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식[능묘/사]
고인돌 왕국 (고인돌)
권력자의 무덤 고인돌
강화 부근리 지석묘(사적)

강화 부근리 지석묘
부안 구암리 지석묘군(사적)

부안 구암리 지석묘군
선사시대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커다란 돌을 재료로 여러 가지 기념물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큰 돌을 사용해서 만드는 여러 가지 기념물과 유적들을 거석문화(巨石文化)라고 하는데요,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인돌입니다. 고인돌은 크고 넓적한 바위를 큰 돌 몇 개로 괴어 놓은 선사시대 무덤입니다. 이러한 고인돌은 언제,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언제, 누가 만들었을까요?
고인돌 안을 살펴보면 '껴묻거리'라는 죽은 사람을 무덤에 묻을 때 같이 묻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껴묻거리를 조사하면 고인돌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겠지요.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은 대부분이 청동기 시대, 초기 철기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고인돌이 세워진 청동기시대부터 사회는 개인이 소유한 재산의 크기에 따라 계급이 나뉘기 시작했습니다. 고인돌은 바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이었습니다.
언제, 누가 만들었을까요?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커다란 돌이 필요합니다. 옛날에는 포클레인과 같은 기계들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그 큰 돌을 구하고, 운반해서 무덤을 만들었을까요? 고인돌의 덮개돌은 자연 암서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큰 바위에서 일부를 떼어 내어 사용합니다. 실지로 그러한 채석장이 서북지방에서 여러 군데 발견되고 있습니다. 돌을 떼어 내는 방법으로는 바위틈에 나무쐐기를 박아서 무로 나무를 불리어 떼어 내는 방법이 주로 쓰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구한 돌은 지렛대와 밧줄을 이용하거나, 수로를 이용해서 옮겼겠지요. 받침돌을 세운 다음 그 높이만큼 흙을 비스듬히 쌓아서 덮개돌을 옮긴 후 그 쌓은 흙을 없애면 고인돌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고인돌은 모두가 평등했던 고대사회가 자신이 소유한 재산의 크기에 따라 계급이 나뉘는 사회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소중한 유물입니다. 또한 그 속에서 바견되는 껴묻거리를 통해 우리는당시 사회상을 상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고인돌이 제대로 보호받고 있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어린이 여러분, 우리 함께 고인돌이 더 이상 방치되어 그 가치를 잃게 되지 않도록 함께 보호하고, 잘 지켜 나갑시다.
무덤의 주인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무령왕릉(비), 공주 송산리 고분군)

공주 송산리 고분군
공주, 부여, 경주 등 옛 역사의 도시에 가면 지금도 그 시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관심 있게 보는 것이 옛 왕들의 무덤이지요. 우선 크고 화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곳의 무덤들은 대개는 그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답니다. 1,000년이 넘게 세월이 흘렀고, 그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기록이나 물건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경주지역에 있는 신라의 무덤들은 어린 아이 머리 크기만 한 돌들로 관을 보호하고 흙으로 덮어 마감한 그 모양 때문에 무덤을 온통 파헤치기 전에는 그 안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알 길이 없을 뿐 아니라, 지금 현재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개방된 왕릉이 천마총 이외에는 거의 없습니다.
전설이나《삼국사기》기록으로 추정해 보면 신라시대 옛 왕들의 무덤은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지만 주인이 누구인지는 의문입니다. 이에 비해서 백제의 옛 서울이었던 공주·부여 지역에는 왕들의 무덤이 여럿 남아 있고, 대부분 그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무덤들이 대개 출입구가 있는 굴 모양의 것들이라서 그 입구만 발견하면 무덤 안으로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무덤의 안을 쉽게 볼 수는 있지만, 무덤 안의 주인공이나 그와 함께 묻힌 그 시대의 소중한 물건들은 모두 누군가가 훔쳐가고 지금은 빈 무덤만 남아 있는 실정입니다. 신라에 의해 멸망한 역사에다가, 우리 문화재를 송두리째 빼앗아간 일제의 약탈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예외가 하나 있습니다. 빈껍데기뿐인 다른 무덤과는 달리 그 안의 옛 물건들이 고스란히 발견되고, 더구나 그 주인이 누군지를 밝혀주는 증거가 명백히 남아 있는 유일한 백제왕의 무덤이 지난 1971년에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것이 곧 무령왕릉이지요. 무령왕은 백제의 25대 임금으로서 501~523년의 기간 왕위에 있었던 임금님입니다. 백제는 이때에 고구려의 침략으로 처음 서울이었던 한강지역을 빼앗기고 금강지역의 공주로 서울을 옮긴 어려운 지경에 있었습니다.
무령왕은 이 어려움을 이겨내며 백제를 다시 일으키는 노력을 열심히 하였던 위대한 임금이었지요. 이 무덤은 2,900점이 넘는 백제시대의 유물이 발견되고 무려 12종류의 유물이 국보로 지정된 1,500년이나 된 오랜 무덤이랍니다.
그런데 그 유물 중 국보로 지정된 ‘지석’이라는 유물은 이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임을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해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넓죽한 돌판 앞뒤에는 왕의 죽음과 그 장례에 관한 간단한 한자 기록과 무덤을 만들기 위해 땅의 신으로부터 이 땅을 사들인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삼국시대 무덤 중에서 그 주인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무덤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 무덤의 가치는 더욱 빛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곳에서 우리는 백제의 찬란했던 발전과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왕릉이 있는 지역을 송산리 고분군이라고 부르는데, 주변에는 무령왕릉 이외에도 주인을 잘 알 수는 없지만 백제왕의 무덤이 분명한 여러 개의 옛 무덤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지석이란?
공주 송산리 고분군 무녕왕릉 내부

