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식[전통민속문화이야기]
- 제사의례 -
산신, 하늘신, 물신에게 - 부산리 동제 (국립민속박물관)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깃고사는 농기를 모시는 제사다.
사람들 손에 잡히지 않으려고 돼지는 이리저리 도망을 쳐보지만 마을 사람들 손에 여지없이 잡히고 만다. 부산리의 마을 제사에 제물로 쓰일 돼지는 교미 경험이 없는 수퇘지여야 한다.
충청도의 첩첩산중에 자리 잡고 있는 부산리 마을, 이곳에서는 밭농사 수확 시기인 음력 7월에 마을 제사를 지낸다. 수확의 기쁨을 신에게 돌리고 주민들이 함께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해 마을 제사를 올린다.
제관은 제사를 앞두고 한지를 끼워 넣은 금줄을 자신의 집에 치기 시작한다. 부정한 기운이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마을 제사를 앞두고 제관의 아내는 제사에 쓰일 술을 빚어야 한다. 신령주라고 불리는 이 술은 쌀로 밥을 짓고 누룩을 섞어 만든다.
신령주가 다 빚어지면 제관은 술동이를 지게에 싣고 서둘러 입산한다.
산제당 아래에 있는 당산나무 밑둥에 신령주를 먼저 묻는다. 산제당 제사를 지내고 난 후 당산제를 지낼 때 올리려고 미리 묻어두는 것이다.
제사 전날 제관은 경건한 마음으로 산제당 청소를 한다.
제사에 쓰일 젓가락은 특이하게도 억새풀로 만든 것을 쓰는데, 잘 자란 억새를 골라 신에게 드릴 젓가락을 미리 만들어 둔다.
산제를 올리는 날, 산제당에 이른 제관과 축관은 제당 시렁 위에 한지를 깔고 촛불과 향을 피운다.
안에서 제의 준비를 하는 동안 밖에서는 제사에 올릴 젯밥인 메를 익히느라 화톳불을 피우고 있다.
메가 다 익으면 산제 샘에서 길러 온 맑은 청수 한 그릇을 메와 함께 올려 진설한다. 밥과 물 한 그릇이 제수의 전부다.
밥과 물과 억새 젓가락, 제사상치고는 너무 소박하지만 어쩐지 자연인 산신에게 어울리는 진설인 것 같기도 하다.
다섯 번의 절을 올리고 난 뒤 의례의 마지막 순서로 소지를 올린다.
제사에 올린 청수를 마시면 무병장수한다고 해서 반드시 마신다.
산제당에서의 제사를 마치면 곧바로 제당 아래 당산으로 내려와 당산제를 지낸다.
당산나무 아래 미리 묻어 둔 술을 당산제 제주로 쓴다.
수 백 년 된 느릅나무와 돌배나무가 마을 당산목이었으나 수 십 년 전 두 나무가 차례로 고사해버려서 지금은 4년 전에 심어진 작은 나무를 당산 나무로 모시고 있다. 작은 당산 목이지만 마을 사람들에겐 그래도 영험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당산제에서는 돼지 머리와 통북어 대추, 밤 등과 함께 신령주가 올려진다.
당산제에서는 모두 세 번의 절을 하는데, 산신과 물신과 하늘신에 올리는 절이라고 한다.
당산제에 올린 신령주를 마시면 그 해 운수가 대통하고 무병하다고 해서 마을의 상노인이 아니면 좀처럼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저녁 무렵 제관의 집 마당에서는 떡시루에 김이 한창 오르고 있다. 마을 앞 서낭당에 올릴 백설기를 찌고 있는 중이다.
마을 앞 서낭당 나무에 올리는 동고사는 온갖 잡신과 돌림병을 막기 위한 제의다. 백설기를 시루채 올려놓고 시루 속에 청수 한 그릇을 떠 놓는다. 서낭당에 진설된 떡을 먹으면 머리가 좋아지고 공부를 잘한다고 하여 과거에는 동고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달려들어 떡을 떼어 가져갔다고 한다.
산제, 당산제를 거친 부산리 동제는 마을 어귀 서낭당 동고사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마을 제사를 모두 마치고 제관의 집에 모인 주민들은 흥겨운 뒷풀이로 농사의 고단함을 풀고 이웃간의 정을 나눈다.
부산리의 동제는 겨우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형편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 삶 속에 이어져 오고 있는 작은 산골 축제를 아름답게 계승해 나갈 방법은 없는 지 생각해 볼 때다.
입동 - 안계리 메주쑤기 (국립민속박물관)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절기 입동.
아낙네들은 긴 겨울 준비를 시작한다.
입동에 해야할 일 중 가장 큰 일은 장맛의 기본이 되는 메주를 쑤는 일이다.
메주콩 증에서도 가을 햇빛에 영글은 햇콩을 준비하는데, 판자를 살짝 기울여 흔들면 알이 굵고 잘 여문 콩들이 먼저 내려온다.
한알 한알, 정성을 들여 고른 콩들을 깨끗한 물에 씻어낸다.
겨울 중에서도 가장 맑은 날을 택해 메주 쑤는 날이 잡히면 동네 아낙들이 모두 모여 함께한다.
메주쑤기에서 중요한 것은 콩을 삶는 일이다.
오랜 시간 불에 달련된 낡은 무쇠 가마솥이 메주콩 특유의 깊고 고소한 맛을 살려준다.
짚으로 닦아낸 가마솥에 물기를 뺀 콩을 넣는다.
이제 콩이 완전히 무르도록 푹 삶아내야하는데, 물의 양 아야말로 메주 맛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너무 센 불은 콩이 솥바닥에 눌어붙기 때문에 약한 불로 서서히 삶는데 메주쑤는 사람은 삶는 내내 불 앞을 지키며 정성을 들인다.
콩을 삶을때, 한번 불에 올린 솥은 끓어 넘치더라도 뚜껑을 열어서는 안된다.
비린내가 깨끗이 빠진 메주콩만의 깊은 맛을 내기 위해서다.
인터뷰: 몇시간 정도 삶나요? 7시간정도…
이렇게 불 앞에서 예닐곱 시간을 기다려야 잘 삶아진 콩이 나온다.
삶은 콩을 다시 절구에 넣고 찧어야하는데 아직 뜨거울 때 빠르게 찧어야한다.
이미 잘 익은 콩은 몇 번의 절구질에도 쉽게 뭉그러지지만 콩알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곱게 찧는다.
메주쑤기의 모든 과정마다 정성과 수고가 담겨져 있다.
아낙네들의 손길은 콩을 삶고 찧는 사이에도 멈출 틈이 없다. 메주를 달아 맬 볏짚을 준비해야하는 것이다. 메주는 반드시 볏짚으로 묶어줘하는데 볏짚에 살고 있는 균이 메주로 옮겨가 메주 특유의 맛과 향을 내주기 때문이다.
메주틀에 배보자기를 깔고 곱게 찧은 콩반죽을 넣으면 비로서 벽돌 모양으로 반듯한 메주의 모양을 갖추게 된다.
긴 겨울 동안 쉽게 부서지지 않도록 발로 꾹꾹 눌러가며 모양을 잡아 주는데 이 때 적당한 크기로 만들어야 한다.
너무 크거나 두꺼우면 메주가 마르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쓸데 없는 곰팡이가 생기기 쉽기 때문이다.
가운데가 평평하고 얇아야 균이 잘 번식돼서 골고루 맛이드는 잘 쑨 메주가 된다.
꾸덕꾸덕하게 마른 메주를 엮어매는 것도 메주쑤기에서 중요한 순간이다.
볏짚은 십자 모양으로 튼튼하게 매줘야 한다.
완성된 메주들을 매어단다.
집안에서도 바람과 햇빛이 가장 잘 드는 처마 밑이 메주 말리기에 최적의 장소다.
겨우내 찬 바람과 적당한 햇살이 맛있는 메주를 만들기 때문이다.
만드는 사람의 손끝과 기다림이 만들어내는 맛, 메주. 전통으로 이어져온 정성과 시간이 맛으로 깊어간다.
자연과의 아름다운 조화 - 산천제 (국립민속박물관)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강원도 홍천 두미리 이장님과 마을 주민이 춘천의 한 시장에서 두미리 산천제에 올릴 제물을 고르고 있다. 산천제는 산신에게 올리는 마을 제사이므로 마을 공동 기금으로 비용을 마련했다. 20여년 전만해도 마을 동답을 경작해서 나온 소득으로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장을 본 후에 두미리 인근 마을 돈사에 들러 돼지를 구입한다. 제사를 지낼 산지당이 위치한 두릉산은 암산, 즉 여자산이기 때문에 제물로 쓰는 돼지는 반드시 수놈이어야 한다.
제사를 올릴 지관은 집 앞에 금침을 두르고 부정한 것을 멀리한다.
(인터뷰) 어딜 가지 못해, 누가 지나가나 보고 화장실을 가, 술은 먹어, 부부간 잠자리도 같이 안 해… 담배 절대 피우면 안 돼, 피우는 거 숨기면 떡이 안 익어…. 몇 백년 내려온 전통인데…
두미리는 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강원도 산골 마을이다. 주변의 고만고만한 두매 산골 마을이 합쳐져 현재 두미리로 불리고 있다.
목욕 재개한 지관이 집을 나서 당집으로 올라갈 채비를 한다. 집을 나서는 시간이나 입을 옷차림도 산신님의 영을 받들어 한다고 한다. 산천제를 앞두고는 무엇하나 인간의 마음대로 하지 않는다. 험한 산 속에서 혹한의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고 또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없었을 것이다.
