신분이 낮아졌다.
남양주 안빈묘

안빈묘_곡장(궁능유적본부)

안빈묘_동자석(궁능유적본부)

안빈묘_상석(궁능유적본부)

안빈묘_전경(궁능유적본부)

안빈묘_표석(궁능유적본부)
안빈묘(安嬪墓) [비공개]
위치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471-1 (송능리 산 66)
조성 연도 : 1693년(숙종 19)
묘의 형식 : 단분
▷ 안빈묘(安嬪墓) 이야기
안빈묘는 조선 17대 효종의 후궁 안빈 이씨의 묘이다. 1693년(숙종 19)에 안빈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묘의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 장명등, 상석, 향로석, 동자석(童子石), 석상(혼유석), 묘표석, 망주석을 배치하였다. 묘표석 앞면에는 ‘조선국 안빈경주이씨지묘’라고 쓰여있다.
▷ 안빈 이씨(安嬪 李氏) 이야기
안빈 이씨(재세 : 1622년 음력 9월 6일 ~ 1693년 음력 10월 23일)는 본관이 경주인 이응헌의 딸로 1622년(광해군 14)에 태어났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봉림대군(효종)이 청에 볼모로 가게 되자 심양까지 따라가 봉림대군을 모셨다고 한다.
효종과의 사이에서 1649년(인조 27)에 숙녕옹주를 낳았으며, 효종이 왕위에 오른 후 정식 후궁이 되어 숙원(淑媛, 종4품)이 되었다. 이후 현종 대에 숙용(淑容, 종3품), 숙의(淑儀, 종2품), 귀인(貴人, 종1품)을 거쳐 1686년(숙종 12)에 안빈에 책봉되었다. 1693년(숙종 19)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남양주 영빈묘

영빈묘_곡장(궁능유적본부)

영빈묘_문석인(궁능유적본부)

영빈묘_상석(궁능유적본부)

영빈묘_전경(궁능유적본부)