공주 송산리 고분군 무녕왕릉 내부
지석(誌石)은 국보로 왕과 왕비의 2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왕, 왕비의 간단한 신상기록과 사망 및 장례 연대가 기록되어 있고, 뒷면은 매지권(買地卷)으로 이 땅을 지신으로부터 구입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상징적으로 토지매입에 사용된 오수전이라는 동전도 발견되었으며 이 지석의 발견으로 《삼국사기》의 연대 기록에 대한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삼국통일 영웅들의 능, 묘 (경주 무열왕릉, 문무대왕릉, 김유신묘)

경주 무열왕릉
신라의 서울이었던 경주에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약 1,000년간의 역사의 흔적들이 아주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중에서 왕과 귀족들의 무덤은 그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아주 잘 보존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답니다. 그 여러 무덤들 중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세 분의 무덤이 지금도 남아 있어 신라의 찬란했던 역사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태종무열왕의 능은 경주 교외(도시의 변두리)의 선도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큰 밥그릇을 엎어 놓은 것 같은 원형봉토분입니다.
다른 신라의 왕릉들이 그 주인을 확실히 알 만한 증거가 별로 없는 데 비하여, 경주 무열왕릉 무덤 앞에 경주 무열왕릉비라는 비석의 일부가 남아 있어 어렵지 않게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능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성골 바로 아래 단계의 왕족인 진골 출신으로서, 앞선 진덕여왕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왕이 되기 전에 이미 고구려와 당, 일본 등지를 오가며 국력이 커지고 있던 신라가 삼국간의 경쟁에서 승리자가 될 수 있도록 기초를 닦았습니다. 특히 당의 세력을 끌어들여 신라를 지원하도록 한 것이 김춘추의 공이었지요. 그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김유신의 누이와 결혼함으로써 신라의 왕이 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7년만인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주도권을 신라가 쥐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태종무열왕과 함께 삼국통일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김유신입니다. 그는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받들어 신라의 삼국통일이 완성되는 데 큰 공을 세웠지요. 아울러 백제 멸망 후에 봉기한 백제의 부흥군을 물리치고, 고구려 멸망 후 우리 땅을 노리던 당의 세력을 몰아내면서 한강 이북 고구려 땅의 일부나마 회복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김유신의 무덤은 송화산 동쪽 기슭 아늑한 소나무숲 사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지름 30m나 되는 둥근 무덤을 잘 조각된 쥐·소·호랑이·토끼 등의 12지신 상으로 보호석을 만들어 두르고 있으며, 돌난간까지 만들어 무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 12지신 상은 얼굴은 동물이고 몸은 사람이며 모두 무기를 들고 있으며, 그 조각이 어느 왕릉의 장식에 뒤지지 않는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덤의 크기나 조각 등에서 볼 때, 김유신의 당시 정치적 지위나 그가 신라 발전에 세운 공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의 능에 대하여는 아주 독특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 때문에 사람들은 지금도 바다에 솟아있는 바위 덩이 하나에 왕의 무덤이 만들어 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토함산 뒤쪽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대종천을 이루고 그 물줄기가 동해로 흘러드는 감포 앞 바다 봉길리 해수욕장이 들어선 해안에서 서면 바다 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바다 경치를 돋우는 아담한 바위섬이 눈에 들어옵니다. 문무왕의 화장된 유골을 뿌렸거나 혹은 수중릉으로 알려진 대왕암입니다. 멀리서 보는 대왕암은 평범한 바위섬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바위 한 가운데가 못처럼 패어 있고 둘레에 자연암석이 기둥 모양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워진 모습입니다. 못 안의 물은 돌을 약간 덮을 정도이며, 거센 파도에 아랑곳없이 항상 맑고 잔잔히 흐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트인 십자형의 수로를 통하여 동쪽으로 들어온 물이 서쪽으로 난 수로의 턱을 천천히 넘어 다시 바다로 흘러나갑니다. 못 안의 돌 밑에 문무왕의 유골 장치가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증명된 사실이 아닙니다. 문무왕릉을 만드는 것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삼국사기》의 기록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때까지 우리 강토는 삼국으로 나누어져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제 삼국이 하나로 통합돼 한 나라가 되었으니 민생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 그러나 동해로 침입하여 재물을 노략질하는 왜구가 걱정이다. 내가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 터이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 지내라……” 이러한 기록 때문에 사람들은 대왕암을 문무왕의 물속 무덤으로 오해하고 있나봅니다. 이 대왕암이 문무왕의 무덤이든 장례가 치러진 곳이든 문무왕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직은 전설로 전하는 사실일 뿐, 과학적인 조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현재 역사연구자들은 대개 이곳 대왕암이 문무왕의 화장한 유골을 바다에 뿌린 장례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위대한 왕들의 흔적 (영릉, 선릉)