당집 앞에 있는 무당 바위에 초를 밝힌다. 당집을 지키고 있는 이 영험한 바위에 먼저 산신제를 올릴 것을 고한다.
당집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떡시루를 올린다.
떡이 설익거나 잘 쪄지지 않으면 그 해엔 흉한 일이 많다고 여겨 지관들은 세수를 하며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한다.
제수를 진설하는데 밤이나 과일 등은 깍지 않고 그대로 올리는 것이 특이하다.
다 쪄진 떡이 오르면 제사상은 거의 다 차려진 셈이다. 올해엔 떡이 알맞게 잘 쪄진 것 같다. 부정을 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기시되는 담배만 피워도 떡은 잘 익지 않는다. 이러한 일들을 단순히 미신이라고 여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산천제를 통해서 마을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무엇을 삼가하고 말아야 하는지 터득했기 때문이다.
제사 말미에 제관은 소지라는 의식을 행한다. 소지란 마을 사람들의 소원과 안녕을 적은 한지를 태우며 기원하는 의식으로
(소지 올리는 소리)
동네 전체의 무사태평을 바라는 소지를 시작으로 개개인의 소원을 담은 소지를 차례로 올린다.
산지당에서의 제의가 끝나면 산천제에서 사용했던 제수를 산제당으로 내어 와서 한번 더 진설한다.
돼지의 두 귀와 코를 잘라서 산에 뿌리고 칼을 돼지 입에 꽂아 넣는 것으로 의식을 마친다.
제사를 마치고 하산한 뒤 제관의 집에서 잠시 휴식하고 붓구지 산천제를 올리기 위해 다시 집을 나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각각의 마을에서 따로 산천제를 올렸지만 해가 갈수록 인구가 줄어 들어 근간에는 두미리와 붓구지 주민들이 함께 제를 올리는 일이 많아졌다.
이른 새벽, 붓구지 제사까지 마치고 돌아온 지관은 대문 앞에 쳐진 금침부터 걷어낸다. 이제 모든 의식이 끝났다는 의미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따뜻한 국과 음복으로 시린 속을 데운다.
산천제를 마친 이튿날, 마을 주민들은 노인들을 대접하기 위해 잡아 놓은 돼지를 삶는다. 주민들은 돼지고기를 돌리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마을 일을 논한다. 마을 제사가 곧 마을 축제가 된 것이다.
두미리 뿐만 아니라 전국에는 아직도 산천제, 산신제라는 이름으로 산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의식이 많이 남아 있다. 자연 친화적인 우리 민족의 삶의 자세를 대대로 이어져 온 산천제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월대보름 - 장현리 볏가릿대 (국립민속박물관)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우리 농촌에서는 볏가릿대를 세우는 풍습이 전해져오는데, 지금도 충청남도 당진과 서산지역에서는 이 풍습이 행해지고 있다.
음력 정월 대보름 이른 아침부터 볏가릿대 세우기가 한창이다.
짚으로 한편에선 오곡주머니를 만드느라 분주하다. 오곡주머니는 쌀, 보리, 수수, 콩, 조 등의 오곡을 넣어 만든다.
풍년을 기원하며 만든 오곡주머니를 장대 끝에 매달아놓는데, 볏가릿대를 내리는 이월 초하루, 오곡주머니를 풀어 곡물이 늘어난 여부를 놓고 한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
마을사람들이 한 해 풍년을 기원하며 볏가릿대를 세운다.
커다란 벼 이삭을 형상화한 볏가릿대에는 농부들의 풍년 기원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음력 이월 초하루, 장현리 음력 정월 보름에 세웠던 볏가릿대를 내리는 날이다.
풍물을 치며 마을 사람들이 볏가릿대로 향한다.
먼저 볏가릿대 앞에 정성껏 마련한 제상을 차려놓고 고사을 올린다.
이날은 바람과 물, 땅을 관장하는 모든 신에게 고사를 올리는데, 풍작을 기원하는 마을주민들의 마음이 간절하다.
오곡백과의 풍작과 집안의 안녕을 기원하며 절을 올린다.
고사가 끝나면 잡신들에게 제사음식을 나눠 부정을 없앤다는 고수레를 한다.
보름동안 세워 놓았던 볏가릿대를 눕힌다.
제일 먼저 볏가릿대에 매달았던 오곡주머니를 풀어 그 양을 살펴본다.
보름 전 볏가릿대를 세웠을 때 보다 그 양이 늘었으면 늘어난 만큼 풍작이라고 믿었다.
볏가릿대에 쓰였던 삼방줄은 미리 준비해 놓은 섬에 담는다.
이 섬을 볏가릿대를 세웠던 집 헛간으로 옮겨 보관하는데 이렇게 하면 풍년이 들어 헛간이 쌀섬으로 가득할 것으로 믿었다.
보관했던 묵은 섬은 볏가릿대를 세웠던 논과 밭에서 태워 거름으로 사용했는데 이 또한 풍년이 든다고 믿었던 까닭이다.
볏가릿대를 내리는 이월 초하루는 머슴날이라고도 하여 한해의 고단한 농사를 앞두고 서로를 격려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담긴 날이기도 한 것이다.
농사의 시작을 준비하는 이월...
농부들은 풍년을 기원하며 볏가릿대와 함께 마을의 결속을 다지고 흥겨운 잔치를 벌인다.
풍년을 염원했던 농부들의 마음처럼 올해도 논과 들에 풍성한 결실이 맺히길 기원해 본다.
삼월삼짇날 - 강원도 산메기 (국립민속박물관)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높고 험한 산지로 둘러싸여 산악도라 불렸던 강원도.
산메기의 의미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이름 그대로 산에 제물을 바치고 대접한다는 뜻의 산먹이에서 유래되었다.
조상과 마을 , 가정의 평안을 기원하며 산신과 조상을 모시는 치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산메기가 활발한 곳은 삼척, 강릉 일대의 산간지역이다.
산메기는 마을에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행하지만경에 능통한 경사나 무당을 불러서 빌기도 한다.
이른 새벽 내미로리 마을...산메기 준비가 한창이다.
내미로리의 산메기는 집안마다 날을 받아 행하기도 하고 그 해의 당주로 정해진 집에서 날을 받아 같이 지내기도 한다.v 산메기를 지낼때에는 둥글래미떡을 만드는데 둥글래미떡은 호랑이가 좋아하는 떡으로 여겨 예로부터 호환을 피하기 위해 산메기 때 만든다.
내미로리는 마을 사람들이 경을 읽는 경사와 굿을 하는 무당을 불러서 한마을의 여러집이 비용을 준비하여 함께 지낸다.
산중턱에 도착하면 경사가 북을 치며 경을 외우는데 부정을 가시는 것이다.
산 정상을 향해 다시 오른다. 조상굿을 드리기 위해서다.
돌무더기로 마련해 놓은 산메기터. 산메기터는 마을마다 집안마다 정해진 산, 정해진 장소가 따로 있다.
조상님을 상징하는 한지와 실타래를 마음에 드는 돌 하나에 맨다. 조상굿은 집안마다 제물을 따로 차리고 각자의 소원을 빈다.
무당의 축원과 함께 조상굿이 이어진다. 행여 부정이라도 탈새라 정성을 모은다.
산메기의 마지막은 용왕굿이다. 산신당 옆 샘이 용왕을 모시는 장소가 된다. 용왕신을 모시는 것은 산과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까닭이다.
먹거리, 땔거리 온갖 것을 산에 의존해서 평생을 살아가는 산마을 사람들에게 산은 곧 신령이요, 신앙이다.
무당을 통해 접신이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신수를 점치기도 하고 액운을 막는 비방을 내리기도 한다.
넓적한 무명 조각을 잘라 나누어 주고 정해진 집안의 나무에 걸어 놓는다. 나무에 무명을 거는 것을 ‘조상님 새 옷 해드린다’고 불렀다.
또 다른 산골 마을 심곡리…
심곡리의 산메기는 부부가 함께 가기도 하지만 집안의 대를 이을 며느리를 데려간다.
인터뷰: 산신에게 먹여요 산은 억지로 하려고 하면 안돼요.
먼저 집안의 수호신으로 모시는 나무에 ‘산’ 이라 부르는 금줄을 두른다.
매년 산메기때 마다 산을 새로 묶어놓고 그 나무아래서 집안의 안녕과 무탈을 비는 것이다.
산메기때 올리는 음식은 메와 포 과일등 간소하게 차린다.
인터뷰: 나무에 연연히 산을 멕이니 우리 집안 뭐든지 잘되게 해달라고 빌지.
음식을 차리고 나서 조금씩 덜어낸 제물은 산신께드리고 제사가 끝나면 칼을 던져서 제사가 잘되었는지 물어본다.
인터뷰: 잡신을 오지 못하게 하기위해 칼을 던지지.
산메기를 다니는 집에서는 매년 산메기 줄을 집안에 모신다. 요즈음은 부엌에 모신 후 산메기에 썼던 제물로 상을 차려 제를 모신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에게 산은 곧 삶이자 신이었다.
오랜 세월 이어내려 온 산메기를 통해 사람들은 오늘도 산과 만난다.
한식 - 청천리 은진송씨 절사 (국립민속박물관)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충북 괴산군 청천리. 이곳이 바로 조선 후기 문신이며 대학자였던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 선생의 묘가 있는 곳이다.
4월 한식. 우암의 후손들도 선조의 묘를 찾는다.
이 절사에는 괴산, 청주 등에 살고있는 우암의 후손들이 참가한다.