영빈묘_표석(궁능유적본부)
영빈묘(寧嬪墓) [비공개]
위치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175
조성 연도 : 1735년(영조 11)
묘의 형식 : 단분
▷ 영빈묘(寧嬪墓) 이야기
영빈묘는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의 묘이다. 1735년(영조 11) 영빈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묘의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호석(護石)만 둘렀으며,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 장명등, 상석, 석상(혼유석), 표석, 망주석을 배치하였다. 봉분 앞에 있는 표석 앞면에는 ‘유명조선국 영빈안동김씨지묘’라고 쓰여있다.
▷ 영빈 김씨(寧嬪 金氏) 이야기
영빈 김씨(재세 : 1669년 ~ 1735년 음력 1월 12일)는 본관이 안동인 김창국과 전주 이씨의 딸로 1669년(현종 10)에 태어났다. 1686년(숙종 12) 숙종의 후궁이 되어 숙의(淑儀, 종2품)가 되었으며, 이후 소의(昭儀, 정2품)와 귀인(貴人, 종1품)이 되었다. 그러나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원자 칭호 문제로 서인에서 남인으로 정권 교체)으로 폐위되었다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 인현왕후 복위 문제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 교체) 때 다시 신분을 회복하였다. 이후 1702년(숙종 28) 영빈(寧嬪)이 되었으며, 1735년(영조 11)에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북한소재 조선왕릉
제릉(齊陵, 태조비 신의황후)
위치 : 북한
조성 연도 : 1391년(고려 공양왕 3), 1392년(태조 1), 1408년(태종 8)
왕릉 형식 : 단릉
▷ 제릉(齊陵) 이야기
제릉은 조선 1대 태조의 첫 번째 왕비 신의황후 한씨의 능이다. 신의황후는 조선 건국 전인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세상을 떠나 해풍에 묘를 조성하였다. 1392년 조선 건국 후 절비로 추존되면서 능의 이름을 제릉이라 하였다. 이후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1408년(태종 8)에 크게 공사하여 왕릉의 모습을 갖추었다.
제릉의 능침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는데, 병풍석에는 조선 초기의 양식에 따라 십이지신상과 영저(금강저) 및 영탁(방울)을 새겼고, 인석은 용두(龍頭)로 조각되어 있다.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 무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각 2쌍을 배치하였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있는데, 비각 안에는 원래 있던 신도비(神道碑)가 훼손되어 1744년(영조 20)에 다시 세운 신도비와 1900년(광무 4)에 황후로 추존된 후 세운 표석이 있다. 표석 앞면에는 ‘대한 신의고황후 제릉(大韓 神懿高皇后 齊陵)’이라고 쓰여있다.
▷ 신의황후(神懿皇后) 이야기
신의황후 한씨(재세 : 1337년 ~ 1391년 음력 9월 23일)는 본관이 안변(청주)인 안천부원군 한경과 삼한국대부인 신씨의 딸로 1337년(고려 충숙왕 복위 6)에 영흥에서 태어났다. 1351년(고려 공민왕 즉위)에 이성계(태조)와 혼인하여 6남(진안대군 방우, 정종, 익안대군 방의, 회안대군 방간, 태종, 덕안대군 방연) 2녀(경신공주, 경선공주)를 낳았다. 그러나 조선 개국 전인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절비(節妃)로 추존되었고,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신의왕후(神懿王后)로 추존되었다. 태종 즉위 후에는 신의왕태후(神懿王太后)로 추존되었으나, 숙종 대에 ‘태후’라는 호칭이 조선의 예와 맞지 않는다고 하여 다시 신의왕후라고 고쳤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추존으로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로 추존되었다.
북한소재 조선왕릉
후릉(厚陵, 정종과 정안왕후)
위치 : 북한
조성 연도 : 1412년(태종 12), 1420년(세종 2)
왕릉 형식 : 쌍릉
▷ 후릉(厚陵) 이야기
후릉은 조선 2대 정종과 정안왕후 김씨의 능이다. 후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정종, 오른쪽(동쪽)이 정안왕후의 능이다. 1412년(태종 12) 정안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고, 1419년(세종 1) 정종이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에 정안왕후의 능 옆에 능을 조성하였다.
능침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과 영저(금강저) 및 영탁(방울) 등을 새겼다. 봉분 주변으로는 문석인, 무석인,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특히 문·무석인과 석마, 석양, 석호 등은 다른 왕릉에 비해 두 배 더 배치되었는데, 이는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玄·正陵) 제도를 계승한 것이다. 능침 아래에는 표석만 남아있고, 정자각은 소실되었다.
▷ 정종(定宗) 이야기
정종(재세 : 1357년 음력 7월 1일 ~ 1419년 음력 9월 26일, 재위 : 1398년 음력 9월 5일 ~ 1400년 음력 11월 13일)은 태조와 신의황후 한씨의 둘째 아들로 1357년(고려 공민왕 6년) 함흥 귀주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태조를 도와 왜구를 정벌한 공으로 군부판서, 상호군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졌고, 의흥친군위 절제사가 되었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으로 왕세자로 책봉된 후 태조의 양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수도를 한양(서울)에서 개경(개성)으로 다시 옮겼고, 집현전을 설치하여 경적(經籍)을 강론하게 하였다. 또 분경(奔競)을 금지하여 청탁을 방지하였고, 사병(私兵, 신하 개인이 갖고 있는 군인)을 혁파하여 의흥삼군부로 편입시켰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박포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수습한 정안공(태종)을 왕세자로 책봉한 후 바로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노상왕(老上王)이 되었으며, 1421년(세종 1) 인덕궁 정침에서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원래 왕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묘호(廟號, 종묘에 붙여지는 이름)를 올리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이때 묘호를 올리지 않았고 명나라에서 내린 공정왕(恭靖王)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1681년(숙종 7)에 묘호를 정종이라 올렸다.
▷ 정안왕후(定安王后) 이야기
정안왕후 김씨(재세 : 1355년 1월 9일 ~ 1412년 음력 6월 25일)은 본관이 경주인 월성부원군 김천서와 삼한국대부인 이씨의 딸로 1355년(고려 공민왕 4년)에 태어났다. 1398년(태조 7) 영안군(정종)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왕세자빈(덕빈)이 되었고,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덕비(德妃))로 책봉되었다. 정종과의 사이에서 소생을 낳지 못하였으며, 1400년 정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순덕왕대비(順德王大妃)가 되었다. 이후 1412년(태종 12) 인덕궁에서 58세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