조선왕조 왕들의 무덤은 대부분 서울과 경기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그리 오래지 않은 세월로 인하여 그 무덤의 주인이 모두 알려져 있고, 무덤 또한 별 훼손 없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영릉(英陵)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사적)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영릉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입니다. 세종은 조선 4대 왕으로 1418년 왕위에 올라 1450년 재위 32년 만에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종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으로, 한글을 창제하고 측우기·혼천의·해시계 등 과학기구를 발명 제작하였지요. 또 북방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4군과 6진을 개척하여 우리나라의 국경선을 압록강·두만강으로 확장하였으며, 일본 쓰시마를 정벌하는 등 국방을 튼튼히 하였습니다.
세종은 학문을 숭상하여 학자를 기르고 활자를 개량하여 《월인천강지곡》, 《용비어천가》, 《농사직설》, 《고려사》, 《삼강행실도》, 《팔도지리지》 등 수많은 책을 발간하였습니다.
또한 농업을 장려하고 백성의 어려움을 잘 돌보아 조선왕조 전성기를 맞이하도록 하였답니다.
원래 영릉은 서울 헌릉(3대 태종의 능) 서쪽에 있었던 것을 1469년(예종 1)에 여주로 옮겨왔습니다.
세종의 업적을 기리고자 1977년 ‘세종전’을 새로 짓고 주변을 정화하였습니다. 영릉의 구조는 봉분에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두른 단일릉으로 상석이 두 개 놓여 합장릉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정자각 왼쪽에는 수라간이 있어 제사 때에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곳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아울러 바로 인접한 곳에 17대 효종과 인선왕후를 모신 영릉(寧陵)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선릉(宣陵)
선릉은 세조의 손자이고 덕종의 차남(둘째 아들)인 성종(1457~1494, 재위 25년)과 정현왕후의 능으로서, 한 묘역에 두 개의 봉분 형식으로 조성되었는데, 성종의 능에는 검약해야 한다는 세조의 명과 다르게 봉분에 병풍석을 둘러 12지신 상을 조각한 것이 특이합니다. 후에 중종의 정릉(靖陵)이 선릉의 경내(안으로)로 옮겨져 선정릉(宣靖陵)의 명칭으로 불리는데, 중종의 정릉이 조성될 때 성종의 선릉이 그 모범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종 때의 공적으로 인해 조선조의 기틀이 완성된 것은 여러 가지 업적에서 나타납니다. 홍문관·존경각·독서당을 창설해 어진 인재들을 등용했고, 세조 때부터 시작된 《경국대전》을 개정, 완성 반포하여 국가의 통치체제를 확립시켰습니다. 또한 역사서인 《동국통감》과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 문학서인 《동문선》 등의 편찬에서 보이듯이 왕성한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고, 외적으로도 북방의 여진족 소탕이나 남방의 일본과의 무역 확대 등으로 조선조의 힘이 크게 진작된 전성기를 이룹니다.
조선 역대 왕릉
| 왕명 | 능이름 | |
| 1대 | 태조 | 건원릉 |
| 2대 | 정종 | 후릉 |
| 3대 | 태종 | 헌릉 |
| 4대 | 세종 | 영릉 |
| 5대 | 문종 | 현릉 |
| 6대 | 단종 | 장릉 |
| 추존 | 덕종 | 경릉 |
| 7대 | 세조 | 광릉 |
| 8대 | 예종 | 창릉 |
| 9대 | 성종 | 선릉 |
| 10대 | 연산군 | 연산군묘 |
| 11대 | 중종 | 정릉,태릉 |
| 12대 | 인종 | 효릉 |
| 13대 | 명종 | 강릉 |
| 14대 | 선조 | 목릉 |
| 15대 | 광해군 | 광해군묘 |
| 추존 | 원종 | 장릉 |
| 16대 | 인조 | 장릉,휘릉 |
| 17대 | 효종 | 영릉 |
| 18대 | 현종 | 숭릉 |
| 19대 | 숙종 | 명릉,익릉 |
| 20대 | 경종 | 의릉,혜릉 |
| 21대 | 영조 | 원릉,홍릉 |
| 추존 | 진종 | 영릉 |
| 추존 | 장조 | 융릉 |
| 22대 | 정조 | 건릉 |
| 23대 | 순조 | 인릉 |
| 추존 | 익종 | 수릉 |
| 24대 | 헌종 | 경릉 |
| 25대 | 철종 | 예릉 |
| 26대 | 고종 | 홍릉 |
| 27대 | 순종 | 유릉 |
영웅은 따로 없다. (칠백의총, 만인의총)
우리 역사에는 영웅도 많고 위인도 많습니다. 우리는 역사적 사건의 고비마다 그 사건을 주도한 위대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러한 분들은 대개 여러분들이 즐겨 읽는 위인전기전집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죠. 우리는 그 분들의 전기를 읽고 많은 감동과 교훈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도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역사를 빛내야지’ 라고 생각하곤 했지요. 그러나 이런 생각이 과연 올바른 생각일까요? 역사는 과연 위인이나 영웅들에 의해서만 발전한 걸까요? 그러면 역사에 큰 이름을 남기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생을 산 것일까요? 다음에 소개하는 역사유적을 보면서 다시금 생각해봅시다.
칠백의총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가면 칠백의총(사적)이라는 무덤이 있습니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병장 조헌 등 700의사의 유골을 모신 묘소입니다. 관군이 일본군의 침략에 계속 패전하면서 우리나라가 적군의 무력에 무기력하게 무너지자 전국 각지에서 많은 뜻 있는 분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에게 저항하게 되었습니다. 조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 1,700여 명을 모아 영규 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습니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으로 향했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대부분 해산되고, 700명의 의병으로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습니다. 그러자 조헌의 제자인 박정량과 김승절이 이곳에 유골을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칠백의총’ 이라 하였던 것입니다.
만인의총
남원_만인의총(사적)