종손이 간단한 인사만을 올리며 산위로 올라가는데, 묘에 절을 할 때는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하기 위해 신발을 벗는다.
우암의 집은 절사를 산소에서 직접 지내지 않고 재실에서 지내기 위해 우암의 묘소에서 집에서 직접 마련한 간소한 음식을 바치고 고유를 한다. 이 절차를 ‘천'이라 한다.
천이 끝나고 나서 후손들은 묘소 아래 있는 재실로 내려온다.
이 집안은 제수를 진설할 때 홍동백서의 원칙에 따라 누런 빛이 도는 배를 서쪽에 놓기 위해 배 껍질을 벗겨 흰 속살이 드러나도록 한다.
우암의 집에서는 부부를 함께 차리는 합설을 하기 때문에 부인의 제사도 함께 지낸다.
종손 이하의 자손들 모두가 절을 두 번 올리는 것은 묘소로부터 모셔온 조상님께 드리는 인사이다.
종손은 하늘과 지하에 있을수도 있는 모든 조상신을 향해 오늘의 절사를 알린다.
향을 피워 오늘의 절사를 알리고 술잔을 모사기에 세 번에 나누어 따라 붓는다.
모사기에 술을 따르는 것은 지하에 계신 조상신을 위해서 술로 강신을 청하는 것이다.
우암 종가에서는 여느 집과는 달리 서서 술을 따른다.
초헌 후 육적을 올리는데, 고기와 물고기, 갱은 미리 진설하지 않고 순서에 따라 올리는 것이 독특하다.
조상님께 절사를 고하는 독축을 한다.
독축이 끝나면 종손만 두 번 절을 올린다.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에는 계적을 올리고 종헌에는 어적을 순서에 따라 올린다.
제를 지내는 원칙과 순서는 집안의 가풍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연장자가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삼헌을 한다.
종헌이 끝나면 자손들은 조상이 음식을 흠향할 수 있도록 기다리는 시간인 합문을 한다.
국을 내리고 숭늉을 올리는 진다가 이어진다.
수저를 내리고 밥뚜껑을 덮는데 이를 철시복반 이라 한다.
조상신을 보내드리기 위해 참사자 전체가 재배를 드리는 사신이 이어진다.
축문과 지방을 불사르는 분축은 종손이 재실 밖에서 행한다.
인터뷰: 요새 기술로는 이렇게 못해
재실 왼편에는 우암의 공덕을 기리는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를 세운 비각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산신제를 드리는 것은 산소가 있는 산의 신령에게 조상의 묘소를 잘 보살펴 달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제수를 음복하며 자신의 뿌리인 조상을 기리는 한식 차례....
조상의 묘를 돌보고 제를 지내는 것은 조상에 대한 고마움과 은혜를 되새기고 못다한 효를 실천하는 것이다.
한식 차례는 전통과 가풍을 익히며 세대간의 정을 이어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단오 - 초곡리 별신제 (국립민속박물관)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성황당에 걸린 금줄이 5월, 단오별신제의 시작을 알린다.
바다 마을인 초곡리 …단오제 준비가 한창이다.
한쪽에선 신대를 만들기위해 대나무를 깎는다.
단오별신제는 해마다 열리는데 2 년마다 한번씩 무당을 불러 굿을 행한다.
인터뷰: 우리 마을 주민 전부가 안녕과 평안을 위해서 제사 올리고 마을이 바다에 생업을 의존하기 때문에 곁들여서 풍어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5월 초 나흗날 , 성황당에 올릴 제물을 준비한다.
성황당에서 천제당을 향해 상을 차리고 먼저 천신에게 제를 올린다.
천신제가 끝나고 성황제를 지낸다.
단오굿이 시작되는 아침 ,성황당에서 부정굿이 시작된다.
부정하고 불결한 것을 없애고 신을 맞기 위해서다. 무녀는 물과 불로 부정을 친다.
부정굿을 마치고 풍어를 가져다 주는 서낭을 맞이하는 굿을 하는데 마을 어민들은 특히 해서낭의 영험함을 오랫동안 믿어왔다.
대내림으로 신을 모셔온후 이어지는 골매기 서낭굿 에서는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신에게 마을의 평화와 풍요를 빈다.
세존굿이 이어진다. 무당은 자식을 점지해주는 당금애기설화를 구송한다.
성주는 집안의 최고 신이다. 무당은 굿사이에 익살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고 굿판을 흥겹게 한다.
집안의 모든 조상을 청하여 조상굿을 벌인다. 군웅장수굿은 김유신등 여러장군을 청한다.
놋동이를 입으로 물어 장군신의 위력과 위용을 보여준다.
밤늦도록 손님굿이 이어진다. 손님은 마마와 홍역을 가져오는 신이다. 손님굿을 잘 치뤄야 건강하게 지낸다고 여겼다.
다음날 아침 , 제면굿이 이어진다.
제면굿은 무당들의 조상인 제면할머니를 위한 굿인데 굿에 사용하는 떡은 백설기를 쓴다.
무당은 마을 사람들에게 백설기를 나누어 주며 신의 보살핌이 있기를 바란다.
서낭신이 내려와 굿을 잘 받았는지 물어보는 대내림굿이 이어진다.
거리굿은 볼거리가 많은 굿이며 재미가 있어 예전에는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 구경을 오기도 했다. 남근숭배의식은 성적 결합을 모방해 풍어를 기원한다.
성황제, 해서낭제가 끝나고 풍어제가 이어진다.
어촌 마을인 초곡리에서 용왕신은 어민과 풍어를 관장하는 신이다.
태풍이 와도 바다에 나가 죽은 사람이 없었던 것은 모두가 용왕신의 영험함이라고 믿어왔다.
무녀는 선주와 배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풍어를 기원한다.
무녀가 용단지를 타고 마을 사람들에게 신의 말을 전하는 용동우굿은 동해안 북부지방에서만 볼 수 있다.
흰천을 길게 늘어뜨려 흔들며 뱃노래굿을 한다. 하얀 광목천으로 만든 용선은 신이 저승으로 돌아가기 위한 배다. 용선에 돈을 넣으며 풍어를 기원한다.
정성들여 만든 용선을 태우는 것으로 2박 3일간의 긴 여정은 끝이 난다.
신과 인간이 하나되어 기원하는 초곡별신제...성황신과 용왕신을 모시며 마을의 평화와 풍요를 기원하는 사람들의 정성과 염원처럼 올해도 만선의 기쁨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해 본다.
칠월칠석 - 동계리 당산제 (국립민속박물관)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봉두산 아래 봉황이 머문다는 동계리. 동계리에는 한 해 풍년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당산제가 이어져 오고있다.
무더위가 한창인 음력 7월 동계리는 당산제를 칠월칠석에 지낸다.
인터뷰: 칠월칠석 제사를 모시는 것은 옛날엔 머슴들이 많았는데 하루 쉬면서 격려하기 위해 지냈다고 정해집니다.
마을 부녀자들은 제주의 집에 모여 제수 음식을 준비한다.
마을 중심에 자리한 당산나무. 둘레 5 미터가 넘는 느티나무로 이 나무는 조선시대 효령대군이 태안사에 머무는 동안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500 년 수령의 당산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마을을 지켜주고 사람들의 소원을 이뤄주는 신령한 나무로 여겨져왔다.
인터뷰: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신 보다 살아있는 나무에 지내는 것이기때문에 더 영험이 있다고 믿고 있어. 당산나무 아래 멍석을 깔고 제상을 마련한다.
젯상에 올리는 제물은 돼지머리, 백설기, 순대, 전병, 삼색과일, 시절음식인 수박등을 올린다.
당산제의 돼지머리는 가장 신성한 제물이다.
돼지머리는 붉은 고추, 계란 부침, 대파 등을 길게 썰어 화려하게 장식한다.
마을 최고령자인 마을 회장님이 초헌관의 역할을 맡아 제를 이끈다.
제주는 제를 앞둔 사흘 전부터 궂은곳에 가지 않고 부정타는 일도 자제했다.
제를 모시기 위한 청결한 몸과 마음을 위해서다.
제관들의 음복이 끝나면 남은 음식은 한지에 정성스럽게 싸서 당산나무 밑에 묻는다.
신목인 당산나무에 음식을 바치는 것이다.
제사 음식을 마을로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에 당산나무 옆 정자에서 마을 사람들이 함께 잔치를 벌인다.
제물이외에 마을 사람들이 음복할 음식은 별도로 준비한다.
당산제에 드는 비용은 당산나무에 빌어 득남을 하거나 영험을 얻은 사람들의 축원금으로 마련한다.
당산제가 끝난후 당산나무 아래 종지 윷놀이로 한바탕 놀이마당이 벌어진다.
마을의 평화와 풍요를 기원하는 소박한 사람들...자연을 닮은, 넉넉한 마음이 있는 한 동계리의 당산제는 오래도록 이어질 것이다.
백동 - 봉은사 우란분회 (국립민속박물관)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잡은 천년고찰 봉은사.
음력 7월 15일인 백중일은 사찰에선 중요한 의미가 있는 날이다.
스님들의 하안거가 끝나는 청정한 날이며 이때를 맞춰 사찰에서는 우란분회 행사가 치뤄진다.
인터뷰: 우란분절라는것은 선망부모 등의 모든 중생이 왕생극락 한다는 의미를 담고있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님과 선대 7대 조상들을 위해 위패를 모시고 극락왕생을 축원하는 날인 것이다.
조상을 극락왕생으로 이끈다는 천도제를 베풀어 고통받는 선망부모를 구제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온갖 영가들을 천도하는 천도제를 위해 불자들은 공양을 준비하는데....
제일 먼저 준비하는 것이 종이옷이다.
종이옷은 조상님의 새 옷을 만들어 드린다는 의미로 의복을 비롯해 음식, 동촉, 꽃,등을 공양한다.
그 공덕으로 부모와 조상이 고통없는 극락세계에서 태어나기를 염원하는 후손들의 효심과 소망, 정성이 담겨 있다.
불자들은 부모와 조상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발원문을 적는다.
7월 보름, 하안거를 마친 스님들에게 올림으로써 그 공덕으로 조상이 천도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란분절이 효의 날이 된 것은 부처의 10대 제자인 ‘목련존자’의 효행에서 비롯되었다.
목련존자는 지옥으로 떨어진 어머니를 구제하기 위해 하안거 해제일에 음식, 의복, 향촉 등을 갖추어 고승대덕들에게 공양하여 어머니를 구원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스님들은 범패를 부르며 영가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한다.
불가에선 7월 보름 우란분절이 팔만 사천 지옥문이 열려 일년 중 영가를 천도하기 가장 좋은 날이라 여겼다.
스님들의 바라춤은 모든 악귀를 물리치고 도량을 정화함으로써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극락으로 가길 바라는 스님들의 기도인 셈이다.
선대 조상과 부모님을 부처님 전에 모시고 부처님의 법문을 들려주고 공양을 올리면, 기쁨과 환의로 극락왕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때문에 등불을 밝히는 자손들의 정성이 지극하다.
날이 어두워지고 경내에는 수많은 등불이 켜진다.
광명의 상징이자 어둠을 밝히는 등불.불가에서는 등불을 밝히는 것을 공양 중에서도 으뜸으로 여겼다.
등불에 소원을 담아 부처님 앞에 기원한다.
우란분회의 마지막 의식으로 개인의 발원을 적은 나무판을 불단에 올려 태우는 호마 의식을 행하는데,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는 불길에 종이옷과 기원문을 태워 오랜 세월의 업장과 액이 소멸되기를 기원한다.
인터뷰: 극락왕생 하실 것 같아 기분좋아요.
우란분회는 불심으로 효를 실천하고, 일체 중생을 구제하고자하는 불가의 가르침이자 우리네 역사와 전통, 문화가 어우러진 명절이다.
선비의 향기 - 도동서원향사 (국립민속박물관)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낙동강을 굽어보며 현풍에서 도동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다람재에 올라서면 도동서원(道東書院)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동은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건너온다는 뜻으로 도동서원은 소수서원(紹修書院), 도산서원(陶山書院) 등과 함께 5대 서원 중 하나로 꼽힌다. 서원 오른편으로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왼편으로는 대미산 자락이 이어져 있다.
서원 건축의 완벽한 규범을 도동서원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우선 서원 입구의 수령 400년 된 은행나무부터 예사롭지 않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데서 유래하여 어느 서원 앞에나 다 심겨져 있는 것이라지만 서원 건립 당시 한강 정구(寒岡 鄭逑) 선생이 심은 수령 400년 된 이 은행나무에선 선비들의 기개와 자부심이 더욱 높게 빛나는 것 같다.
서원의 정문격인 수월루에 올라서면 낙동강과 고령 일대가 멀리 보인다. 물위에 비친 달빛이라는 의미의 수월루는 경치를 즐기고 시를 지으며 휴식을 취한 누각이다.
수월루를 지나면 강의를 위한 공간인 중정당이 있다.
중정당 양쪽으로 유생들의 기숙사로 쓰였던 거인재와 거의재가 자리 잡고 있다. 서원 경내는 주요 건물을 일직선상에 세우고 그 나머지 공간에 부속건물을 배치시켜 위계와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서원에서 행해지는 중요한 예법 중 하나가 일종의 서원 제사인 향사다.
중정당 뒤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서원의 향사가 행해지는 사당이 있는데 사당 서쪽 마당에 정사각형 돌판인 생단이 있다. 생단은 제수로 쓸 짐승의 품질을 검사하는 곳이다. 또 일종의 조명대라고 할 수 있는 정료대가 대청 앞 기단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향사가 있는 날, 서원에 도착한 유림들은 수월루에 준비해둔 도포를 착용하고 중정당으로 올라간다. 중정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실천한다는 뜻이다. 바로 중용을 의미한다.
정오가 지나면 수월루 문을 닫고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다. 중정당에 모인 유림들은 마주 앉아 짧게 상견례를 한 후, 사당에 나아가 도착했음을 아뢰는 알묘례를 올린다.
알묘례에 이어 중정당 오른쪽에 있는 생단에 나아가 성생례를 행한다. 성생례는 제수로 쓰일 돼지를 생단 위에 올려놓고 품질을 검사하는 일종의 절차로써 예와 격식을 갖추고 행해진다.
성생례가 끝나면 제사에 있어서 각자의 역할을 정하는 분정례가 행해진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정한 분정안을 분정판에 붙인다. 분정판을 제사를 올릴 헌관 및 유생들에게 보여 준 뒤 중정당 현판 아래 걸어둔다.
합리적이고 조화로운 이런 작은 절차에서 이치의 타당함과 그것의 실천을 앞세우는 성리학의 기본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축문을 쓴 뒤, 이를 또 헌관 및 유생들에게 보여 주고 확인을 한다.
저녁 6시 30분경에 제사상을 차리는 진설을 한다. 제사상에 올릴 돼지를 희생이라 하고 이 희생의 머리를 동쪽에 둔다. 희생의 절반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에게, 나머지 절반은 한강 정구 선생에게 진설한다.
새벽 2시 경에 본격적인 제사가 행해지는데 김굉필 선생과 정구 선생, 두 분에게 각각 의 제례를 올린다.
잔을 올리는 순서대로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가 행해진다.
먼저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신위전에 절을 하고 다음으로 한강 정구 선생의 신위전에 절을 한다.
종헌례가 끝나면 초헌관을 제외한 모든 참례자들이 재배를 한다.
신위를 덮고 사당의 문을 닫고 나오면 향사의 모든 절차가 끝이 난다.
향사에는 정성과 함께 합리적인 절차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서원의 외관이 그러하듯 제사인 향사의 형식에도 학문 보다는 인격 수양을, 지식보다는 그것의 실천을 앞세운 성리학의 세계관을 발견할 수 있다.
사상과 실천의 일치를 몸소 보여주었던 선비의 고귀한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오늘날에도 서원엔 유림들이 모이고 향사라는 행사를 통해 그 정신의 일부분만이라도 실천하고자 하고 있다.
추석 - 유곡리 안동권씨 차례 (국립민속박물관)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암탉이 알을 품은 형국이라고 하여 닭실 마을이라 불리는 경상북도 봉화 유곡리.
닭이 알을 품었다는 바로 그 자리에 안동권씨 충정공파 종가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 닭실마을에 권씨가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은 지금부터 480 여년 전인 1520년. 그 이후, 안동 권씨들이 마을 주민들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로인해..
인근에서는 이 마을의 안동권씨를 닭실 권씨라고도 부른다.
인터뷰: 옛날 동고떡하고… 장절편… 위에 잔떡도 열한가지 쓰고… 오색강정 쓰고…
권씨 종가의 내림음식은 가양주인 술, 이 댁에서만 만드는 동고떡과 장절편, 색을 들인 오색한과가 있는데, 이들 음식이 추석 차례상이나 제사상에 올려진다.
제수는 종가의 종부를 비롯해 집안 일가의 며느리들이 함께, 집안의 전통에 맞춰 준비한다.
보통 이삼일 전부터 제수준비에 들어가는데 추석 하루 전에는, 밤을 새기가 일쑤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싫은 내색이 없다.
충정공 권벌을 시조로 삼아 문중을 이루고 살고 있는 닭실 마을은 전형적인 씨족마을로 마을 사람들의 90%이상이 안동권씨들이다.
그래서 주민들 대부분은 일가 친적들이기 때문에 추석에는 지손들 집에서 먼저 차례를 지내고, 제일 마지막으로 가장 큰집인 종가에 지손들 모두가 모여 차례를 지낸다.
그 뿐만 아니라 추석엔 주변의 내성과 춘양 일대로 파생되어 나간 안동 권씨들까지도 종가의 차례를 지내러 온다.
이곳 권씨 종가에서는 불천위와 4대조상까지 차례를 올리는데 각 위마다 상을 따로 차린다.
제수는 각 위별로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상을 따로 마련하여 준비하는데, 제수 준비는 다같이 한다고 해도 마지막 상차림은 반드시 종부의 지시를 거쳐야한다.
오랫동안 차례 준비를 해온 종부의 손길은 한치의 오차도 없다.
권씨 종가의 추석 차례상에는 햅쌀로 빚은 송편과, 햇 과일 그리고 포와 탕, 어적등을 차리는데 특히, 생고기를 쓰는 것으로 보아 제사를 받는 조상이 서원에 배향될 정도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제사준비가 어느정도 마무리 되면 종가의 가장 큰 어른인 종손은 먼저 차례를 지낼 장소인 사당으로 가서 이상이 없는지 살핀다.
마을의 연세 많은 어르신이나 차종손은 제수를 놓은 자리가 맞는지 일일이 진설을 지시한다.
인터뷰: 쫙 맞춰야해, 넓이를 늘리란 말야.
일반적으로 차례나 제사는 4대조까지 지내나, 권씨 종가에서는 신주를 영원히 옮기지 않는 불천위가 있어 5위의 차례를 지내게 된 것이다.