남원_만인의총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에 있는 만인의총은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을 지키다 순절한 지사들의 무덤입니다. 1596년(선조 29)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군사 5만 6000명을 이끌고 삼남의 요충인 남원성을 공격해왔을 때, 접반사 정기원, 병사 이복남을 비롯한 8충신과 5,000병사, 그리고 5,000의 무명 의사들이 최후까지 싸우다 순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같은 의병들의 항쟁은 전국에 걸쳐 아주 다양하게 전개되었으며, 이들 의병의 희생이 결국 일본군을 성공적으로 무찌를 수 있는 우리 민족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병장뿐 아니라 이름 없는 의병들의 하나하나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임진왜란의 가장 위대한 영웅은 말할 나위 없이 이순신 장군이십니다. 이순신 장군의 지략과 충성심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큰 힘이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임진왜란의 승리는 이순신 장군 혼자만의 힘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칠백의총과 만인의총에 이름 없이 누워 계신 의병들, 그리고 나라를 위한 애국심만으로 목숨 바쳐 싸우신 수많은 이름 없는 백성들의 희생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위대한 힘일 것입니다. 영웅은 특별히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삼국시대의 불교유적을 찾아서 (황룡사지, 익산미륵사지)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해진 불교는 우리 민족문화를 한층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며, 당시 나라의 질서를 완성해 나가던 국왕에게 큰 힘을 더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여러 집단의 다양하던 사상을 불교로 통일함으로써 국왕은 한결 쉽게 자신의 권력 아래 나라를 통일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가운데 불교는 국왕의 보호를 받으며 크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당시 발전했던 불교의 모습을 아직도 남아 있는 웅장한 절터를 통하여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황룡사터
경주 황룡사지(사적)

경주 황룡사지
황룡사 복원모형도

황룡사 복원모형도
경주에 남아있는 황룡사 터는 동서 288m, 남북 281m의 대규모로서 당초 늪지를 매립하여 절터를 닦았다고 합니다. 이 절은 신라 553년(진흥왕 14)부터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진흥왕은 본래 반월성 근처에 궁궐을 지으려 하였는데, 그 자리에 황룡이 나타나자 이를 기이하게 여겨 절을 세우도록 하였답니다.
이런 사연을 가진 황룡사는 645년(선덕여왕 14) 9층목탑을 마지막으로 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이는 4대 왕 93년간의 긴 세월과 정성이 들어간 대규모 건축물이었습니다. 이 절에는 진흥왕 때 솔거가 그렸다는 벽화가 유명합니다.
이 벽화의 소나무를 새들이 실제 나무로 알고 날아와 부딪쳤다는 유명한 일화가 남아 있지요.
그리고 이 황룡사의 중요한 건축물로는 바로 9층목탑을 들 수 있습니다. 백제의 유명한 장인인 아비지가 지휘하여 완성한 이 탑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돌로 만든 석탑이 아니라 나무로 만든 목탑입니다. 마치 9층짜리 거대한 한식 건물을 보고 있는 듯하지만 1238년에 몽고의 침략으로 불타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신라의 역대 왕들은 이곳의 불사에 친히 참석하였고, 외국의 사신들도 들러 불상에 예배하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삼국과 통일신라시대에 있어 황룡사는 신라의 가장 중요시되는 사찰로서 국왕과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가며 크게 번성하였던 절이었습니다.
미륵사터
익산 미륵사지(사적)

익산 미륵사지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복원 동탑(사적)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복원 동탑
미륵사터는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위치하고 있는 백제의 큰 절이 있었던 곳으로, 이 절은 백제 무왕(600~641)이 고구려와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왕이 왕비와 함께 이 지역을 돌아보다가 이곳 용화산 아래 연못에 이르렀을 때, 미륵부처님이 나타나자 왕비의 부탁으로 이 연못을 메우고 절을 세웠는데 바로 그 절이 ‘미륵사’입니다.
익산 미륵사지는 3개의 금당(대웅전)과 3개의 탑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 서탑만이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통 미륵사지석탑이라고 부르는 이 탑은 지금은 전체 9층 중 6개 층만이 남아 있고 그나마도 일부가 파손된 채로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3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모진 비바람과 전란을 겪은 역사의 흔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최근 들어 이 서탑을 본 떠 원래의 모습을 되살린 동탑을 새롭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최근에 끝난 발굴조사의 결과 이 절이 5만 평에 이르는 대규모였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절의 크기나 발견된 유물들이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에 걸쳐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미륵사지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가면서 오랜 동안 중요시되었던 절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