종손이 조상신의 강림을 청하고 인사를 드린 후 조상님께 잔을 올리는 헌작을 한다.
제사는 원래 잔을 세번 올리는 삼헌을 하나, 차례는 잔을 한번만 올리며 축문도 읽지 않는다고 하여 무축단헌이라고 한다.
매 위마다 수저를 메의 한가운데 꽂는 삽시정저를 행하는데 이때 수저는 반드시 오목한 곳이 동쪽으로 가도록 한다.
수저를 놓고 조상께서 음식을 드실수 있도록 기다리는 합문을 하는데, 아홉 숟가락을 뜰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한다.
이제 식사를 마쳤으므로 숭늉을 올리는 헌다를 한다. 이때 국그릇에 숭늉을 올리는 것은 그릇을 바꾸면 신이 알아보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수저를 내리고 밥과 국의 뚜껑을 덮는 철시복반을 한다.
차례를 마치고 상을 물릴 때에는 올린 순서대로 내린다.
차례를 마치면 참사자들은 모두 함께 모여 차례상에 올린 음식으로 음복을 한다.
음복상은 본래 독상이 원칙인데, 최근에는 절차가 간소해져 겸상으로 한다.
음복은 반드시 종손이 먼저 음복주를 마신 뒤에 항렬이나 나이 순서에 따라 차례로 음복주를 마신다.
음복을 모두 마칠 때까지 제관들은 제복을 벗지 않는 것이 관례다.
풍성하게 차리는 차례상. 추석 차례상에는 오늘의 결실을 맺게 해주신 조상님께 감사하는 마음까지 함께 오른다.
조상을 기억하며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는 시간, 차례....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는 후손들이 있어, 권씨종가의 한가위는 오늘도 풍요롭다.
정월대보름 - 금천리 깃고사 (국립민속박물관)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깃고사는 농기를 모시는 제사다.
예로부터 농기는 농신을 의미하고 동시에 마을을 상징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터뷰 : 옛날 노인들 얘기로는 조선말부터 신농씨라 해서 신농대제를 지내는거야.
충남 연기군 금천리…마을이 산자락 얕은 구릉지로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밭농사에 치중할 수 밖에 없는 산촌마을.
해마다 농사가 시작될 무렵이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깃고사 풍속이 전해오고 있다.
두레을 나갈때, 농번기에는 농기를 앞세우고 일을 하러 나가곤 했는데 상대를 만나면 한바탕 기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일단 싸움에 진 농기는 승자앞에 한동안 깃대를 낮추어야 했다.
예전에는 깃고사를 집에서 지냈기때문에 마을의 신임이 두텁고 집안에 궂은 일이 없는 집을 선정하여 고사를 지낼 집 마당에 기를 세우고 제를 지냈다.
일단 기가 세워지면 집주인도 바깥출입을 삼가했을 뿐아니라, 외부인도 출입을 삼가하는것이 예사였다.
요즈음은 주로 마을 회관 앞에 기를 세운다.
기는 농기와 영기 두 개를 함께 세우는데 현재 금천리 농기는 광목천에 천으로 글씨를 바느질하여, 농자천하지대본 이라 붙이고 기 주변으로는 지네발을 달았다.
영기에는 우두머리 영자가 쓰여져 있다.
날이 어두워지자 마을회관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깃고사에서는 백설기 시루와 시루에 꽂은 북어 밤, 대추, 과일, 돼지머리의 제물을 올린다.
초헌관이 향을 사르고 술을 올린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깃고사는 마을당산제와도 유사하다.
전통적인 유교방식으로 치뤄지는데 축문을 읽게되면 삼헌을, 축문이 없으면 단헌을 한다.
깃고사가 진행되는 동안 흥을 돋우기 위한 풍물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종헌관이 술을 올리고, 풍물을 울리던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함께 절을 한다.
소지를 올려 마을의 안녕과 개인의 소원을 빈다.
고사가 끝난 후 마을 사람들이 각자 절을하고, 정성을 바친다.
고사상에 올렸던 음식은 마을 주민들이 함께 나누는데 고사상에 올랐던 제수 중 북어는 부정과 액운을 물리치기 위해 깃대 상단에 꽂아두고 깃대는 한달동안 세워놓았다가 다시 보관하고 내년을 기약한다.
깃고사를 마친 후 마을 아낙들은 집으로 돌아와 한해동안 집안이 평안하기를 빌며 집안 곳곳에 있는 신들에게 치성을 드린다.
농사가 시작될 무렵 깃고사를 통해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한바탕 마을 잔치를 벌이고 마을과 집안의 무탈함과 풍년을 기원하는 모습은 소박한 우리네 정서가 담겨져 있다.
물의 결혼식 - 부치마을 백중 우물제 (국립민속박물관)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더위가 한창인 백중날, 이른 아침부터 부치 마을 사람들은 우물 주변을 청소하느라 바쁘다. 우물 주변의 잡초부터 제거하고 모터를 이용해 물을 모두 품어낸다. 우물 청소는 우물제를 지내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전남 나주 부치 마을 입구엔 원형의 넓은 공터가 있고 그 공터를 중심으로 소규모 가구들이 모여 사는 고샅이 흩어져 있다. 세 군데의 고샅을 일컬어 부치 마을이라 하는데, 마을 중앙 공터에 우물이 있다.
마을의 모양새가 풍수적으로 배모양을 닮았는데….
배 형국의 부치 마을에 우물을 판다는 것은 배 밑 바닥을 판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에 마을이 잘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우물에 제를 올림으로써 마을의 복을 기원하게 되었다 한다.
우물제를 지내는 백중은 음력 7월 15일로 바쁜 농번기를 보낸 뒤 가을 추수를 앞둔 절기다.
우물제 당일 아침, 남자들이 마을 길을 청소하며 우물제의 시작을 알릴 때 여자들은 음식 장만을 위해 분주하다.
잔치 음식과 제수는 우물제 전날 미리 장을 봐서 준비해 둔다. 세 군데 마을이 해마다 돌아가며 우물제를 준비하는데 제의에 들어갈 비용으로 쌀과 조금의 돈을 낸다.
우물의 원류가 되는 연못 물을 담기 위해 호리병을 준비하고 우물 주면에 금줄을 두르면 우물제 준비는 거의 마무리가 된다.
마을 회관 앞에 풍물패들의 소리가 요란하다. 우물 청소를 마친 후 못시암 물을 뜨러 이동하기 위해 풍물패와 제관이 모였다.
못시암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샘으로 사시사철 맑은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마을 우물의 뿌리가 못시암과 연결되어 있다 한다.
마을 논 한가운데 위치한 못시암에 이르러 물을 호리병에 조심스럽게 담는다.
솔가지로 병 입구를 막고는 다시 풍물을 울리며 마을로 돌아온다.
음양론을 믿었던 옛 선조들은 물도 숫물과 암물로 구분지었다. 지금 떠가는 못시암 물은 숫물로서 이를 테면 남자에 해당된다.
우물에 다시 돌아오면, 우물 가 양쪽 끝에 긴 장대를 걸쳐놓고 못시암에서 길어온 물이 들어 있는 호리병을 거꾸로 매달아 놓는다.
신랑격인 못시암 물과 신부 격인 마을 우물 물이 합쳐진 것이니 제사상을 차린다기 보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것 같다. 주민들은 이 백중 우물제를 물의 결혼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상이 다 차려지면 제사가 올려진다.
물의 결혼을 축하하며 마을의 복락과 무사태평을 기원하며 제를 지낸다.
제의가 끝나면 풍물패가 굿장단을 치며 제관과 함께 우물을 세 바퀴 돈다. 신나는 풍물패의 장단에 마을 사람들도 흥겨워 한다.
우물가를 돌고 난 풍물패는 마을 정자인 동각으로 와서 동각을 돈다.
동각에 모여든 마을 사람들은 차려 놓은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며 우물제의 뒤풀이를 즐긴다. 물이 결혼한 날 사람들은 농사의 고단함을 잠시 내려 놓고 쉬어 간다.
만물이 풍성한 백중의 절기이기에 마음은 풍요롭고 흥도 절로 난다.
제의를 마치면 우물가에 금줄이 쳐지는데 해가 지기 전까지는 아무도 금줄 안으로 접근하지 못한다.
긴 여름의 끝, 백중 우물제를 통해 마을 주민들은 농사의 고단함을 흥으로 달래고 마을의 단합과 안녕을 기원할 수 있었다.
신령한 두번의 제사 - 순흥 성황제 (국립민속박물관)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경상북도 영주의 우시장, 순흥면 주민들이 마을 제사인 성황제에 제물로 쓰일 소를 고르고 있다. 몸 전체가 한 가지 색깔인 수송아지가 제사 제물의 조건이다.
소를 트럭에 싣기 전, 마을 사람들은 얼굴과 손을 씻고 의관을 갖춰 입고는 소에게 절을 올리기 시작한다. 제삿날 제물로 올려지기 전까지 소는 신격화되어서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이 소를 마을 사람들은 아예 ‘양반'이라 부르기까지 한다. 소가 양반이 되다 보니 말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 공대말로 모셔지고 아침, 저녁으로 문안 인사까지 받는다. 먹이를 먹일 때도 ‘식사하신다' 고 말한다.
그런데 소가 어쩌다가 양반까지 되었을까.
조선 초 영월에 유배된 단종을 임금으로 재즉위 시키려던 금성대군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마을 주민들은 금성대군의 넋을 달래고자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 이 때 소를 제물로 바치며 대군의 넋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 ‘양반' 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성황제가 있는 이른 아침, 제사를 모실 제관들은 제사에 쓰일 제주와 제물을 싣고 제당이 있는 비봉산에 오른다.
순흥의 성황제는 마을 제사인 본당 고사와 더불어 금성대군의 제사를 이틀에 걸쳐 올린다.
솔가지에 물을 적셔 제사를 지낼 사당 주변에 뿌린다. 이는 부정을 푸는 의미라고 한다.
사당 안에는 마을을 지키는 신들의 네 위패외에 술할마시라는 돌덩이도 마을 제사를 받고 있다. 군대를 물리치고 이 마을을 지켰다는 전설을 가진 돌덩이다.
제관들은 위패에 한지 고깔을 씌우고 실타래를 감는다. 위패에 고깔을 씌우는 것은 사람이 의관을 차리는 행위와 같다고 한다.
네 개의 위패 앞에 네 개의 상이 각각 차려지는 것이 타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다.
본당 당고사가 끝나면 제관들은 다시 하산한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악귀들이 붙어 오지 말라는 의미에서 집 앞에 피워놓은 불에 발을 쬐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휴식을 취한 뒤 다음날 새벽엔 금성대군 당고사를 위해 다시 산을 올라야 한다.
다음날 이른 새벽, 제물로 바쳐질 소 ‘양반' 이 있는 외양간 앞에서 마지막 절을 올린 후 양반을 차에 싣는다.
엄동 설한 정월의 새벽에 길 떠나는 제관들 뒤에서 아내들은 연신 절을 하며 무사 귀가를 바란다.
금성대군당이 있는 두렛골로 향하기 전에 제관들은 질막이라는 곳에 잠시 들러 목욕재계를 한다. 얼음을 깨고 차가운 물웅덩이에서 목욕을 한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도 이들의 지극한 신심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다.
금성대군당에 도착한 제관들은 제물 소인 양반을 나무에 묶어 놓고 본격적인 제사 준비에 들어간다. 제사에 들어가기 전 먼저 소를 도살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소를 도살한다 하지 않고 양반을 지운다는 표현을 쓰며 끝까지 소에 대한 예의를 지킨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해서일까, 소는 사람의 손을 슬쩍 피한다.
소가 죽으면 내장을 꺼내 먼저 진설한다.
제물로 쓰이는 고기는 중량을 달아 똑같이 일곱 등분해서 제사의 제물과 주민들에게 골고루 나뉘어 진다.
먹지 못하는 내장을 일부 제외하고는 모든 부위가 다 제물이 된다. 일단 한번 익힌 후 제상에 오른다.
정오를 넘어서면 젯밥을 짓기 시작한다. 제관들은 이를 새앙밥 짓는다 한다. 네 명의 제관이 각자 한 개씩 따로 새앙밥을 짓는다. 솔가지에 물을 묻혀 솥에 툭툭 치며 밥물이 넘치지 않도록 정성을 기울인다. 하루 세 번 새앙밥을 지어 제당에 올린 후, 제관들도 이 밥으로 요기를 한다.
정이 되면 제관들은 의관을 갖추고 제사에 임한다. 새앙밥을 올리고 고기 외에 다른 제물들도 진설한다. 제사의 순서는 기제사의 순서와 비슷하다.
제당 의례의 마지막 순서는 마을의 무사태평과 개인의 소원을 비는 소지이며 제관들은 이 절차를 가장 중요시한다.
제사가 다 끝나면 지체하지 않고 하산한다. 이곳에서 더 머뭇거리는 일은 신을 노엽게 해서 신벌을 받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침이 밝아 오면 제관 집에 주민들이 찾아와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며 음복을 한다. 마을 공동 제사에 쓰인 지출 내역을 확인하며 마을 운영에 관심과 협조를 보낸다.
순흥의 당고사는 위엄을 갖추는 것을 넘어서서 신령한 기운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제관들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 혹독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제사 형식의 원인은 이들이 살고 있는 곳과 무관하지 않을 듯 하다.
민족의 젖 줄기라는 태백과 소백산맥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순흥, 예로부터 임금의 태를 많이 묻을 만큼 신령한 터라고 소문난 곳이기도 하지만 가장 험준한 산맥의 한 가운데 위치해 있기도 하다.
간은 자연을 닮는다. 이들을 둘러싼 민족 산맥의 야성적인 강인함과 신령함이 그대로 이곳 사람들에게 깃들어 있고 이들이 모시는 신과 제사에도 스며 있는 것이리라.
작은섬, 큰소망 - 외연도 풍어제 (국립민속박물관)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서해 고도 외연도, 육지에서 까마득히 떨어져 있어 연기에 가린 듯하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대천항에서 뱃길로만 꼬박 두 시간 반을 헤쳐나가야 만날 수 있다. 바람이 잔잔한 새벽이면 중국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서해 고도다.
제사에 쓰이는 특이한 제물 중 하나가 ‘지태' 라 불리 우는 소다. 뭍에서 싣고 와 사당이 있는 당산에서 제사 직전 도살해서 올리는데 제물 중 가장 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음력 정월 보름을 하루 앞둔 날, 정오 무렵, 조선중기 이후 400년을 면면히 이어온 외연도의 풍어당제는 제물 준비를 맡은 화주들이 제물을 지고 사당이 있는 당산으로 오르면서 시작된다.
외연도 풍어제는 마을의 여러 신들에게 올리는 제사와 연계되어 있다. 산신에게 드리는 산신제와, 어업신으로 추앙받는 전횡장군의 제사를 가장 먼저 지낸다.
당산에 도착한 당주는 먼저 전횡장군 사당에 들어가 초를 피우고 분향한다.
제사에 쓰이는 또 하나의 특이한 제물은 한복이다. 남자 한복 1벌과 여자 한복 2벌을 위패에 걸치는데, 전횡장군과 그의 아내와 딸을 위한 것이라 한다.
제수 음식 준비에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장정들이 쌀을 일일이 골라내고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음식을 준비하는 데서 제사에 임하는 이들의 정성을 엿볼 수 있다.
당주가 사당 안에 길지를 걸고 있다. 길지는 한지로 만든, 일종의 복을 비는 도구다. 제사가 끝난 후 길지를 가장 먼저 받아서 자신의 선박에 걸어 두면 그 해는 고기를 많이 잡고 아무 사고 없이 평안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밤이 깊어지면 산신에게 먼저 제를 올린다. 절을 할 때마다 징을 울리는 것이 특이하다. (징 소리)
깊은 산속에서 당주가 제사를 올릴 때 산 아래 마을 주민들도 깨어서 함께 공력을 모으라는 뜻이 담겨 있을 수도 있겠다.
산신제가 끝나면 전횡장군 제사에 제물로 쓰일 소를 잡는다. 소가 쓰러지면 소의 생피부터 받는데 이 피는 바다에서 지낼 용왕제와 마을 제사에 제물로 쓰인다.
내장은 익혀 고기와 함께 장군의 사당에 올려진다. 마을의 안녕과 어선의 풍어를 기원하는 소지를 끝으로 당산에서의 의례는 모두 끝이 난다.
날이 밝아오면 풍물을 울리며 제수를 챙겨 하산할 준비를 한다.
하산하기 전, 전횡장군 바위라 불려지는 커다란 바위 아래 고기 일부를 넣어 놓고 마을이 떠나갈 듯 풍물을 울리며 산을 내려온다.
어를 기원하는 오색기가 펄럭이는 선착장 앞에 제상이 차려지면 풍어제를 올린다.
풍어와 어선의 안전을 기원하며 소의 피에 제물을 섞어 바다에 뿌린다. 가장 귀한 제물인 소의 피를 드렸으니 소원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풍악이 울리는 중에 당주와 마을 유지들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다. 배 위에서 다시 제상을 차리고 용왕제를 올린다.
제를 올린 후 제사에 사용한 길지에 제물을 싸서 바다에 던지며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
준비한 퇴송배에 음식을 실어 바다에 띄우는 의식을 치른다. 퇴송배로 마을의 액과 귀신들을 바다 멀리 내쫓는 용왕제는 풍어제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서해의 작은 섬 외연도, 그곳에는 원시의 자연과 더불어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태초의 축제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
인간과 신의 축제 - 별신제 (국립민속박물관)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신명이 오를대로 오른 무당이 좌중을 웃기고 울린다. 무당처럼 신명이 난 마을 사람들은 어깨춤을 추며 일어나 함께 신명을 풀어 놓는다. 굿인지 축제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경상북도 포항시 우목리는 평범한 어촌이다. 이 작은 마을이 5년에 한번 삼월 삼짇날이 되면 풍어를 기원하는 굿인 별신제를 올린다.
별신제는 동해안과 남해안 지역에서 무당에 의해 별신굿으로 행하여지는 마을 제사다. 어촌 지역에서 행해지는 굿이기에 만선과 풍어의 기원을 제일 큰 목적으로 하지만 마을의 안녕과 여행자의 사고 방지 등, 다목적 성격을 띤다.
별신제를 집행하는 무당은 전문적인 직업무들이다. 6,7명의 무당들이 돌아가며 2박 3일 동안의 길고 긴 굿판을 지킨다.
별신제를 위해 가장 먼저 정성을 들이는 것이 바로 지화 만들기다. 지화란 굿에 쓰일 형형색색의 종이꽃으로 색깔에 따라 총 12가지가 만들어진다. 오랫동안 굿판을 따라다닌 무당의 숙련된 솜씨에 뒤해 진짜 꽃처럼 아름다운 지화가 만들어진다.
굿이 열리는 굿장 입구 쪽에 대나무로 된 허개 등을 세우면 이제 곧 굿판이 열린다.
마을 대표들이 술을 올리고 절을 하며 신이 오기를 청하는 청좌 굿의 시작으로 별신굿의 막은 오른다.
마을 어른들의 인사가 끝났으니 이젠 마을의 수호신을 모셔 와야 한다. 해변을 끼고 돌아 신당으로 와서 제를 올리고 굿을 한다. 마을사람들이 몰려 나와 굿거리를 구경하거나 참여하는 거리굿의 일종인데 당맞이 굿이라 한다.
무당이 마을 주민에게 술 한잔을 권한다.
무당 혼자서는 신명이 오르지 않는 법, 굿을 하는 무당과 굿을 모시는 사람 사이게 교감이 없으면 굿판에 신명을 기대하긴 어렵다.
마을 어른 중 신이 잘 들어오는 사람이 서낭대라는 대나무를 잡는데, 신이 통하면 대가 흔들린다 한다. 그런데 진짜로 신이 내려왔는지 무당이 굿을 하자 대나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를 본 무당과 마을 사람들은 신이 오신 것에 흥이 나기 시작하고 작은 어촌 거리가 징과 꽹과리와 사람들의 소리로 들썩이기 시작한다.
굿장으로 돌아와 무당들은 세존 굿을 올린다. 세존 굿은 무병장수와 자손의 번성을 위한 굿이다. 무당이 부르는 무가가 그 절정에 이를 즈음 무당은 여러 이유를 대며 마을 주민들에게 복비를 받아낸다. 아프지 않게 하고 자손이 번성하도록 기원하는데 복비를 내지 않을 수 없다.
여기 저기서 복비를 내자 무당은 더욱 더 신이 난다.
복비를 많이 받았으니 이제 그 답례로 흥겨운 놀이를 보여줘야 한다. 고깔모자 쓰고 색동옷을 입고는 앙증맞은 춤과 시늉을 하는데, 마을 어른들, 즐거워하고 복비 낸 것이 아깝지 않다.
무당 : ~씨, ~ 씨…
(무당, 명단을 보며 호명하는 소리)
무당이 배 선주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호명하자 선주들은 제단 앞으로 나간다.
배 선주들뿐만 아니라 자동차 주인이나 택시 운전사, 트럭 운전사 등도 호명하는데, 선주들에겐 만선의 기원을, 자동차 운전자들에게는 무사고와 영업의 번창을 기원한다.
무당 : 차 사고 내지 말고, 속도 위반 걸리지 말고…
시대에 따라, 기원하는 내용도 달라지고 다양해지기 마련이다.
굿판을 여는 동안 제수와 음식을 준비하는 임시 부엌에서 아낙네들의 손길도 쉴 틈이 없다.
무당이 무거운 놋그릇을 입에 문다. 놋동이 굿, 일명 장수굿이라고도 한다. 자손들 군대 가서 사고 안 나고 성공하기를 바라는 굿이다.
소망과 기원이 없다면 굿도 없으리라.
굿거리를 하면서 신들과 소통하고 나면 무당들은 반드시 사람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놀이를 보여준다. 신과 사람을 이어주는 행위가 굿이기 때문이다. 몇 번의 굿거리를 연이어 하고 난 뒤 여자 무당들이 모두 나와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운다.
굿거리가 막바지로 치닫고 마을 주민들은 무당들과 어울려 덩실덩실 춤을 추어댄다. 서로 어울리며 기운을 풀어내고 나와 네가 하나 되어 춤을 추는 동안 별신제는 점점 막을 내린다.
별신제를 지내는 동안 마을의 모든 배에는 만선의 깃발이 꽂힌다.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가득 싣고 돌아올 때만 꽂는 만선 깃발을 별신제 중에는 그냥 꽂고 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짐을 알기에 소원을 기원하는 별신제를 지내는 동안 주민들은 이미 그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소망의 간절함이 굿을 만들었기에, 인간에게 소원함이 있는 한, 굿은 현대인의 삶 속에서 계속 이어질 것이다.
장승과 사람의 잔칫날 - 용두리 장승제 ( 국립민속박물관)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충남 용두리 주재소의 한 일본인 소장이 미신 타파 명목으로 마을의 장승을 모조리 뽑아 불태워 버렸다. 그 후 일본인 소장은 며칠 간 열이 나며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회복되었다 한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인 장승을 함부로 대했으니 재앙을 입어 마땅하다고 마을 사람들은 여겼다.
장승, 지금은 많이 사라져버렸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농촌의 마을 입구엔 장승이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장승은 마을과 마을의 경계를 나타내거나 길의 이정표 역할을 하기도 했고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기도 했다.
따라서 장승을 세우고 있는 마을은 마을 수호신 장승에게 마을 제사인 장승제를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충청남도 청양군 용두리 마을에서는 아직도 음력 정월이 되면 장승제를 지낸다.
장승이 세워져 있는 곳을 장승거리, 서낭당, 노루목이라고 하는데 보통 마을 입구에 해당하는 길목이다. 장승이 서 있는 이 곳에 제상을 차리고 마을의 풍요와 복을 기원하는 장승제를 올린다.
장승제는 새 장승을 세워 제를 올리기 때문에 제사에 앞서 마을 남자들은 새 장승을 만들기 위한 장승목을 베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수호신인 장승을 만들 나무이기에 아무 산에서 아무 나무나 베지 않는다. 당일 방위를 보아 흉한 기운이 없는 방향의 나무를 베는데 올곧게 자란 소나무가 장승목으로 주로 쓰인다.
베어 온 장승목이 마을회관 마당에 내려지면 곧이어 장승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간다. 마을 주민들 중에 솜씨 있는 목공이 장승 제작을 맡는다.
껍질을 모두 벗겨낸 장승에 머리, 얼굴, 몸통을 구분하고 머리 부분부터 깍아내면서 윤곽을 만들어 나간다.
볼 부분을 움푹 파내고 코가 삼각형 모양으로 튀어나오게 각을 만들어 낸다. 입을 깍아내고 몸통 부분을 평평하게 깍아 내면 붓으로 머리에 관모를 그리고 눈, 코, 귀 등 얼굴 윤곽을 그린다.
남장승은 수염을, 여장승은 비녀를 꽂은 모습으로 남, 여를 구분 짓는다.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장승들은 모양이 비슷하면서도 얼굴 형태나 표정이 조금씩 달라 각각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
용두리의 장승은 순박하고 인심 좋은 시골 촌부를 연상케 한다.
완성된 남장승과 여장승을 각각 지게에 지고 풍물을 치며 장승을 세우러 간다. 풍물 소리를 들은 마을 주민들이 몰려 나와 함께 흥을 즐긴다.
장승거리에 도착하면 장승 주변에 황토를 뿌려 액운을 막는다.
(인터뷰) 나쁜 것을 막으려고 뿌리는 것이다.
새 장승을 세우고 가장 자리에 비녀목을 끼워 장승을 고정시킨다. 장승을 다 세우면 금줄을 장승 몸통 부위에 서너겹 감는다.
장승 세우기가 끝나면 이제 본격적인 제사 준비에 들어간다. 제사를 주관할 화주가 제물을 챙겨 앞장서면 뒤에서 농악대가 풍물을 울리며 따른다. 마을 주민들은 제사보다 풍물에 더 신이 난 것 같다. 장승제는 마을 전체의 축제날이기도 한 것이다.
제사 의례에 따라 술잔을 올리고 화주와 축관이 절을 한 뒤, 축문을 읽는다.
남, 여장승과 동, 서, 남, 북, 중앙의 오행신에게 마을의 복을 기원하는 내용을 축문에 담고 있다.
제례 마지막에 소원을 기원하는 소지를 올린다.
장승은 말이 없다. 동네 어귀의 늘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묵묵히 마을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너무 빨리 변하는 세상사에 지친 사람들은 장승의 그런 한결 같은 모습에 신뢰를 느끼고 복을 기원하고 나쁜 일을 막아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가도 장승은 여전히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우리 곁에 친근한 존재로 남아 있을 것 같다.
망자와의 긴 이별 - 초분 (국립민속박물관)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짚 덤불을 헤치자 탈육 된 어머니의 유골이 나온다. 3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와 다시 마주보는 순간이다. 짚 덤불 속에 갇혀 있던 어머니에게 다시 햇빛을 보여주는 짧은 순간이다. 행여나 다칠세라, 조심조심 유골을 모신다. 이제 어머니의 유골은 지푸라기 무덤을 떠나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 묘와 함께 모셔질 것이다.
초분, 말 그대로 지푸라기 무덤이다. 우리나라의 독특한 장례 풍습인 초분은 시신을 땅에 바로 묻지 않고 완전히 탈육 될 때까지 이엉과 용마름으로 덮은 초가 형태의 임시 무덤을 말한다. 짚으로 만들어 놓은 초분을 2,3년 후에 해체하여 시신의 유골을 드러내어 최종적으로 땅에 묻는 본장을 하게 된다.
관속의 유품들 속에서 저승 갈 때 쓰라고 넣어둔 노자돈이 나온다. 그 외에 시집 올 때 가져온 혼서지와 사주단자도 들어 있다. 어머니의 유품을 발견한 아들은 살아 생전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난 듯 잠시 일손이 멈추어진다. 혹은 인생의 무상함을 잠시 깨우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묘에도 좋은 터가 있듯이 초분이 설 자리에도 명당이 있는데, 뼈가 말갛게 탈육 될 좋은 자리에 어머니를 모셨는지, 아들은 내심 걱정이 된다.
초분은 주로 주거지와 멀지 않는 산이나 들판에 세워진다. 살아 있는 자와 망자와의 동거, 어찌 보면 몹시 불경스러운 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삶과 죽음의 공존을 바라봄으로써 함부로 살면 안 된다는 인생의 교훈을 배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시신의 뼈를 드러내어 깨끗하게 다루는 것을 씻골이라 한다. 뼈를 순서대로 수습한 뒤 불순물을 닦아내고 칠성판에 유골을 안치한 후 한지로 싸서 묶는다.
어린 아기가 죽거나 전염병에 죽었을 경우,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고 후에 어머니를 합장하려 할 때, 객지에서 죽었을 경우에 초빈을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씻골 작업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이장이 진행된다. 씻골과 이장은 조상의 극락왕생뿐 아니라 후손들의 안녕을 바라는 정성이 담겨 있는 행위이기에 날을 잡는 것에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다음 날 아침, 지관의 인도 하에 우선 개토제를 지낸다. 토지신에게 땅을 열겠다고 고하는 것이 개토제이다. 개토제가 끝나면 지관이 하관할 방향을 정한다. 지관이 패철을 가지고 방향을 잡으며 작대기를 세워 터를 표시한다.
지관이 표시한 곳에 부모의 관을 하관하고 명정으로 덮는다.
흙을 퍼서 부은 후에 마을 주민들이 준비한 띠로 봉분을 한다.
두 분을 따로 모시는 것은 자손들의 안녕을 위한 이 지역의 풍속이다.
하관과 봉분이 끝나면 상주와 일가친척들은 평토제를 올린다. 평토제는 산에서 올리는 마지막 제사라 하여 성대하게 지낸다.
내륙지방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져 있던 초분은 현재, 남서해안과 일부 섬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예전에는 초분을 많이 했다고 하지만, 장례 절차의 번거로움과 비용의 문제로 인해 현재 초분은 극히 일부분에서만 존재할 뿐 점차 사라져 가는 추세다.
시대와 더불어 사라져가는 전통. 그 속에 품고 있는 아름다운 정서만은 지켜나갈 방법이 없는 지 생각해 볼 일이다.
전통의 자부심 - 충재불천위 제사 (국립민속박물관)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경북 봉화의 닭실 마을,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옛날부터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다. 그래서인지 뛰어난 문필가와 선비들이 대대로 많이 배출되었다.
조선 중종 때 충신이며 학자였던 충재 권벌 선생도 이곳 봉화마을 출신이다.
권벌선생이 직접 지은 종가는 아직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초승달처럼 휘어진 월문을 지나면 영남 양반집의 특징인 입구(口)자 형태로 안채와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다.
돌담에 나 있는 작은 쪽문을 열고 들어서면 권벌선생의 서재였던 ‘충재'가 나타난다. 권벌선생은 이곳 서재에서 도학을 연구하며 마음을 닦았다고 전해진다.
서재 뒤편으로는 청암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정자 둘레에는 연못이 있고, 정자로 오르내리기 위한 돌다리를 만들어 운치를 더했다.
정자에는 충재 선생의 친필과 퇴계 이황, 미수 허목 등 조선 중 후기 명사들의 글씨로 가득하다.
청암정은 조선조 당시 영남 문필가들의 사랑채 역할을 한 곳이다. 고즈넉한 풍취가 어우러진 이곳에 들어서면 그 옛날 문인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충재 권벌선생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종가댁이 문중 사람들로 모처럼 북적인다.
(인터뷰) “제사 행사를 하기 전에 객지에 나가있던 가족들이 같이 모여 근황을 묻고 한다.”
권벌 종가의 오늘 제사는 불천위라는 아주 특별한 제사다. 불천위는 나라에 큰 공훈을 세운 사람이 죽으면 사당에 영구히 모셔도 좋다고 왕이 허락한 신위를 가리키며, 따라서 불천위 제사를 모신다는 것은 유서와 전통이 깊은 가문임을 자부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중요한 제사이다 보니 제수를 장만하는 것에도 각별한 정성을 기울인다. 종부를 통해 대대로 이어지는 내림 손맛으로 맛을 내고 이를 돕는 문중 여인네들의 손길로 푸짐하고 정갈한 제사 음식이 준비된다.
제상에 올릴 제수를 마지막으로 손질하고 확인하는 것은 문중 남자들의 몫이다. 제사상을 준비할 때는 조상이 마치 내 눈 앞에 계시는 것처럼 정성을 다 한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제사를 지낼 문중 제관들은 의관을 갖춰 입고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에 임할 준비를 한다. 제관들이 다 모이면 제사에서 각자의 역할을 정한 분정기과 축문을 쓰고 확인한다.
제사에 앞서 사당에서 불천위 신위를 모시고 나온다. 불천위 조상을 모셔 나오는 과정이기 때문에 예법에 따라 매우 엄격한 분위기 속에 진행된다.
제사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신위에 참배하는 참신을 시작으로 첫 술잔을 드리는 초헌을 하고 축문을 낭독하는 독축을 한다.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아헌과 세 번째 술잔을 올리는 종헌을 하고나면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우는 절차인 첨작을 하게 된다.
밥에 숟가락을 꽂아 조상의 식사를 상징하는 삽시를 하고 나서는 조상님이 안심하고 밥을 드시도록 제상 앞에 병풍을 두르고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잠시 엎드려 있는 합문이라는 의식을 가진다. 조상님이 잘 가시도록 마지막 인사를 하는 사신의 절차를 밟고 난 뒤 사당의 원래 자리에 신위가 모셔지면 절차는 끝이 난다.
결코 간단치 않는 형식과 절차의 불천위 제사, 권벌선생의 후손들에게 이 제사의 의미는 무엇일까
(인터뷰) : 제사를 행사로만 생각하지 말고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셨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기회로 여긴다.
불천위 제사, 그것은 보이지는 않지만 수 백 년을 지켜온 전통의 힘과 명예의 상징,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겠다. 물과 물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큰 강물을 이루듯 한 가문의 전통과 명예도 이를 지키고 계승하려는 후손들로 인해 면면히 이어져 갈 것이다.
추석 - 연동리 고산 종택 차례 (국립민속박물관)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전라남도 해남읍 연동리. 끝없이 펼쳐진 향기로운 차밭은 이곳이 바로 고산 윤선도의 종가임을 알려준다.
녹우당…고산의 4대 조부이자 해남 윤씨 시조인 어초은 윤효정이 현 위치인 백련동에 자리를 잡아 안채를 지었는데 그 후 사랑채, 어초은 사당,고산 사당이 증축되었으며,
특히, 사랑채는 효종께서 스승이었던 고산에게 하사하여 수원에 건립하였던 것을 고산이 82세되던 1669년에 현 위치로 옮겨 집 이름을 녹우당이라 하였다.
[인터뷰] 종손이 사는 집이기 때문에 ... 종가에서 실행해 온 관습이랄까,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8월 추석을 맞은 고산 종가에서도 차례 준비가 한창이다.
가통에 따라 제를 올리는데 사당이 둘 있는 고산 종택에서는 영원히 신주를 옮기지 않는 불천위를 모신 고산 사당에서 먼저 차례를 올리는 것이 법도다.
불천위라 함은 원래 나라에 큰 공이 있던 조상을 영구히 사당에 모실 수 있도록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를 말한다.
고산사당이 그러하다. 어초은 사당은 윤선도 자신이 정하여 자손에게 당부한 문중의 불천위로 기제사와 차례를 모시지 않는다.
불천위 사당에서 차례를 지낼 때는 술이 아닌 차를 올리는 것이 원칙이며 차례는 차사 혹은 다례라고도 불리는데, 본래 차를 올려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해마다 처음 수확한 햇 차를 추석 차례에 올리는데 한해 수확과 결실을 신고드리는 의미도 깃들어져 있다.
신위 오른편에서 차를 우려낸 후 찻잔에 차를 따라 올린다.
고위에서 비위의 순으로 잔을 채워 올린 후 모두가 한참동안 고개숙여 국궁하며 조상에 대한 예를 갖춘다.
고산사당에서의 차례가 끝난 후 안사당으로 가서 차례를 다시 지낸다.
안사당에는 종손의 4대 조상을 모시고 있는데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 4대 중 조부모님 때부터는 신위와 함께 사진을 함께 모신다.
제상차림은 고산의 진설도에 따르는데 육적이 아닌 어적이 올라간다.
바닷가 인근 지역에서는 어적을 올리는 곳이 많은데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
안사당에서는 차를 올리지 않고 술을 올리며 종손이 헌작을 한다.
안사당에서는 주로 직계 자손들이 모여 차례를 지낸다.
차례가 끝나면 제상에서 제물을 거두고 제복을 갖춘 채로 안사당의 대청에서 참석자 모두가 음복을 한다.
음복이 끝나면 종택의 뒷산에 있는 어초은 윤효정의 묘를 찾아 성묘를 한다.
전통적으로 고산 종가에서는 추석 성묘를 매우 간소하게 지내는데 제수를 따로 차리지 않고 단지 산소 앞에서 재배를 드리는 정도로 한다.
일가 친척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조상을 생각하고, 담소하고, 화합하는 자리…
추석 차례는 전통을 이어가고 가족의 화목을 소중히 하는 우리 전통문화의 지혜로움을 엿볼 수 있는 세시풍속이다.